믿는 자는 죽음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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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현대 문명이 발달해도 죽음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다니다가 죽음이 눈앞에 오면 안타까움과 억울함으로 땅을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외면하고 부인해도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맞을 수 있다면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일 벌레처럼 열심히 일만 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라는 최대의 적을 앞에 두고 두려워 떠는 현대인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통계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한국인들 가운데도 40대에 죽어 가는 남자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죽음을 준비해야만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이 세상에 집착하여 싸우고 미워하며 빼앗고 짓밟는 삶을 살다가, 죽음이 오면 후회와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이 최고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준비의 장소로 알고 내세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일본의 스즈끼 마사히사 목사는 갑자기 찾아온 재기 불능의 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3:11)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내 생활의 정점으로서 주의 나라를 이같이 깊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를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여러 번 죽음을 넘나들며 삶을 유지시키지만 반드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치스의 총칼 앞에서 죽어가며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생명의 시작입니다."라고 한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의 말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죽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 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곳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 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새 성광 교회
담임목사 김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