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의 의미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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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봉수 목사
유월절의 의미
본문/ 출 12:1-14
작년 4월 이스라엘 정부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의 작품 연주를 50년만에 허용하기로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독일의 대통령이 이스라엘 의회에서 독일어로 연설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소위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때문에 특별히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다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했고, 독일의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을
금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과 독일 두 나라는 과거의 어두웠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일 양국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특별히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더욱
그 관계가 악화되고만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와 그 악연을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립과 갈등의 관계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한일 관계는 왜 독일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처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역사를 대하는 태도 차이입니다.
우선 독일을 살펴보면 겸허하게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반성했고, 철저하게 보상했고, 또한 잘못된
역사를 정직하게 국민들에게 가르치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대량 학살을 자행했던 가스실, 생체실험실, 고문실, 산채로 사람을 태워 죽이던 화덕, 사람 시체로
사료나 비누를 만들던 작업실... 그대로 보존하면서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이 유대인의 묘지를 찾아 눈물로 사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보고 마음으로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어떻습니까?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미화하고 있고, 있던 사실을 감추고, 또한 없던 사실을 만들어 넣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저들의 태도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이스라엘의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사는 곳 곳곳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만들어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학살당했는가를 생생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인 자녀들은 이 박물관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되고 두 손을 불끈 쥐게 됩니다. 다시는 이런
참혹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제하에 애국지사들이 고문당하던 그 방의 흔적들을 페인트로
지워버립니다. 잠깐 감정적으로 냄비 끓듯이 흥분하다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역사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일본이 깔보고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역사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독일과 이스라엘은 정직하게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역사가 주는 의미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잘 가르쳤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오늘의 교훈과 채찍으로 삼고,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정직하게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 역사의
의미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그 역사의 의미를 쉽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밝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소중한 것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찾아서 제대로 가르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한다든지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매우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이후에 이 사건을 절기로 만들어서 길이길이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천년 동안 이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역사를 망각하지 말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유월절 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고
오늘의 신앙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미래를 향한 나침반으로 삼으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기억은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기억입니다. 있었던 일을 있던 그대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구구단을
기억하듯이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내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기억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파괴적 기억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기억할수록
나를 괴롭히고 온통 과거 속에 나를 가둬놓는 그런 기억입니다. 과거의 일들이 내 안에 상처로
남아서 기억할수록 오늘의 삶을 온통 어둡게 만들고, 내일을 향해 달려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창조적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기억할수록 내게 교훈을 주고 내게 용기와 격려를 줍니다. 이런 기억들은 오늘의 삶을 밝게 만들고
나아가 밝은 내일을 약속해 줍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면 그대로 내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 주고,
더욱 자랑스러운 일들을 만들어 가도록 자신감과 용기를 줍니다. 반면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가슴 아픈 일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면 또 그대로 내게 교훈을 줍니다. 다시는 그런 일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들이 창조적 기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그것이
단순한 기억으로 남아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파괴적 기억이
되어서 내게 고통만 더하고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이를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 사건을 바로
창조적 기억으로 만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서 오늘 우리 삶에
교훈이 되고 하시고, 내일의 우리 삶의 좋은 밑거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창조적 기억으로 간직하고자
할 때 이 유월절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그 때를 기점으로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TV 역사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고 있습니다. 궁예가 다스리던 시절 고려는 몇 차례
국호를 바꿨습니다. 고려에서 마진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태봉으로... 그뿐 아니라 연호도
바꿨습니다. 무태에서 성택으로, 그리고 수덕만세를 거쳐 정개로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금년부터 무태 1년이라고 한다고 했다가, 몇 년 안 가서 다시 금년부터 성택 1년이라고 한다 하는
식으로 한 해의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도 김일성 주석 3주기를 맞아 김일성 출생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주체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니까 1912년이 주체 원년이고 금년은 주체 90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호를 바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그 피를 양을 잡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문 기둥과 기둥 위 버팀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집은 구별된 사람들이 집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다른 애굽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노예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저들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세상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깊이 깊이
되새겼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선민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
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은 제사장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와 출애굽한 이후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에 있을 때 휴가를 나왔습니다. 친구들하고 시내에서 만나서 걷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물었는지
유치원 꼬마가 우리가 몇 사람이 걸어가는 지를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엄마! 저기 사람
둘하고 군인 하나 지나가요" 그러더라구요.
그 때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이 눈에는 나는 사람이 아니고 군인이구나! 그 때부터 제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고 군인이다. 군인답게 행동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동물이 살아가는 모습과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주목할만한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생존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입니다.
생존이란 주어진 현실에 단순히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주어진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실존이란 현실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가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의식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를 깊이 따져 묻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살아야 할 이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프레이리는 안타깝게도 많은 브라질의 농민들이 실존하지 못하고 생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데만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왜 살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남다른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놓치고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고 떠밀려 살아가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깨닫고 살아야 할 이유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이 유월절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둘째, 새로운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라고 말씀했습
니다. 유월절 그 밤에 애굽 사람들과 다른 음식을 먹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첫째가 어린양의 고기입니다.
대설교가 스펄전은 이 고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월절 예식을 집례하시면서 떡을 떼어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다. 받아 먹으라."
그렇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죽었던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몸을 떡을 통해서 먹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께 효도하려 할 때 그 기초가 감사입니다.
부모님께서 나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길러
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효도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고자 할 때 그 기초는 감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오늘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라"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가 무교병입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발효되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구운
빵이라는 말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무교병을 먹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무교병을 썼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누룩은 부패하고 더러운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5:7을 보면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뜻합니다.
죄와 연합하지 않은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뜻합니다.
셋째가 쓴 나물입니다.
쓴 나물은 쓴맛을 가진 여러 종류의 채소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피크리스라는 야생 양상추,
세리스라는 야생 꽃상추와 같은 야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고난이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고후 1:7에서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며 사는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벧전 4:13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을 함께 당할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쓴 나물을 먹을 때처럼 인생의 고난을
당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때 잘 참고 견뎌야 하고 더 나아가 이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유월절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창조적 기억을 통해
오늘에 교훈을 삼으며 내일의 밑거름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새로운 존재로 감사하며,
성결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