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시는 성령(6/3)
본문
본 문
설교자 박봉수 목사
가르치시는 성령
본문/ 고전 2:10-6
미국의 사회 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이라는 사람이 쓴 'The Age of Acess' 즉 '접속의 시대'라는 책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소유의 개념과 함께 시작된 산업자본주의가 막을 내리고 대신 접속이란 개념을 앞세운 문화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을 패러디해서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과거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접속하며 사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오늘은 접속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지런해 배워서 문맹을 극복해야 했지만 오늘은 부지런해 배워서 컴맹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은 배워야 살 수 있습니다. 배워야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배우기를 중단하면 그 날부터 삶이 퇴보합니다. 배우기를 게을리 하면 그 삶이 황폐화되고 초라해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탓을 하며 배우기를 주저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배워 무엇하노!'라며 배우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나이 70이 가까운 나이에 운전 면허를 따신 분이 계십니다. 무엇을 배웠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인가를 배우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을 하며 배우기를 포기합니다. '시간도 없고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아서'라고 배우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직장 생활하면서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에 학원에 나가 영어니 중국어니 어학을 공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삶이 활기찹니다. 그 삶이 풍성하고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이미 많이 했다고 배우는 일을 중단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선배 가운데 한 분에 제게 잊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박사란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닐세, 박사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가를 알게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세' 그러니까 박사가 됐다고 공부하는 일 배우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배우는 것은 학창시절에 국한 된 일이 아닙니다. 평생교육이라고 배우는 것은 평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배워 가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생활도 배우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보다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배움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지식을 배우는 것과 영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다른 일임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배움의 방법론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보면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육에 속한 자입니다.
육에 속한 자란 헬라어로 프쉬키코스입니다. 프쉬케를 중심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프쉬케는 혼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육체적인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에 속한 사람은 이 정신을 통해서 자기의 육체적인 생명을 풍성케 해 주는 것들을 배워갑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돈 잘 버는 법을 배웁니다. 세상의 지식을 많이 얻기 위해 공부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처세를 배웁니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 놀고 즐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신이라는 것을 통해서는 영적인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배워 가는 그 방법으로는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자와 대조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티코스입니다. 이 사람은 프뉴마를 중심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프뉴마는 성령과 교통할 수 있는 우리의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지탱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자는 그 영이 깨어서 성령께 민감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으며 신령한 것을 분별합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치는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은 신령한 사람만이 배울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육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배울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해서 칼빈은 정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배움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teachable spirit' 즉 하나님에 관해서 가르쳐도 배울 수 있는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소 귀에 경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에게 아무리 문자를 가르쳐 주어도 소는 배울 수 있는 지능이 없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어도 이 배움의 영이 없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사실은 하나님에 관해서 신령한 세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배움의 영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과 신령한 세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종교개혁 성지 순례를 하면서 정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수행했던 그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도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몇 곳을 감격적으로 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독일 베를린 서남쪽 에르푸르트라는 크지 않은 구 동독지역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도시이고, 회심 후에 들어가 영적 훈련을 받았던 어거스틴 수도원이 있던 도시이고, 그가 신부로 서품을 받았던 도시입니다. 그 루터의 흔적을 돌아보는 도중 버스 기사의 제안으로 전혀 기대하지도 뜻하지도 않았던 곳을 가게 됐습니다.
바로 Luthrstein 즉 루터의 기념비가 세워진 곳입니다. 시간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시골 길 한 복판 지금은 유채 꽃이 만발한 길 한 복판에 돌로 세워진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그 기념비가 제가 너무도 무겁고 중요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었습니다.
루터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루터 발 길 앞에 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만일 조금만 빨리 걸었다면 그는 그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루터 앞의 나무 가지를 쳐서 떨어진 나무 가지가 루터 발 앞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루터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그 이후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종교개혁을 위한 거보를 걷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자리가 루터가 회심했던 자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천주교 교인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아직 몰랐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몰랐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적인 가치를 깨달았고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우고자 긴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배움은 그 방법이 다릅니다. 세상 지식을 얻기 위해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배움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처럼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교사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1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요 14:26을 보면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이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 대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책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이 정립된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시다 시피 제자들은 대개가 공부를 제대로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영적 지도자로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던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였습니다.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선포했습니다. 이게 바로 신비입니다.
제 은사이기도 하신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이종성 박사가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신학을 공부한 박사이고 성경에 대한 내용 신학에 관한 내용은 우리 나라에게 둘째라면 서러울 분이십니다.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얼마간 목회를 하셨는데 3달 지나고 나니 할 말이 없더랍니다. 밑천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시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베드로를 가르치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지식도 없고, 주님의 말씀도 다 흘려들어서 생각나는 것이 없었지만 성령이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믿는 형제들 앞에서 설교할 때 말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인도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외칠 때 말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하루에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마 16:16에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누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의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은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연구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가르치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가르치십니다. 주의 종인 저를 가르치셔서 말씀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알려주십니다. 여러분들을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별히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시고 계시는 분이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뜻을 두고 계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 우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지, 또한 지금도 어떤 죄 가운데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셋째, 세상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죄와 악이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이 얼마나 간악하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사실들은 오직 성령이 가르쳐 주실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교사로부터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영적인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인의노래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간절히 사모할 때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향락을 찾아 헤매는 사람 눈에는 향락거리만 보입니다. 돈벌 궁리만 하는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그가 어떤 관심으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을 갈망하면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과 깊은 교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과 깊은 교제가 있는 그가 성령의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전화 통화할 때 감이 좋지 않으면 저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제대로 듣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성령이 말씀하셔도 듣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배웠으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들어서는 제대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쳐준 것을 실천하지 않을 때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 위에 충만히 임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은 2천년 전 그 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임하셔야 합니다. 임하셔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를 인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절,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어려운 시절 우리가 영적 소경되어 실족하기 쉬운 시절 우리를 인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가르치심을 오늘도 받으시고 남은 여생 지속해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것을 계속 배워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