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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계명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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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계명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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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봉수 목사



새 계명

본문/ 요 13:33-35

제가 잠시 미국서 공부하는 동안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국립공원이 있어서 소풍 삼아 그곳에 가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원 입구에 이색적인 간판이 붙어있었습니다. "야생 곰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
같이 간 일행과 함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이 돼서 먹을 것을 펼쳐놓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정말 소름끼치도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생 곰 일가족 다섯 마리가 불과 10미터 정도 가까이 까지 다가온 것입니다. 음식 냄새를 맡고 온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공원 관리인도 어떻게 알았는지 차를 타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절대로 곰들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을 던져서 곰들을 멀리 내어쫓았습니다.
음식을 줘서는 안 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안내원 대답이 곰이 음식을 받아먹기 시작하면 자꾸 사람들을 의지하게 되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고 결국 야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생 곰이 야성을 잃어버리면 자연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고 곰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생 곰에게 야성이 사라지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야생의 세계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그들만의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면서 야성이 사라지면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야생동물 다운 특성은 바로 야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정말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는 야성을 잃은 동물들처럼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일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즉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이 아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그들만의 특성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 34절에서 그것을 새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
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들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새 계명은 무엇인가?

본문 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새 계명이란 간단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특성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 잘 드리고, 기도도 잘하고, 교회 봉사 잘하고, 헌금도 잘 하고... 이런 것들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때문에 자기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은 다르십니다.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교우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정말 전도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분이셔서 헌금도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봉사 때마다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을 서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늘 불만이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그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이분을 다 싫어합니다. 이분이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하고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존경하거나 인정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이분은 늘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 자랑을 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높여줄 줄을 모릅니다. 남의 약점을 덮어줄 줄을 모릅니다. 늘 분쟁의 현장에서 앞장을 섭니다.

저는 이분을 보면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할 때 '서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을 하되 상대방이 받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쳐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꼬리를 쳐들고 살랑살랑 흔들어댑니다. 그리고 싸울 때는 꼬리를 땅에 깝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반대로 반가우면 꼬리를 땅으로 깔고 흔듭니다. 그리고 싸울 때는 꼬리를 세웁니다.
그러니까 개가 고양이를 만나서 반갑다고 꼬리를 쳐들면 고양이는 싸우려고 덤벼드는 줄 압니다. 반대로 고양이가 꼬리를 깔고 반갑다고 하면 개는 긴장을 합니다.
서로 감정 표현 방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개와 고양이는 늘 으르렁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며 해야 합니다. 사랑이 일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사랑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자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사랑은 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서 스승의 날인데 선생님께 선물 살 돈도 없고 그 흔한 카네이션 하나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설픈 솜씨고 빨간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선생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 종이꽃에 담았습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다른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가게 됐습니다. 우리 선생님 책상 옆을 지나는데 제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입니다. 제가 드린 그 색종이 카네이션이 쓰레기통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선물은 책상 위에 있었지만 제가 드린 그 색종이 카네이션만 버려진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 선생님을 향한 마음이 닫혀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의 사랑을 고맙게 받고 그 사랑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그를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는 마치 장작더미와 같습니다. 기다란 것이 있는가 하면 짧은 것이 있습니다. 곧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굽은 것이 있습니다. 또 굵은 것이 있는가 하면 가는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 모두가 서로서로 나무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장작더미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하지요 한 단으로 묶으면 됩니다. 끈만 조금 있으면 일은 간단합니다. 끈으로 묶어서 옮기면 됩니다.
바로 그 끈이 사랑입니다. 골 3:14을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끈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왜 새 계명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우선 본문 34절을 보면 이것을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이 무엇입니까?
계명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들 중 가장 권위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말합니다. 이 계명 중의 대표가 바로 구약의 십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법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계명은 반드시 처벌과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출 34:7을 보면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을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뒤에 덧붙이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을 잘 지키면 상을 주시되 천대까지 복을 베풀 것이지만,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시되 삼 사대까지 보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명은 일단 받으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기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할 수 없는 그런 성격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십계명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왜 새 계명일까요?
우리 성경에 '새'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카이넨'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헬라어의 또 다른 단어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네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new가 왔습니다. 이 네아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대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서 카이넨은 과거의 것이 시간이 지났다고 버리게 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나 질적인 면에서 새로워진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옛 날에도 있었지만 그 성격과 내용에 질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요일 2:7-8을 보면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그러니까 이 계명은 과거에 없던 전혀 새로운 다시 말해 헬라어 네아로서의 새 계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거에 있는 계명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서 제시된 계명 즉 카이넨으로서의 새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구약 레 19:18을 보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계명입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했습니까?
우선 이웃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사랑할 대상으로서 이웃을 자기들과 같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축소해서 해석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수준에 와 있지 않은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보았고,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된 사람은 결코 사랑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눅 10장에 보면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을 때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거반 죽게 된 채로 길 가에 버려져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이들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들이 지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사장이 강도 만났다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인이 강도 만났다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계명을 지키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웃의 폭을 모든 사람으로 넓혀 주었습니다.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도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그 폭을 원수까지로 확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통상 끼리끼리 사랑하고,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사랑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또 하나 사랑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옛 계명에서는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방법 그대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젊은 부모들의 자녀 사랑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는 특별해야 한다. 우리 아이는 남달라야 한다.' 이런 생각에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유난을 떱니다. 아이 생각보다는 자기 만족에 취해있고, 또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대리만족을 기대하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이런 사랑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독이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해석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철저히 희생하시고 우리를 위해 사랑해 오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을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필요한 것, 그 사람에게 유익한 것, 그 사람이 원하는 것 그것을 주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이 말씀을 정말 잘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이 말씀을 고별 설교에서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설교의 핵심 주제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입니다. 다른 말씀도 잘 지켜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잘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문 31절을 보면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뒤 남은 11 제자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11사람, 주님께서 앞으로 주를 대신해서 주의 일을 맡게 될 11사람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들은 다른 말씀은 몰라도 이 말씀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 마을에서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들고 가는 곳마다 사랑의 역사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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