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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꾼들이 본받아야 할 것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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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꾼들이 본받아야 할 것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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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봉수 목사



주의 일꾼들이 본받아야 할 것들

본문/ 사 61:1-3

제가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이 납니다.
인디언 마을에 백인이 공격을 해 왔답니다. 인디언이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서 전투가 며칠 동안 계속됐는데, 백인들이 수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으로 월등해서 이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답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인디언이 항복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을을 포위하고 진을 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도망치기도 쉽지 않고 해서 보초병 몇만 남기고 모두 막사 안에서 쉬고 있었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마을 밖으로 발자국 하나가 나 있더랍니다. 밤사이 인디언 한 명이 도망을 쳤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답니다. 또 그 한 명을 눈 속을 뚫고 추격하자니 힘도 들도 어려워 포기하고 있었답니다. 한 나절이 지나도록 마을 안에서는 인기척이 나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밤사이에 다 도망을 친 것이었습니다. 마을에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디언들은 추장이 앞장을 서고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다음 사람들이 그대로 밟으며 일사분란하게 150명이 마치 한 사람처럼 포위를 뚫고 나갔던 것입니다.

인디언 부족 전체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추장의 뒤를 그대로 따랐던 데 있었습니다. 추장이 가는 방향을 따라서 갔습니다. 추장이 밟았던 그 발자국을 철저하게 그대로 밟으며 따랐습니다.
만일 다른 방향으로 난 발자국들을 남겼더라면, 같은 방향이라도 다른 발자국들을 남겼더라면 모두 추격을 받아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전 11: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그러니까 바울이 주님 바로 뒤에서 주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 뒤에 따라오는 우리에게 자기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잘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이렇게 해야합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르는 것 말입니다. 주님이 가신 방향을 따라 가야하고 주님이 밟으셨던 그곳을 밟아야 합니다.
제게 그런 꿈이 있습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 교우들 모두 주님을 추장으로 삼고 그 뒤를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꿈 말입니다. 주님 뒤에 제가 서고, 제 뒤에 장로님들이 서고, 그 뒤에 온 교우들이 열을 지어 따르고... 그러면 우리 모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가 저 천성이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를 위해 일하는 주의 종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딛고 따라야 할 발자국을 보여 줍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면서 우리가 딛고 따라가야 할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보면, 본문은 이사야서 56-66장이라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 포함되어있습니다. 여기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고난당하고 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 61장은 메시야가 오셔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사 61:1-3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신 구체적인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장차 메시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고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언한 내용인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약 7세기 후에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 그대로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바로 메시야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눅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중에 고향 나사렛을 찾으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받아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곳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눅4: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더라" 말씀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찾으셔서 읽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눅 4:2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바로 주님은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 말씀대로 사역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공생애 기간 동안 일하셨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발자국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고 말씀했습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성령의 임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 11:2에도 같은 예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메시야는 그가 메시야로 보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는 말씀이고, 또 이 땅에서 메시야로 섬기시는 동안 줄곧 성령과 함께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는 성령이 동행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눅 3:22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이 예수님께 강림하셨습니다. 눅 4:1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눅 4;14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눅 10: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성령과 동행하셨습니다. 성령을 빼놓고 예수님의 사역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실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혼자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고, 성령과 상의하셨고, 성령을 따르셨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대로 해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요즘도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어떻게 보면 자신감의 표현인 것 같아서 멋있어 보일 지 모릅니다. 자기가 남보다 가진 것이 많고, 배운 것이 많고, 능력이 많아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마치 세 살 난 어린아이가 돈을 들고 장을 보겠다고 시장 한 복판에 나선 것과 같습니다. 이제 겨우 자전거를 배운 아이가 자전거를 몰고 시내 한 복판으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그 아이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너무도 위험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이 세상에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엄마 손을 붙잡고 시장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시장에 가서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사달라고 하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 사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도 성령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도 철저하게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눅 24:49에 보면 성령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행 1:5을 보면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주의 일을 하기 전에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없이 먼저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눅 11:13을 보면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나"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 강림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저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가 이 말씀 그대로 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설명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한 마디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몇 부류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가난한 자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다음으로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란 이 세상을 살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음의 상처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다음으로 포로된 자입니다. 여기서 포로된 자란 전쟁에서 참담한 실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실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다음으로 갇힌 자입니다. 여기서 갇힌 자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슬픈 자입니다. 여기서 슬픈 자란 울어야 할 일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너무 슬퍼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서 왔노라' 주님은 자신의 의에 취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대신 주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들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고통의 땅 저 갈릴리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3년간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은 저 의인의 땅 예루살렘에서 당하셨습니다. 의인들에게 고통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의인들에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명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으로 보내시고자 해서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 소위 스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환호하고 그들 때문에 열광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이 세상에 고통당하는 사람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에는 이 상한 대회도 참 많습니다. 한 마을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뽑는 대회가 열렸답니다. 그런데 우승자는 뜻 밖에 7살 된 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의 옆 집에는 최근에 아내를 잃은 노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답니다. 이 노인이 슬퍼하며 눈물지을 때 이 아이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노인에게로 갔답니다. 그리고 그 노인 무릎에 앉았답니다.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물었답니다. 그 무릎에 앉아서 뭐 했니? 그 아이 대답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할아버지가 우는 걸 도와드렸어요."

이 아이의 아름다운 모습은 고통당하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을 마음에 담고 그들 곁에 있었다는 것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그들 곁으로 찾아와 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 곁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메시야로 인해 그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고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마이너스 인생이 플러스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죽음을 향해 치닫던 인생이 새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그들 모두 이런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삭개오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창녀로 부끄러운 인생을 살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자기 인생이 마이너스 인생이라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플러스 인생이 되어 자랑스런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과거가 고통뿐이었다면 이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맛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처럼 사람들에게 직접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를 맛보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바로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자기의 삶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성 안으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분 때문에 내 삶이 변했다! 당신들도 그분을 만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가며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확신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면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아무개가 예수 믿으면 그 고통 중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확신이 필요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아무개가 예수께 나오려면 그 안에 영적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담대한 증거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주님 주시는 권능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가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설계하면 안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밟고 싶은 곳에 내 발자국을 남기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 우리 발자국이 남지 않고 주님 발자국만 남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은 정말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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