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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교회 / 출 6: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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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_교회(2) / 출 6:1 - 8 print


: 서정호 목사




제 목 : 바람직한 교회(2)
성 경 : 출 6장1-8


미국 보스턴 해변 어느 한 곳에는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날마다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갈매기들도 그 시간이면 그의 발 앞에 모여들었고, 어떤 갈매기들은 친해져서 노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합니다. 갈매기들에게 새우를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노인이 나누어주는 고급 요리를 마음껏 즐깁니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이 광경에 흥미와 궁금함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싼 새우를 아무 쓸데없는 새들에게 낭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비난은 사라졌고 반응은 달라졌습니다.

그 노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군의 배가 독일군의 어뢰에 격침되어 부하 몇 명과 함께 간신히 구명정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일간 뜨거운 태양과 거센 파도와 싸우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이것도 잠시뿐 비상식량까지 바닥이 났기 때문에 함께 탔던 부하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장군도 기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신이 희미해져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바로 그 때에 쓰러져 있던 장군 눈에 작고 흰 물체 하나가 안경을 통해서 보였습니다. 바로 갈매기였습니다.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아니 갈매기가 잡혀 주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장군으로 하여금 몇 시간 더 수면을 취하게 해주었고, 연장된 몇 시간 동안 장군은 섬을 발견하고 구조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갈매기에게 그 값비싼 새우를 대접하는 장군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습니다. 새우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죽음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많은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문인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면서부터 그들의 고난은 더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출5:21) 하고 불평하면서 비난하였고 모세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들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들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출5:22-23) 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어 보내 줄 것이니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해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결과가 이렇게 날 것이니 그 결과만 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리가 없습니다 (9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믿었는데 오히려 그들의 고난이 더하였으니 그들은 마음이 상해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하나님께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결론을 보았습니다(1절). 그리고 모세에게 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시작도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정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필요하신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망 중에 빠져 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인생들의 삶 속에는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절망에 빠질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미움을 받으면서 절망 중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이 영육의 질병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성의 문제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절대 택한 백성을 결코 홀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자가 가나안의 입국자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치료를 받고, 영의 치료를 받고, 육신의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신명기 28:1에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죠지 뮬러는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는 염려가 끝이 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는 신앙이 끝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지금 신앙과 염려 둘 중에서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러분 신앙이 지금 염려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염려는 그 안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천둥과 번개, 벼락보다 더 강한 것은 피뢰침입니다. 그 어떤 번개도 피뢰침이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지붕 위에 세우는 피뢰침은 그 불같은 폭탄과 같은 벼락이 떨어져도 그 피뢰침이 다 소화시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조그마한 쇠덩어리 하나 같은데도 거기에는 그 벼락을 소화시킬 수 있는 그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무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절망 가운데 놓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동족들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아 가지고 바로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를 대적하여 싸워야 할 모세의 느낌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출5:22-23의 말씀 중에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이런 절망에 빠진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에게 강한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강한 손은 대적자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심판자의 손으로 나타나신 것이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자의 손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비의 고민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새알을 3개 주어왔습니다. 때마침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새알을 제비 둥지에 넣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새알이 먼저 부화되어 새끼 새가 나왔습니다. 어미 새가 품고있던 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부터 제비는 알을 품지 않고 벌레를 잡아다가 새끼 새를 먹이는 것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제비가 알을 둥지에서 밖으로 밀어내어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 새끼를 먹여줍니다. 아마 제비는 그 새 새끼가 제 새끼인줄 아는 모양입니다. 새 새끼가 점점 자라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관찰하며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가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 서로 달라고 입을 벌려 짹짹거리는 새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먹여주고 가곤 합니다. 갈수록 그러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새가 날갯짓을 할 무렵 어미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듬해도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제비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을까요? 그 제비의 고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이상하다 이것이 아닌데, 이건 분명 내 모습이 아니야, 무엇이 잘못되었어. 다시 시작해야돼.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해. 아니야 결단해야해." 하며 고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민과 느낌이 있다면 이와 같은 제비의 고민이 아닐까요? 아무리 보아도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것이 아닐까요?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배우고 닮아 가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교회의 변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참된 교회개혁이 무엇이고, 올바른 교회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시아의 개혁도, 루터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이고,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니 교회개혁이니 하는 것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성경중심으로 변하는 것은 변화요 성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변화는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개혁과 변화는 성령의 교회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된 모습,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일까요?

출애굽교회의 모습

우리가 교회의 모델로 사도행전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또한 사도행전에서만 교회의 모델과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델과 모습은 신구약성경에 광범위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교회는 억압에서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애굽의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탈출하여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 출애굽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지니라(출6:7)" 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이란 애굽의 정치적 억압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억압에서 해방된 모습입니다.

교회가 자유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주의에서의 자유입니다. 율법주의란 공리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로마에 있는 스칼라쌍타에 가서 결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기도를 합니다. "스칼라쌍타란" 거룩한 계단이라는 뜻인데 그 계단이 아주 가파릅니다. 기도하며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기도하며 무릎으로 뒷걸음질치며 내려옵니다.

그러한 고행을 통해 인간은 거룩해지고 거룩해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구원의 방법인가? 루터는 이러한 고민 중에 고행기도를 하다가 문득 롬1:17이 생각났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즉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구원은 나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에베소서 2:8-9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교회들이 율법으로 얽어매고 공리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믿음과 은혜의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이방문화에서의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문화와 미신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며, 애굽의 인본주의문화와 이방사상과 가치관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이방문화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그곳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의 인본주의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신본주의 문화를 형성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와 사회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행복의 가치판단이나,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꼭 같다는 말입니다. 가치판단 삶의 질과 기준이 무엇이 다릅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황금 만능주의적 세속적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생활은 열심이면서도 자기가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헌금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사상입니다.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면으로 봉사하는 것도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탈출해야 합니다. 무조건 권력을 추앙하고 추구하는 잘못된 사상이 교회의 감투싸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제비 뽑아 총 회장을 세우자고 하겠습니까?

무조건 돈 많이 벌어 큰 집 짓고 큰 차 타고 다니면서 호화롭게 살면 성공했다는 지극히 세속적이요 이방적인 정신적 문화가 교회에 들어와 큰 교회 짓고 많이 모이고 예산 많으면 성공한 교회요 성공한 목사라고 판단하는 교회풍토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학 나오고 공부 많이 해서 박사가 돼야 성공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잘못된 평가기준의 문화가 교회를 스며들어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미신문화와 무당문화가 교회에 자리잡고 있어 예수 무당, 예수 점쟁이라는 신종 어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값진 은혜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진 은혜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죄의 고백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밭에 감추인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기쁘게 땅을 삽니다. 장사꾼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값진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이를 위해 만일 자신의 눈이 자신을 실족하게 하면 눈을 뽑을 것입니다. 값진 은혜는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즉석에서 따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세상의 삶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은혜답게 유지하여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을 세상에서 쏟아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의 길과 십자가 / 디트리히 본회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지식화 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이 미신화에 빠지지 아니해야 합니다. 셋째는 믿음이 율법주의나 공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근래에 교회개혁이니 갱신이니 하며 교회 변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세상의 쾌락주의 문화까지 무분별하게 교회에 끌어들여 자기도취와 만족에 빠져 생명 없는 죽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방문화에서 과감하게 탈출하여 보다 차원 높은 문화를 창출해야 합니다. 출애굽교회 참모습은 애굽의 이방문화를 탈출하는 탈출문화입니다. 인본주의 문화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의 생각을 초월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생활관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 기뻐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세속문화에서 우리는 탈출해하여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문화를 탈출하는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중의 25%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는 자들을 조사해보니 그 중에 기독교인이 25%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한 자의 다른 점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까? 기독교인들이 세속문화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사상, 그들의 생활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교회의 참된 모습은 정치적 억압에서 탈출하고 당시 애굽의 우상과 미신문화에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탈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해방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안에 거하고 세속적인 문화 즉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생활관에서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형식과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찬식을 하고 남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었습니다. 쥐가 창고에 들어가 떡을 먹었습니다. 쥐가 떡을 먹었으니 구원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논쟁을 했고, 세례 줄 물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파리가 성화 되었느냐 아니냐를 놓고 장시간을 싸웠습니다.

중세기 카톨릭교회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의식에 꽁꽁 매여 그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교회는 부패하여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북미와 남미의 문화적 차이는 남미는 성경을 가지고가 의식화하였고, 북미는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삶의 지표를 삼아 생활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의식과 제도에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생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사건은 이방인들의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으로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의식중심의 신앙의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생활하는 믿음입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예배는 있는데 생활하는 신앙의 모습이 없다면 이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 살기 위하여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제 목 : 바람직한 교회(3)
본 문 : 마 16:13-20
설 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생활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 고 합니다. 또한 좋은 교회가 좋은 교인들을 길러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좋은 교인이 좋은 교회를 이루어갑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고양이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는 목사가 항상 등을 토닥거려 주어야 만족하는 신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덜 보이면 서운한 감정을 여지없이 노출시킵니다.



둘째, 럭비공 신자도 있습니다.

어느 방황으로 튈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런 교인들이 무슨 일을 한다하면 언제나 가슴이 조마조마 합니다.

그 다음 목회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신자가 있는데 "고무풍선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바람이 잔뜩 들어 있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가 없는 신자입니다.

또 그네 신자도 있습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야만 동작을 취하는 신자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신자입니다. 가정에 조그만 일이 생겨도 목사나 권사를 부릅니다.

또 가오리 연 신자도 있습니다.

연줄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끈을 놓으면 곧바로 세상 속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요즘엔 호랑나비 신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주일은 교회에서 총천연색의 날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 나가면 가을의 병든 낙엽처럼 칙칙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입니다.

왜 이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나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움직여야만 진정한 고백이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칭찬 받고 복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

기독교 서적분야에서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그 책이름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 그런 책입니다.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던 다니던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일흔 일곱 가지 있답니다. 이 책은 사십대 이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만재 선생께서 신세대들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놓은 책입니다. 일흔 일곱 가지 이유를 상세하게 다 말씀드릴 것은 없고 분류해서 보면, 간추려 볼 때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우선 인상이 시끄럽고 유난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꼭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한다고 북을 치고,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그대로 붙들고 "어디에 사느냐? 이름이 뭐냐? 직업이 뭐냐? 식구는 몇이냐? 결혼은 몇 번이나 했냐?" 별것 다 갖고 물어보는데 아주 질색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너무 유난스럽게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에이 겁이 나서 교회 못 나가겠다.' 그런 얘기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집안 살림을 전혀 신경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문제아가 되고 남편들은 밖으로 나돌고 그리고 부부싸움이 잦고 소리가 납니다. '도대체 이렇게 교회에 나가면서 가정과 자기생활에 불충실하다. 내 이 꼴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겠다.' 이런 것들이 교회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자라는 것과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병행을 해야 하는데 그만 이런 외적 일에 대해서 너무 강요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배타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잘났다고 그러고 착한 사람인양하고 이렇게 된다는 거요. 그리고 먼저 믿었다고 해서 무슨 큰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뒤에 온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뒤늦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서 뒤에 나오는 분들이 '교회 가기 싫다. 잘난척하는 사람들 보기 싫다' 그러며 자기들만 다 의인이고 세상사람은 다 죄인인 것처럼 다 몰아 치는데 이런 것들이 거슬린다고 합니다.

다섯 번 째는 "교회와 세상이 별다른 것이 없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지더라.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보니까 학력,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심 많고, 공명심 많고, 자기 이름 내려고 하고, 시기, 질투가 많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선 이상에는 있고 없고, 가난하고 부하고, 세상에서 높고 낮고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여기는 똑같아야 되는데 이렇지 못하고 이걸 세상의 신분대로 또 돈 있는 대로 특별하게 대해주고 이런다고 하면 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거슬리더라'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 가기 싫다.'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의 존재목적

여러분,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한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쭉 가르쳐 나가다가 그 교훈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합니다. 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애굽의 정치적 억압과 이방문화, 우상문화에서 탈출하고 미신적 제도와 의식에서 벗어나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율법주의에서 해방되고 이방문화에 탈출하고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영원한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행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교회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춤추며 기뻐하는 잔칫집 교회였으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과 노래와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전파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으며 공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교회였으며 또한 오늘날 교회들도 이러한 시편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찬양과 춤과 노래가 있는 잔칫집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에 담아 전파하고 기쁨의 표정과 미소에 담아 전파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회복하고 공의와 진실로 심판하러 임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복음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의 생각에 의해서 지배되기 마련입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신앙고백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그 동안 가르친 진리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주님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복음사업이 지속될 수 있는지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천국사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본문16절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열거한 인물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시 오리라고 기대하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헤롯까지도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14:1-2 -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지 아니하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왕하2:21) 그는 다시 오리라고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말4:5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의사자 엘리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패망해 가는 이스라엘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민족의 패망을 바라모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의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성현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성현 중의 한 사람 아니면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는 자들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성현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복음을 증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마16: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바로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이 신앙고백을 내 것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친다해도 주체적 내 신앙고백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2) 그리스도시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란 구약의 메시야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삼대직능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당시 기름부음 받는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입니다. 여기서 왕이란 우리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주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중보자이신 구원자를 뜻하며, 선지자란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당신을 구약시대에서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이 백성들이 목타게 기다리던 메시야 구원자입니다. 하고 고백입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에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 같은 자들과 구별된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활동하고 기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과 함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만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에 경건한 그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도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 없이는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2.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입니다.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 예수님은 심히 기뻐하시며, 본문17-18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는 뜻은,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오늘날 성과 같은 것이며, "시몬"은 할례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베드로"라는 뜻은 돌 또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는 뜻은 베드로의 인격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은 교회의 든든한 반석과 같은 기초에 속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만이 교회를 굳건하게 세웁니다.

그러면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는 분은 누구입니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예수님이 예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떠한 인간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행20:28 -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주인행세를 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모습은 철저하게 주님이 주인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종이며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할 참 모습입니다.


3. 천국열쇠를 가지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천주교에서는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문지기 노릇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에 보면 이러한 왜곡된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2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의 모친과 가나혼인잔치에 참석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가 부탁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결국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 부탁하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탁하면 틀림없이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성모 마리아 상을 만들어 놓고 마리아에게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에게 기도해야 할 자이지 인간들의 기도를 받아 중간역할을 하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하여 행2:13-14 -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보이신 것은 마리아의 믿음과 종들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었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베드로 개인의 인격을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대표로 했고, 그 신앙고백을 보고 그 신앙 위에 예수님이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기로 하시고 이는 자기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열쇠란 무엇입니까?

①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② 모든 문을 여는 만능키가 되는 기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는 만능의 열쇠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천국 열쇠는 여러분의 바른 신앙고백 주를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 열쇠는 제자들이 받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베드로는 하루에 삼천 명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고넬료 집에도 가서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사도 바울은 이방나라와 로마에까지 가서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천국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만 천국 열쇠를 준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에게도 복음이라고 하는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천국 문을 여시고 이웃을 위해서도 천국 문을 여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천국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가는 곳마다 천국 문을 열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천국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기도입니다. 복음과 기도의 열쇠를 천국 문을 여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제일 처음 120명이 모여서 다락방 교회를 세웠고, 그 다음 3000명이 모여서 예루살렘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까? 그런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교회는 순수한 맛이 없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까? 그런 교회는 뜨거운 맛이 없습니다. 사회적인 경험과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까? 그런 교회는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까?

교회는 믿음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우는 집이다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 반석은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보다도 믿음이고 지식보다도 믿음이고 권력보다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사와 장로에게도 권사와 집사와 신자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교회의 기초가 되고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목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교회의 씨앗이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저들의 믿음을 떠 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시몬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시몬을 칭찬했습니다. "내가 누구인 것을 네가 바로 고백했다. 그렇다, 나는 그리스도요 죄인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로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지금부터는 네 이름을 시몬이라고 하지 않고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하리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고, 가이사랴 교회는 고넬료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고, 사마리아 교회는 수가성 여인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영암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바람직한 교회로 세워 가려면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고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집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정부가 예루살렘 교회와 소 아시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온갖 박해를 가하며 스데반과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과 폴리캅을 잡아서 죽였지만 초대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이 세상의 권력은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실 세상적인 힘은 없습니다. 교회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합니다. 교회가 오히려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기초와 재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탄과 지옥의 세력도 무너트리는 힘을 발휘합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약해질 때 오히려 영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음부의 세력이나 지옥의 세력이나 죽음의 세력이 절대로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합니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열쇠는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열쇠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첫째,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집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고 튼튼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집입니다. 여러분들, 믿음으로 사탄과 음부의 세력을 짓밟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실 뿐 아니라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즉 기도와 전도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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