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라 (마 3:1-11)
본문
- 설교 : 황광민 목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는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황제가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문을 막고 서서 못 들어가게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크리스찬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인상적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A. D 3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리스의 데살로니가에서는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양민도 1500명이나 학살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사건을 살생으로 규정하고 황제를 엄히 정죄하였습니다.
한번은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그곳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암브로스라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고 개종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분이었습니다. 그런 주교와 황제가 맞부딪혔습니다. 암브로스는 예배당 정문을 막고 황제가 들어오려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암브로스는 목숨을 걸고 황제를 향해 “못 들어갑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황제는 “주교님,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왕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길을 열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스는 “폐하께서는 다윗왕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다윗왕의 회개도 모방하셔야지요, 다윗 왕처럼 회개하십시오.”라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황제는 기가 질려 땅바닥에 엎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하였고 약간 앞서 회개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주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 둘째 주일에 이 말씀으로 큰 은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 회개가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합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설교하시면서 이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만큼 회개가 구원의 역사에 중요한 요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웨슬리 신학에서도 회개는 구원의 현관으로 정의하고 중요하게 봅니다.
회개는 주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데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입니다. 회개는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요, 주님의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B.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는지, 구경하러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자복하고 세례 받으러 온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경건하게 살려고 매우 노력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로 하면 양반입니다. 유교식을 말하면 도덕군자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영국식으로 말하면 신사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말해줍니다.
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회개해야 할 죄인들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다” 또는 “천국의 아랫목은 내 차지다”라고 합니다. 이는 아주 무지한 자의 말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자들의 말일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C. 회개는 방향전환입니다.
회개는 성경에서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방향전환입니다. “슈브”(히)와 “메타노이아”(헬)는 방향전환을 가리키는 단어들입니다. 잘못된 줄 알면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가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듯이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품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은 회개의 상징적 의식으로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회개와 세례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5-6절의 말씀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로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한도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습니다(11절).
여기서 세례와 관련하여 회개는 더욱 강력한 의미를 얻습니다. 세례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육신과 정욕에 대하여 죽어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삶의 방향전환이며 과거의 죄악 속에 살던 생활로부터의 단절입니다.
어떤 소녀가 목사님과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 : 너는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니?
소녀 :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목사 : 그럼 지금은 어떤 사람이야?
소녀 : 네, 지금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목사 : 그래?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은 없니?
소녀 : 제가 믿기 전에는 죄를 따라 다니는 죄인이 있는데 믿은 후에는 죄로부터 도망가는 죄인입니다.
소녀와 목사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말은 방향전환입니다. 죄를 따라다니던 죄인에서 죄로부터 도망 다니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위대한 방향전환을 시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도 육신으로부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도망 다니는 죄인으로 방향 전환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D.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멘.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방향전환이요, 과거에 죄에 속했던 삶으로부터의 단절이므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의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회개를 하지만 돌아서지 않기 때문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못하는데 이는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회개의 제사,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리며 번제를 드리면서도 방향전환 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이사야서 1장 10-13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아멘. 형식적인 신앙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E. 회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완성됩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물로 베푸는 세례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단을 해도 며칠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의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행하는 종교적 의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도 그 감격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아도 그 감동이 쉬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 잠기는 것은 죽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결단을 촉구하는 의식입니다. 오직 성령에 잠길 때, 즉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완전히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뿌리는 성령의 불로 태워야만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