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릴지어다
본문
열릴지어다
마가복음 7:31-37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닫혀진 공간 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유형의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장애인이었는데 장애인중에서도 중증의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아 들을 수 없고, 말도 어눌하여 언어를 잃어버렸고,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아람어로 "에바다" 즉 열려라. 이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의 귀가 열렸고, 입술이 열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극적인 기적의 상황을 35절을 보면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곳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장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고, 외롭고 답답한 자기의 세계 속에 갇힌 채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권능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에바다. 열려라"고 말씀하시면 그는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가슴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이렇게 귀가 열려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할 인생들이 열리지 못하고 닫혀진 세계 안에서 외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닫혀진 내 인생의 벽에서 나도 어떻게 탈출하여 새로운 삶. 부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 기적을 베푸셨는가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1.개인적으로 접촉을 시도해야 합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 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가운데서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개적 접촉이 아니라 개인적 접촉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듣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이 사람의 처지를 배려해서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분리해 내셨을 가능성이 많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루실 때나,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도 한가지 방법을 고정적으로 쓰지 않고 그 사람의 처지에 맞는 방법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먼저,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시고, 그 다음에 보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침을 딱 뱉어 가지고 한 것"처럼 연상할 수가 있는데, 표준 공동번역 성경에 보면 "침을 묻혀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양 손가락로 그의 귀에 대셨을 때, 그리고 예수님이 침을 묻혀 그의 손으로 혀에 손을 대셨을 때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말을 하지 못했던 그의 혀. 쓸모가 없었던 그의 혀. 고통하고 있었던 그의 혀에 예수님의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 "아! 내 혀에도 무슨 일이 생기겠구나"하는 주님을 향한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처지를 아시고, 나의 갈등을 아시고, 나의 고민을 아시고, 나의 좌절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있는 나만의 비밀과 그리고 나만의 두려움과 내 불안을 아시면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오시며,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10:3절에 보면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말씀하시며 "양의 이름을 각 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름은 사람에게만 붙여서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 말고 짐승 중에는 아마 개에게만 붙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개" 이름은 대부분 서양사람들의 이름입니다.
메리, 톰슨, 케리, 스미스, 불랙. 등... 그래서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이름을 개처럼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대에서는 목자들이 양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서, 그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오늘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삭개오야, 마리아야, 마르다야, 문재야, 문재는 제 마누라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였던 나사로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아픈 가슴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때 주님이 만약 "나사로야 나오너라"말씀하지 않고 "송장들아 나오너라"그랬다면 볼 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죽었던 송장들이 그때 다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부활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대표로 나사로 한사람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 한 사람의 이름만 불렀던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내 이웃들에게 그의 인생이 새로워지는 그런 경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도 주님처럼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서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개인적 관심과 개인적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기적은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2.하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34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씀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의 전통에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 습관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집중한다는 차원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기도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기도할 때 단 한번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방법은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눈뜨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기도의 형태는 "하늘을 우러러"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린 모습의 기도입니까?
여러분들도 이따금씩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사람을 고치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없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복음서를 보면 "나는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다"는 예수님의 고백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봉사의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비극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봉사를 하는 분일수록 저는 더 필요한 것이 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하고, 더 많은 기도를 하면서,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른 예배를 통해 임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기도하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일수록, 선교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하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비극, 우리는 이 비극 속에 빠지지 말고 하늘의 도우심을 바라보시고, 주님의 능력, 주님의 기쁨으로 이웃들을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3.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34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그 다음에 "탄식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 보면 탄식이라는 말을 "아주 깊은 탄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냥 탄식한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탄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탄식을 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듣지 못하는 아픔, 얼마나 괴로울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괴로울까?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아픔이 얼마나 심할까?
견딜 수 없는 그의 고독과 단절의 그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면서 주님은 탄식하시며,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수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4:15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와 더불어 연약함을 함께 체휼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체휼"이라는 말은 "동정한다"라는 말로서 "함께 느낀다, 더불어 같이 느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십니다.
여러분의 좌절을, 분노를, 속상함을 아십니다.
나의 고통, 나의 눈물, 나의 방황, 나의 답답하심을 아십니다.
나의 억울함을, 나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나의 무기력함을 아십니다.
닫힌 폐쇄된 공간에서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런 이웃들과 내 가정과 나를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에바다" 다시 말해서 "네 닫힌 마음과 세계가 열릴지어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임할지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지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