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본문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마태복음 5:1-12
마4:25절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도 오고, 데가볼리에서도 오고,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도 오고,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서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4:24절을 보면 그들 대부분은 모두가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사람들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이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 언덕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마7:28-2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고, 그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의 이 권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비록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앉으셨지만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오늘 이 자리에 계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2,000년 전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가르치시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 앞에 우리는 압도되어야 하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15:16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그 말씀이 내 기쁨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팔복의 내용을 한데 묶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팔복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복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덟 가지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여덟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1.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도 있고, 눈물이 많은 사람도 있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생물학적인 특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한 성품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덟 가지를 개별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여덟 가지는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중생하고 거듭난 한 사람의 새로운 성품이요, 온전하고 거룩한 성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이 예수님 자신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팔복을 가만히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마치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 모습에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고, 애통함이 있고, 온유함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고, 예수님의 그 얼굴에는 화평이 있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해야 된다"라는 것으로서 "너희는 모두 나처럼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말하기를 "진정한 구원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요, 예수님을 닮는 자요, 결국에는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를 배우고 따르고 닮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그분을 더욱 닮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는 손 씻듯이 다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살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한주간 동안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매일 묵상하시면 그 말씀이 나의 성품을 심는 씨앗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 가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2.이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 "복이 있나니"라는 말투는 감탄사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행복이여!"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화평케 하는 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 아는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탄과 감격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입니다.
그런데 이 "마카리오스"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행복을 가리켜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 속에는 "내가 누리는 행복을 너희도 항상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는 주님의 심정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분이 없었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핍박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만큼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심령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큰 소리를 쳐야 이깁니다.
온유하면 손해 봅니다.
그런데 온유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못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행복인 것입니다.
이 행복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누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러나 "불행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한 사람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그네스 레플리어"라는 사람은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을 통해서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좇아다닙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솔로몬까지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물론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전도서가 선언한 것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중주의 헛됨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행복은 소유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심령이 가난한데 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애통하는데 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긍휼이 여기는데 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데 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심령에 왕으로 모시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우리 모두의 행복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