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납시다
본문
다시 일어납시다
눅 7:11-17
최근에 장기적인 경제불황과 자아정체감으로 학업성적, 외모, 친구관계, 그리고 직장에 대한 불안정으로 이 땅의 청년들이 피지도 못하고 져버리는 꽃잎들이 있습니다.
요즘 10만여명이 넘는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약물 남용으로 중독에 늪에 빠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몇가지 현상으로 집약 될 수 있는데 첫째는 청년 자살율의 급속한 증가요, 둘째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이고, 셋째는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죽어버린 한 청년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떤 한 과부의 독자였다고 의사 누가는 기록합니다.
남편이 없는 외로운 과부어머니에게 유일한 소망이었던 이 외아들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 절망의 행진이 멈추고 이 행진은 부활의 행진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이 청년을 다시 살리신 것이며,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무엇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이 시대 이 땅에 절망으로 주저앉은 청년들을 예수께서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다면 도대체 그것은 예수의 무엇일까요?
1.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미움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하셨답니다.
한 노인 할아버지가 혼자 손을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아니 할아버지는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셨습니까?”했더니 “아니 옛날에 많았는데 다들 죽었지”라고 대답하시더랍니다.
이 유머의 교훈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 할아버지는 미움으로 이웃을 죽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머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간과해버린 교훈이 하나 있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은 이웃을 죽일 뿐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움으로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해 왔습니까?
미움은 독입니다. 그리고 미움의 독이 우리 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체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본문의 죽은 이 청년을 살려 냈습니까?
13절을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부를 보시던 예수님의 사랑의 눈,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두 개의 화분에 같은 종류의 화초를 놓아두고 같은 조건에서 하나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또 하나에게는 미움의 눈길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길을 받은 화초는 그렇지 않은 화초보다 시간적으로 네 배나 더 긴 시간동안 생명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화초를 향한 사랑의 힘이 그렇다면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힘은 어떠할까요?
무엇이 오늘날 죽어 가는 이 땅의 청년들을 다시 살려 낼까요?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가족, 자녀, 이웃들을 살려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그 사랑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유일한 구원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가페의 사랑인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바로 해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해야 하고, 이 사랑을 알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에 미국 청년들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어가던 히피 세대들이었는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누구도 시키지 않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자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허무를 노래하던 기타반주에 새 가사를 붙여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그 신선함 전하고 싶으리”
그렇습니다.
당시 미국을 깨운 예수님의 사랑이 큰 불길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동일한 주님의 사랑 그 작은 불꽃을 경험하면 이 땅의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2.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이 청년이 일어난 것은 주님이 이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이 청년을 다시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설교나 도덕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처방이고 말씀이 해답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 그렇다는 것인가? 라고 반문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이 말씀으로 죄인인 인생을 새롭게 다시 지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5:25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즉 이 말씀이 살리는 것이라고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11장에서는 죽은 장년이었던 나사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가 무덤을 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청년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막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도 육체의 부활이상의 사건이요,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처럼 이 땅의 청년들과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나려면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3.주님의 손길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두가지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둥병 자이고, 또 하나는 시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가운데 하나는 이 두가지를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는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두가지 규칙을 다 깨트리고 만지신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 자들을 만지셨고, 지금은 죽은 자의 관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자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었고,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만지심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만지심의 기적이야말로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만지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린 순간부터 엄마와의 접촉을 통해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접촉이 결핍되면 인간의 정서적인 성장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예수님의 손길이 바로 인생의 소망이며,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의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때 “주님, 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잡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말로써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의 자녀들을 힘껏 안아 주시며 “주님, 당신이 이렇게 안아 달라고”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동일한 주님의 기적의 손길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과 이 땅의 청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만지시면 우리가 다시 일어나고, 우리의 자녀들이 다시 일어나고, 이 땅의 청년들이 일어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적이 끝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나다.
그러므로 어제와 오늘이 변함없으신 주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어려움을 감추거나 은닉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보여드리며 진실하게 간구하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시며, 주님의 어루만져주심의 사랑의 손길을 기대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