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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눈이 열려 새 세상을 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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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신령한 눈이 열려 새 세상을 본 사람

요9:1-12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불편한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도 시각 장애인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인생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고 인생의 모든 활동을 마비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실명은 분명히 인생의 비극입니다.

오늘 분문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소개하려는 더 큰 비극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9:40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그러면 우리가 소경이란 말인가?"라고 물었을 때
요9:41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소경인줄 모르는 소경 곧 영적 소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고침받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25절에서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는 새사람이 된 이 한가지로 행복하고 감격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하여 "신령한 눈이 열려 새 세상을 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이 사람에게 새 세상을 보게 한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조명하여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예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2절을 보면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3절에 보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죄가 초래하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많은 고통의 경우 오늘 본문의 소경처럼 우리의 고통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가 되도록 허용된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을 만났을 때 우리들은 무엇보다 자학하지 않고, 고통의 이유를 아시는 유일하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고통을 무지한 우리의 이웃들이 정죄하고, 상처를 더할 때에도 그들과 맞서 변명하지 말고, 나를 완벽하게 아시고, 나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예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나를 위한 도움이 되어 주기보다도 나를 오히려 신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 내 고통을 더 할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나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의 빛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분만이 나의 출생부터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할 미래에 나에게 펼쳐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를 아시는 분이 내 인생의 길에서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찾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감격할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찬양할 일이 아닙니까?

2.예수님은 우리를 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길에서 나의 고통을 이해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도 나를 돕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는 인간으로 오셨으나 인간 이상의 분이시기에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넘어서는 일까지 우리를 이해하시며 도울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6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진흙이었을까요?
어느 주경학자는 "이 순간이 그가 창조주이심을 계시하는 순간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창조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던 바로 그 동일한 손길로 이 소경을 만지시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자가 치유자가 되신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1:3절을 보면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했고
1:14에 보면 "그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가 치유자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유명한 포드 자동차 정비공 한 사람이 차를 몰고 아침에 직장으로 출근하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차를 길옆에 세운 채로 한참 고치려고 시도했으나 고치지를 못하고 있는데 세단 하나가 지나다 서더니 노신사가 옆에 다가와 "도와 드릴까요?" 물었다고 합니다.
속으로 이 정비공은 "내가 고치지 못하는 차를 누가 고치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차를 만지더니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동을 걸었더니 시동이 되더랍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정비공이 꾸벅 인사하며 "선생님, 죄송하지만 존함이 누구이신지요?" 묻는 그에게 이 신사는 명함 한장을 건네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고 써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고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소경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바로 창조주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동일하신 창조의 능력으로 그리고 사랑의 연민으로 우리를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동일하신 그분이 저와 여러분을 만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우리로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를 마침내 보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보게 하는 일" 이것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일을 위해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일을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에게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소경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실로암 못이었을까요?
과연 실로암 못이 이 소경을 치료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실로암 못이 소경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아 오신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것입니다.
이 소경이 한일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더니 눈이 열린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새 인생이 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침받은 소경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가 그 동안 익숙해 있던 어둠에서 구걸하는 생활을 했을까요?
아니지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체험한 것을 간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빛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당장 벼락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찬양하는 자가 되었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를 겪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눈이 열린 순간 모든 것이 감사로 변했고 찬양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녀의 자서전에 보면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느날 설리반 선생이 헬렌을 펌프장으로 데려가 그녀의 손을 펌프꼭지에 갖다 대고 차거운 물을 퍼올려 손에 물을 느끼게 해주면서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물(w-a-t-e-r)이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의 촉감과 함께 갑자기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일깨우는 영혼의 전율이 임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빛과 희망 그리고 기쁨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솟아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순간 이래로 그녀는 다시는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 소경도 눈이 실로암의 물에 적셔지는 순간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눈이 생명의 물을 느끼고 어둠에 익숙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그의 인생은 감사로 변한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쓴 "내가 만일 3일만 볼 수 있다면" 책이 있습니다.
그 책 내용을 보면 나에게 만일 3일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첫째 날은,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이 세상을 보게 해 준 나의 스승 설리번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 아기의 순결한 얼굴도 보고 싶고. 그리고 오후가 되면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고.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타는 저녁노을을 기도하며 지켜보고 싶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고. 나는 이날 인류 역사의 과거 현재가 숨쉬는 뉴욕 자연 박물관을 꼭 방문하여 그곳에서 선사시대의 공룡들과 인류의 찬란한 유적을 보고. 그리고 다음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하여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품들을 감상하고, 저녁이 되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다.
셋째 날은,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거리의 풍경, 강이 흐르는 모습, 보트가 떠내려가는 모습, 높이 솟은 탑 엠파이어 빌딩의 모습을 보고, 5번가에서 시작하여 슬럼가 그리고 외국문물이 숨쉬는 곳들도 보면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이 깊어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 때 나는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평생을 산 여인이 한 아름다운 스승 설리반을 만나 이토록 눈물겨운 감사를 말하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과 저의 감사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러분과 저의 눈을 열어 새 세상을 보게 하신 위대한 스승,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의 어둠을 쫓아내고자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만난 사람들이라면 오늘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감사에 빚진 자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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