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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주님의 제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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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당신은 주님의 제자입니까?

막:3:13-19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의 공생애 기간 중에 쓰실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열두 명이었을까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열 둘이라는 숫자는 대표 수의 개념을 갖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지파들로 백성들을 나누셨을 때 열두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21장에 보면 완성된 천국, 새 하늘 새 땅의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그 천국은 12개의 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2개의 보석, 그 기초석이 있었고, 그 열두 보석마다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열두 명은 바로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지금도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세우실까요?

1.그들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원하셨던 제자들의 자격은 열거되어 있지 않고, 그냥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사람을 선택하는 세속적인 기준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입니다.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들은 세상적으로 굉장히 내세울 만한 뭘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천대받던 그 당시에 갈릴리 어부들과 세리들 이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요?
저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주님께 붙들림을 받았을 때 그들이 비범한 일을 할 수가 있다,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대표적인 제자들에게 붙여 주셨던 별명에서도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에게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16절을 보면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라고 했습니다.
본명은 시몬이고 별명은 베드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란 반석이라는 뜻인데 시몬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성격을 살펴보면 아주 성질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는 베드로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사람을 변화시켜 반석처럼 쓰시겠다는 것이며,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로 이 사람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별명 속에는 이 사람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요한에게 주신 별명은 보아너게인데 그 뜻은 일반적으로 번역할 때 우뢰의 아들들, 즉 천둥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긍적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고, 또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1세기의 유대인들의 문서를 보면 우뢰를 하늘의 천사, 하늘이 보낸 강력한 메신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벼락이라는 것으로서 생각해 보면 아주 파괴적인 것이고, 아주 급한 것, 이런 것들을 우리가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사실상 야고보, 요한의 성격이 벼락같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았을 때, 베드로와 함께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사도의 생애를 이들이 살게 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은 모두 약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촛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명단에 항상 맨 끝자리에 나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입니다.
19절을 보면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마디로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이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아주 비판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으며, 이해 타산에 밝은 사람, 돈에 밝은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님 제자 일행의 회개 관리를 하다가 시험에 들어서 마침내 예수를 파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할 때 두 사람이 똑같이 실패했고, 똑같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났고, 유다는 영원한 배신자의 자리에서 비극적인 생애를 마무리 짖게 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자기 약점을 직면하면서 그 약점 앞에 눈물을 뿌리고, 회개하고, 고치면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누구나 내가 가진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고,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내 약점을 내려놓고, 주님의 다루심을 기꺼이 받겠다는 준비만 되어 있다면, 여러분의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번째 제자들을 선택하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가 가진 약점, 내가 가진 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주님은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주께서 그들과 함께 있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시고 거기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선택의 중요한 목적이 친교적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친교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 놀라우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고, 친교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동이 되지 않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 이 허물 많은 사람. 이 약점 많은 사람. 그런데 주님이 나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고전1:9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미쁘시도다"라는 말은 "성실하시다 신실하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훈련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말씀은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전달하시고, 주님의 삶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시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과 같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방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펼칠 때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나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말씀에 대한 애정이 없고,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고,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저는 이건 병든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무릎꿇고 싶은 맘이 없고, 기도의 목마름이 없고, 기도의 갈증이 없다면 저는 이것 역시 병든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씀훈련. 기도훈련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 기회를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일체의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기도의 훈련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성도들을 보면 말씀은 좀 읽는데 기도는 전혀 안 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무릎꿇어 기도는 하는데 아예 성경은 닫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좋은 사례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서 기도거리가 나오고, 주님의 음성 들으면서 대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의 균형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주님의 기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제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주께서 우리에게 전도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했습니다.
친교와 훈련을 넘어서서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과 대화하고, 또 주님께 배우고 그래서 마지막에 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하게 되면 주님은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15절을 보면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하고자 하는 이에게 전도하는 능력, 전도할 수 있는 환경, 전도할 수 있는 권능도 주님께서는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님의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전도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마지막 명령이 무엇입니까?
마28장에 보면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도전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고
행1:8절에 보면 "성령 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저는 제자들에게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존심, 전도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이것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도만이 인간을 바꿀 수가 있고, 전도만이 이 세상을 바꾸고, 온 역사를 바꿀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그 교회 안에 전도하는 교인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불란서의 스트랄스부르크라는 도시의 한 교회에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그 교회마당에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폭격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제였습니다.
그것만 복원을 시킬까? 아예 다시 만들까?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폭격 맞은 그대로, 두 팔이 없는 그대로 놔둡시다.
그리고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그 아래 이렇게 써 놓으십시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의 팔과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감동적인 멋진 얘기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자 하십니다.
고통받는 이웃들의 상처를, 그 아픔을 느끼며, 그들에게 찾아가는 주님의 손이 내 손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들의 아픔을 짊어지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손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찾아가는 손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 될 때 우리를 통해서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셨습니다.
동일한 목적으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 여러분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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