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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의 축복으로 새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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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야베스의 축복으로 새해를

역대상4:9-10

시중에 나가면 브루스 월킨슨이 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라는 조그만 책자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출판 이래로 1년만에 33판을 찍었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 책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전공한 사람,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는 교역자들도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아주 희소한 이름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한번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한 번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책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을까요?
그 제목의 부제를 보면 작은 글씨로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이렇게 씌어져 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사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야베스는 오래 전 이스라엘 족장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오늘 우리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배워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의 기도처럼 수준 높은 영적인 기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기도는 다분히 인간적이요,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가지고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읽으면서 무언가 마음에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먼저 "참, 인간적인 기도구나!" 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10절을 보면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 끝을 보면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소박하고 인간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후 기도 응답을 받아 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야베스를 놓고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다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가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야베스를 더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란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유대나라 사람도 존귀하지만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지런히 나와 엎드리는 사람을 더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는 사람이기에 자연히 더 존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야베스처럼 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똑같이 믿어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존귀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릎을 꿇고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등한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더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서 "나도 이런 기도를 좀 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IMF이후에 너무나도 혹독한 불경기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느끼는 취업난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모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야베스처럼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도록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존귀한 자로 대접을 해주시면서, 야베스에게 응답하신 그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역대상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1-9장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은 읽기에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몇 절씩 건너뛰기도 합니다.
무려 500명 이상의 이름이 나열되기 때문에 하나 하나 신경 써서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야베스의 이름에 이르러 조금 멈칫하고 다시 한번 주목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족장들은 그냥 이름만 언급하고 지나치는데, 야베스에게 이르러서는 뭔가 다른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잠깐만! 이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좀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에요. 한번 들어보세요" 하고는 그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3가지 독특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주 고생하면서 낳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특별히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그대로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50년 전 만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왜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내가 수고로이 고생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까요?
혹시 거꾸로 나왔는지, 아이를 낳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집안에 감당할 수 없는 우환이 닥쳤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이 어머니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아이를 낳았는지를 아이가 평생 잊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즉, "야베스"라는 말은 "고생,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고통이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고통을 자식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유대나라에서 아이 이름까지 그렇게 짓는 것은 무리수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에서는 이름이 팔자를 정하고, 팔자 때문에 운명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룻기서를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이민 갔다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허약하다"는 뜻을 지닌 "말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척하다"는 뜻을 지닌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두 아들 다 "허약하다", "수척하다"라고 지어놓았으니 그들이 잘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나중에 결혼을 했는데, 큰아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자식 없이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결혼 후 얼마 안되어 자식 하나 남기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평화"라는 이름의 의미 그대로 한평생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팔자 좋은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이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아서 야베스처럼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베스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 이름이 항상 자기 뇌리 속에서 불길한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될 팔자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름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가 인생을 끝낼지 모르겠다" 하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계속 그를 사로잡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의 눈앞에 있는 환경은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을 보면 넘어야 될 산들이 첩첩산중이고, 자기 이름은 불길하게 "고통"이기 때문에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야베스가 고민을 했다고 단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하기로 작정한 것을 보면 고민한 사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우연히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라고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한번 부르짖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좀 매달려야 되겠다"고 절박하게 느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안한 사람이 특별히 기도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제시대 때 기도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나, 50년대 교회 바닥에 가마니 깔고 예배하며 기도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보다 우리가 기도를 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형편이 좋아지고 걱정거리가 적기 때문에 기도하고 싶은 절박감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하나님, 제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내 지경을 넓혀주세요"라는 절박하고 긴박한 심정이 그의 기도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러다가는 망할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상은 나에게 복을 안겨주지 못했지만 내가 나의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나에게 안겨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내 운명도 하나님은 바꾸어주신다고 하는 그의 믿음이 작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야베스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들도 후히주시고 때를 다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응답 주시기를 간구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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