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달프십니까?
본문
삶이 고달프십니까?
막5:25-34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본 듯, 현대인들의 초상처럼 등장하는 한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재산과 집을 잃고, 희망을 가질만한 무엇이 전혀 없는 12년간 불치병인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오늘은 이 여인을 통해 고통의 정체를 발견하고, 나아가 치유와 회복의 비밀을 깨닫고 평안과 축복의 땅으로 달려가는 복된 말씀을 이 아침에 함께 듣고자 합니다.
1.이 여인의 형편을 보면
1)아픔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자입니다.
막5:21-43 말씀에는 두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치료된 사건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두 번째 치유사건, 즉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낫게 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 딸이 거의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가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입니다.
이 여인의 형편을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한 귀절 속에 이 여인의 온갖 아픔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느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만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여간 어려움이 많은게 아니었습니다.
우선 외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남정네들에 둘러싸여서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 뭇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 보이며 주님 앞에 치료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내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나병환자들도 내 환부가 썩어 들어갑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앉은뱅이들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질병을 주님 앞에 얘기할 수도 없었고 더더구나 환부를 보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혈루병은 종교적으로도 소외당한 질병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생여건이 열악한 시대였기 때문에 옷을 자주 갈아입을 수도 없었고, 목욕을 자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문둥병자의 경우와 같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밥 한끼를 나누는 작은 행복조차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인은 대부분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병들고 나면 사람이 그리운 법인데 이 여인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가까이 오면 입에다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고독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2)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의 피묻은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이 여인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몸이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한사람 두사람 다 떠났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뒤늦게 나마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잡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잡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교회에 들어와 예배를 통해 피묻은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아십니까?
세상사람들은 화려한 옷 붙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있는 옷을 붙들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은 권력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을 붙들기만 하면 거기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신비한 옷입니다.
붙들면 구원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치료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
붙들면 하늘 문이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피가 흐르는 이 여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정죄했습니다.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만지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부정해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이제 예수님도 부정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정해 진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여인이 정결해졌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는 깨끗게 하는 능력이요 정결케 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186장)
2.교회는 주님의 옷자락과 같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옷자락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옷은 몸을 감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다른 것 발견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이곳에 와서조차 다른 것 붙들고 돌아가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옷을 붙들고 돌아가셔야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손, 모태에서 여러분을 빚어만들던 사랑의 손, 능력의 손, 역사를 운행하는 그 손을 붙들고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주님의 피묻은 옷을 붙들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스런 주님의 옷입니다.
찬송도, 기도도 아름답게 흩날리는 주님의 옷자락입니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의 옷자락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올 때마다 이 신비의 옷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3.여러분은 혹시 접촉불량은 없으십니까?
지금 익산시에만 하더라도 5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들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저마다 예배하고 찬송하고 봉사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 품에 안겼느냐?
누가 피묻은 주님의 손을 붙들었느냐?
주님은 이 시간에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며칠 전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신호등 앞에 잠깐 서 있는 사이에 시동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동을 켜는데 엔진점검 불이 깜박깜박 들어옵니다.
그래서 카센타에 맡겼더니 엔진으로 연결하는 선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선 하나가 접촉불량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거기에 먼지가 끼어있기 때문에 엔진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접촉불량 신자들은 없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하는 그 사이에 먼지가 낀 사람은 없습니까?
찬송하는데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지 못하고 먼지가 끼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이 시간에 맑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접촉하여 주님을 붙들고 돌아가지 못하는 접촉 불량품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여러분 한분 한분이 바로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제가 만졌습니다.
영혼의 병이 너무 중하여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만졌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내어놓을 수가 없어서 주님만이 치료자가 되시고 주님만이 위로자가 되시는 줄을 알아 제가 만졌습니다.
주님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내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누구도 이것을 해결할 수 없어서 제가 만졌습니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제가 만졌습니다.
살아야 하겠기에 제가 만졌습니다.
주님 손놓고 살아가는 삶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기에 제가 만졌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주님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예배의 시간마다 주님이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을 붙드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만지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접촉하는 시간입니다.
놓치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4.이 여인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 땅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그냥 "여자"라고만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딸아" - 이 한마디는 이 여인을 가족으로 인정해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낯선 여인으로, 스쳐지나가는 여인으로 보지않고 가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버림받은 한 여인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붙든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믿음으로 나를 만졌느니라."
"너는 믿음으로 나를 붙들었느니라."
"너는 믿음으로 찬송하고 기도했느니라."
"너는 믿음으로 말씀을 받았느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처럼, 나를 계속해서 짓누르며 괴롭히는 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육체의 질병이 나를 줄곧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병이 나를 끊임없이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모님 때문에 혹은 자녀들 때문에 몹시 고통 받아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무척 고통 받아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제적인, 사회적인, 인격적인 실패들 때문에 괴로움 당해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의 동지, 가족이 되어야 할 교인, 속회의 회원, 목장 식구들로부터 상처와 갈등을 겪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딸아, 내가 알고 있느니라."
"아들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은 더 이상 이 여인의 삶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밖의 기록들은 이 여인의 본문 이후의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고 또 넘어질 때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라는 열두 해 혈루병 걸렸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던 여인은 무리 속에서 뛰어나와 예수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손수건에 뜻밖에도 거룩한 예수님의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순간, 주님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일은 가족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를 가족으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신 그분앞에 가족의 일원으로 성실을 다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으니 평안히 가라."
이 말은 원문 그대로 보면 평안을 향하여 가라는 뜻입니다.
이제 평안의 땅으로 가라. 네 인생이 새로워졌느니라. 모든 문제, 모든 갈등, 모든 근심이 사라졌느니라. 평안의 땅, 축복의 땅, 승리의 땅, 약속의 땅으로 가라! 는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자리에 모두 다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을 다 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손을 만져 주시옵소서.
이 손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손 손바닥 끝에다가 여러분의 아픔을 기도에 다 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손으로 주님의 옷을, 피묻은 주님 옷자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안의 땅으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구원과 승리, 환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