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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조수현목사) 사명을 이루지 않은 아합왕

본문

제목 : 사명을 이루지 않은 아합왕
주제 : 사명 순종 달란트
본문 : 열왕기상 20:31-43
말씀의 깊이 : ★★★★★

(참고)
..우상 숭배의 주범인 아합 갈멜산 능력대결에서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다 죽이는 가운데서도 아합왕에게만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가뭄을 다시 해소해 주시고 아합의 왕위를 지켜 주셨습니다. 한 번 용서를 해 주신 것입니다. 무언가 뜻이 있으셔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설교)
가끔 정부에서는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합니다. 일꾼들이 맏겨준 사명을 제대로 잘 완수 하지 못하였을때에 그 사람을 경질시키고 새 일꾼을 등장시키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 땅에 있는 백성들에게 다 어떤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지 못해서 그래서 경질되어 버린 한 인생의 안타까운 모습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여 늘 책망받는 아합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기회 마지막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람이라는 나라의 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고 아합의 것들을 다 제것이라고 이렇게 도전적인 말을 하면서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모습이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장 13절입니다. "(왕상20: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구로』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왕이 선지자에게 계속해서 "누구로", "누가" 하면서 되묻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우리가 느낄수 있습니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누구로 그 싸움을 싸울 사명을 주셨는고하니 각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방백은 그 당시의 지도 계층입니다. 지도 계층의 젊은 자녀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한 싸움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왕이 선두가 되라고 왕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특정인들에게 특정한 사명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왕상20:15) "아합이 이에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인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인이더라"

이제 왕과 그 232명의 소년들은 앞장서서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람왕 벤하닷은 마병들과 함께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도망간 벤하닷이 곧 다시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상20:22)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돌아오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아직 아합의 행할 일이 완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의 행할 일을 알고 미리 준비하라고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왕의 사명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벤하닷은 재 공격을 해옵니다.

"(왕상20:28)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1차 싸움에서는 13절에서 그냥 『네 손에 붙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2차 싸움에서는 『"이 큰 군대를 "다" 네손에 붙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명도 남김없이 아람 군대를 다 전멸시키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십니다. 다 손에 붙이신다면 정말로 다 진멸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2차 싸움이 붙었습니다. 하루에 적 보병 십만을 죽였습니다. 그 남은자 2만 7000명은 아벡으로 도망을 하여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성이 그들 위에 무너져서 적 2만 7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벤하닷왕은 또 용케도 살아남아서 다른 성읍으로 도망을 하여서 골방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왕상20: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위기에 몰린 벤하닷에게 그의 다른 신하들이 와서 말을 했습니다. "벤하닷 왕이시여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인자한 아합왕이 혹시 벤하닷왕의 생명을 살려줄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왕에게로 나아가서 살려달라고 하였더니 아합왕은 좋아하면서" 당신은 나의 형제입니다"하고 그 벤하닷을 오히려 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더욱 신이나서 제안까지 합니다. "우리 부친이 당신네 성읍을 점령했었는데 그것들 다 돌려주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 아합왕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 수도 다메섹에다가 거리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

마치 서울시와 이란의 테헤란시가 자매 결연을 맺고 서울의 남부 순환도로 한곳을 이름하여 테헤란로라고 명명한것처럼 말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아합은 그 말을 듣고서 벤하닷을 풀어줘 버렸습니다. 살려준 것 뿐만 아니라 풀어주었습니다. 순순히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서 아합왕에게 부여해 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 어떤 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왕상20:35)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으면 내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치라고 하신 그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 동무 선지자는 사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금방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선지자가 변장하고 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지나가자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종이 전장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끌고와서 이 사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대신하거나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이리저리 볼일 보다가 그만 그 종이 없어졌나이다."

그러자 아합왕은 말합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왕상20:42)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에 아합왕은 심히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아합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에게 주신 사명을 아합은 완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반드시 하여야 합니다. "이 큰 군대를 다 네손에 붙이리니" 과연 아람 군대 10만명이 칼에 죽고 2만 7000명이 도망을 가서 성읍에 들어가자 그 성읍이 무너지게 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벤하닷은 살아남았습니다.

벤하닷을 칼에 죽게도 할 수 있었고, 아니면 성읍이 무너질때도 죽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손에 죽게 하실려고 아직 살려두어서 아합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의 이 작정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주신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이제 자기가 당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그는 자기의 존재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우리가 거부하게 되면 그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상 숭배의 주범인 아합 갈멜산 능력대결에서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다 죽이는 가운데서도 아합왕에게만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가뭄을 다시 해소해 주시고 아합의 왕위를 지켜 주셨습니다. 한 번 용서를 해 주신 것입니다.

무언가 뜻이 있으셔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아합의 손을 동하여서 아람의 모든 군대와 벤하닷왕을 다 제거하실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 사명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명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합은 죽으리라." 결국은 이일로 인하여서 아합은 죽게 됩니다.

이만큼 사명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언가 뜻이 있기 때문에 나를 아직 이 땅에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기가 받은 사명을 완수 함에는 자기의 목숨을 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달란트의 비유에서 자기 사명 이루지 못하고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므나의 비유에서도 사명 이루지 못하고 수건에 한 므나를 싸아둔 자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사명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받는 처벌은 너무나도 혹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명은 바로 그 사람의 존재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 됩니다.

새벽마다 수탉은 지붕 높은 곳에 올라 목청 높여 우는 것으로 아침이 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괜히 심술이 났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저 소나 돼지에게는 좋은 음식을 먹여 주면서, 난 스스로 먹이를 구하도록 내버려 두겠어? 좋아! 내일부터는 아침이 와도 알려 주지 않을거야. 그러면 나의 소중함을 알겠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 되었는데도 수탉은 닭장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늦게 일어난 농부는 닭장에 있는 수탉을 보고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이 닭도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저녁에 돌아와서 잡아 먹어야겠다."


한편 간신히 살아서 돌아간 벤하닷은 나중에 어떻게 합니까? 칼을 갈면서 다시 힘을 길러 나중에 또 다시 재 공격을 해 옵니다.

(왕하6: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 성이 이 살려준 벤하닷 때문에 나중에 엄청나게 고생을 합니다. 포위되어서 성중에 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배가 고파서 여인들이 서로 아들을 바꾸어서 삶아 먹는 기가막힌 일도 벌어졌습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한 아합왕 때문에 이렇게 그 후에 온 백성들이 다같이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 희한하게도 이렇게 또다시 벤하닷이 3차 공격을 해 왔을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쓰셔서 그들을 물리쳐 주십니까? 성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천한 자들 바로 네명의 문둥병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성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밖에 살면서 성안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공급받아 살던 그들은 이제 성안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음식 부스러기가 나오지 않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마음으로 포위하고 있는 아람군대에게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걸음소리를 애굽의 큰 군대의 말발굽소리로 아람진영에 들리게 해서 그들이 애굽군대가 왔는 줄 알고 전부 다 도망가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도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왕과 방백의 소년들을 사용하실 때 그것은 은혜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모르드개가 조카 에스더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방백들의 자녀들 소년 232명 그들은 그 시대에 백성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 시대에 백성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아람 군대가 포위해서 공격해 오는 것처럼 이 시대 이 나라를 공격해 오는 죄악과 사치와 방종과 부패에 대해서 마주 나가 깨어서 기도로 싸워야 하는 사명을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바로 예수 믿어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그 사명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방백들의 자녀 232명으로 하여금 나라를 공격하는 아람 세력을 무찌를 사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시대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빛이 되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정 부패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에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때에 우리는 더욱 앞장서서 깨어 기도하며 경건생활하며 근검 절약하며 백성에게 복음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합왕에게 사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셔서 우리들에게 갖가지 직분을 주셨습니다. 아합왕과 같은 왕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바로 신약시대 우리 성도 개개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새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한갖 우리의 이름을 내 주고 우리의 이름의 거리를 만들어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우리에게 은밀하게 공격해 오는 세상 탐심이나 유혹에 우리가 마음 열고 있다면 우리는 아합왕과 같은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나를 불러 사명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명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아직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2차 싸움에서 죽은 아람 군대 10만명 이는 박뱅의 자녀 232명의 몫이었습니다. 아벡 성이 무너져서 2만 7000명 이는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케도 살아나 골방으로 들어간 벤하닷은 아합왕의 몫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임명 받은 사명의 사람들임을 다시한번 이번 기회에 깊이 깨닫고 시대를 직시하며 세월을 아끼며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 주신 자기 몫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서 영원한 하늘의 칭찬을 받으시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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