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입니다.
본문
디모데후서 2장 20~21절 2004년 05월 02일
사람은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릇은 무엇인가 담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릇 스스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으므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장식장 안에 멋진 그릇을 넣어놓고 보기도하고 자랑도 하지만 본래 그릇은 구경하고 자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 안에 담아야 할 것을 담지 않고 자신의 세상적인 아름다움만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 안에 채워야 할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 자랑거리인 자신의 겉모습만 가꾸는 빈 껍데기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릇마다 주인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릇에 담기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소유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담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사단에게 속한 자라면 그는 사단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는 사단이 주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며 사단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 될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단에게 순종하여 사단의 그릇이 되어 사단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드린 사람은 다시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것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그릇의 비유는 우리 인생이 새롭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聘쳅嗤?담고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질그릇을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다시 반죽해서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고후5:17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목사님이 이사를 하시다가 놋요강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마루 밑에 두셨는데 직공들을 데리고 놋그릇을 만드는 장로님이 오셔서 요강을 보시고는 달라고 하여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몇 일 후에 오셔서 보기 좋은 그릇을 내놓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이것이 무슨 그릇이냐고 물으니 요강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하셨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죽이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부터 그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사단의 그릇이었던 그가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므로 새로운 그릇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고후4:7).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사람을 물질로만 본다면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흙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모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영적으로 깨어있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자신의 부정함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가 입은 옷은 대제사장의 복장입니다. 대제사장의 복장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에게 비춰지자 그가 입고 있던 옷이 헌 누더기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질그릇에 보화를 담은 것과 같습니다(고후4:7).
가치 없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면 보배의 가치로 인하여 그릇의 가치도 달라지듯이 신앙생활을 하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배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보배이십니다. 신자가 된다는 말은 자신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달라지는 이유가 자신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니 생각도 말도 행동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내 속에 주님이 계시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속에 계시고 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젊은이 같았다면 유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유혹의 자리를 뿌리치고 도망갑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자신을 보고계신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딤후2:20).
큰집에는 금그릇도 은그릇도 그리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습니다. 밥그릇 국그릇 냉면그릇 등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상하리만큼 까다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하는 말마다 얄미운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때문에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그 사람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러려니 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릇마다 쓰임 받는 용도가 있습니다.
그 용도는 토기장이가 결정합니다(롬9:21). 진흙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것인가는 토기장이가 결정하는 것이지 진흙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합당한 사명을 주십니다. 국그릇이 국을 담는 일을 해야 하고 밥그릇이 밥을 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은 망각하고 다른 사람의 사명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사명이 아닌 일을 자꾸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은 최고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의 사명은 쓸모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 또한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팔은 팔의 일이 있고 다리는 다리의 일이 있는 것처럼 각 사람은 자신의 사명이 있는 것을 알고 그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많은 그릇이 있지만 깨끗한 그릇이 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딤후2;21에서는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은 금그릇도 아니고 은그릇도 아니며 깨끗한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릇이 사용되어지려면 갖춰야할 조건 중에 하나가 청결함입니다. 아무리 그릇이 좋고 값비싸고 아름답다하더라도 더러운 것이 묻어있다면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릇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청결 상태를 확인합니다. 만약 더럽다면 먼저 깨끗하게 한 후에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청결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함이 가장 큰 능력인 것입니다. 성전의 구조를 보면 번제단을 통과한 후에 바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두멍을 통과해야 합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상징하며 물두멍은 말씀으로 씻어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사역하기 전에 물두멍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죄사함을 받고 정결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물두멍을 통과한 후에 빛을 발하는 등대를 살피고 떡상을 살피고 향단에 향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신자는 죄사함을 전제한 상태에서 세상의 빛이되며,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고, 기도의 향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큰그릇이 되려면 부서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큰그릇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아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기왕이면 크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기왕이면 크고 위대하게 사용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쩔쩔매면서 사업을 하는 것보다 큰돈을 자유롭게 만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위대하게 사용되는 사업가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큰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큰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요? 렘18:4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고 말씀합니다. 즉 부서져야 좋은 그릇, 큰그릇으로 다시 빚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자주 만납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힘든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아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부수고 부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그릇으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채우려면 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왕하4장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기름의 축복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여인에게 그릇을 준비하되 빈 그릇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려면 내가 빈 그릇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 한 잔을 채워도 컵이 비어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채우려는 나의 그릇이 세상적인 것과 인간적인 욕망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채우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받으려면 내 것을 놔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준비된 그릇만큼 채워집니다.
엘리사는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라고 말합니다. 많은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풍성히 주시는 분입니다. 딤전6:17에 보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그릇을 많이 준비하면 많은 것을 받게 되고, 우리 편에서 많이 준비하지 않으면 풍성하게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늘 하나님 때문에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릇이 부족하면 빌려서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여인 집에 그릇이 많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이웃에게 빌리라고 가르쳐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그릇이 작다는 것을 자각하고 낙심하는데 그렇게 하면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낙심하여 주저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그릇을 빌려서라도 준비해야합니다. 그릇을 빌리는 방법,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내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목사도 목회는 성도들 보다 더 잘 알지 몰라도 세상일은 성도들 보다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목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것은 겸손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미련한 생각입니다.
둘째, 만남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응답의 사람을 만나게 하십시다. 저는 목회도 목사의 그릇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그릇까지 합쳐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릇에 기름을 채우십시오.
그릇에 채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여인이 그릇을 준비하고 그 그릇에 기름을 채웠듯이 신자는 성령의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여인이 살았던 것처럼 신자는 성령의 생명과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이 성령으로 채워지기를 위하여 오순절을 기다렸던 것처럼 사모하는 심령으로 성령대망회를 준비합시다.
마경훈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