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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드립니까?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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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드립니까?
김철현 목사 [성경본문] 엡6:1-3

현대 심리학에서는 한 인간을 구성하는 인격에는 세 개의 자아가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이드>라고 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본능적 자아>혹은<충동적 자아>라고 하는데 내 속에서 나를 충동질하는 본능입니다. 욕망을 꿈틀거리게 하고 내 멋대로 하고 싶은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때려 주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큰소리로 욕고 하고 싶고, 이 것 저것 다 팽개치고 훌쩍 떠나 버리고도 싶은 욕망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충동질합니다. 그러한 나를<이드>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에고>라고 하는 내가 있는데 이것은<현실적 자아>라고 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내 모습인 동시에 남들이 평가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마음속에는 무언가를 하려고하는 힘도 생겨나고 용기도 일어나는데 현실이라고 하는 무거운 제약이 나를 누르고, 체면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화가 나는데 참아야 하고 욕심이 생겨도 절제해야하고 실컷 자고 싶은데 일찍 이러나서 출근해야하는 등 자기를 조정해 나가는 나를<에고>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내가 있는데 그것을<슈퍼에고>라고 부릅니다. <초월적 자아>혹은<이상적 자아>라고 하지요. 나를 이끌고 가는, 되고 싶은 내가 있습니다.‘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한다.’등 마음속에서 명령하고 되고 싶은 나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내가 존재하는데 이것을<슈퍼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왜 고민을 하고, 얼마만큼 고민을 하느냐를 생각해보면 제일 깊은 본능적 자아인<이드>와 가장 높이 있는 이상적 자아인<슈퍼에고>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충동은 강한데 이상은 이래야 한다고 나를 제어하고 있으니 그 중간 자아인 현실 즉<에고>가 나를 잘 조정하지 못하면 방황하는 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장 높은<슈퍼에고>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부모로부터 수여되는 것으로 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너는 나쁜 놈으로 자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자아란 부모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자식의 이상적인 자아가 형성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입으로 자식들에게 이상적인 자아를 가르치면서 정작 나타나는 부모의 모습은 이상적이지 못합니다. 때론 말과 행동이 틀릴 수밖에 없을 때 부모에 대한 자식의 마음은 항상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당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자식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다니...’하면서 불만을 가지는 것이 자식들의 현실입니다. 그리고는 부모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천대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먼저 살아 본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자식만큼은 이상적으로 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님말씀과 실제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더 할말이 없어야합니다. 성경에서는 부모에 대한 이런 현실적인 불만과 원망을 어떻게 처리해야할까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이 땅에서 잘 사는 길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까지 등장하는 이 사회는 신뢰가 무너지고 사랑이 시들어 버린 분명 잘못된 세상입니다.<딩크족(DINKS)>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DINKS : Double Income No Kids의 앞 글자를 딴 것입니다. 자식이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결혼 할 때부터 자식을 낳지 않기로 약속하고 출산을 미루는 사람들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결코 자식이 부모에게 짐이 되는 세상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오래전에<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돈과 직장에서의 자기 위상 때문에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는 패륜아들이 등장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 밤에 부모의 집에 들러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지막까지 애틋해 하는 부모의 눈길을 외면 한 채 흉기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난자합니다. 그 후 아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돈에 만족하며 비정한 자식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륜을 무너뜨린 짐승 같은 자식의 행위에 분개한 한 형사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붙잡히고 그 형사에 의해 맞아 그야말로 짐승 같은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과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흉기로 난자 할 때 아들의 손톱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현장을 떠나는 비정한 아들이건만 그 아들을 향한 사랑 하나만으로 떨어진 손톱이 증거물이 되어서 아들이 범인으로 밝혀 질까봐 그 어머니는 안간힘을 다해 손톱을 주어 삼키면서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 손톱은 자신은 죽으면서도 그토록 살리고자 했던 바로 그 자식이 찌른 어머니의 목에 걸린 채 그것이 상처를 비집고 나와 발견되고 그것이 증거가 되어 잡히고 맙니다. 자기를 찔러 죽이는 자식을 그래도 사랑하여 숨을 거두면서까지 살려보려고 하는 어머니의 그 사랑이 있습니다. 비록 당신을 죽인 자식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임에는 틀림없기에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것저것을 고르는 것을 잘합니다. 과일 가게에 가면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잘 생긴 것으로, 색깔이 좋은 것으로 고르고 골라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선택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부모입니다. 내게 선택권이 없는 본래적이고 원천적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요지부동한 관계요 내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해서 좋은 부모다 혹은 나쁜 부모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적 이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그리고“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부모에게 대하여 하는 말을 딱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순종>과<공경>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위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즉, 존경을 겸한 사랑 이것을 공경이라고 합니다. 출21:17을 보십시오.“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무서운 말씀입니다. 신21:18-21을 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그랬습니다. 대단히 엄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불효를 아주 엄하게 다스리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우리나라에는 유교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유교학자들은 효(孝)를 모든 윤리의 기본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언제나“효도해야 하느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유교가 효도하자는 데까지는 괜찮은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에는 효 사상(孝 思想)이 없다고 나무랍니다. 그래서 한 유교학자에게 어느 목사님이 출21:17과 신21:18-21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효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보시오. 효도하지 않는 놈은 때려죽이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그랬더니“정말 입니까?”하고는 이 유교학자가 정말 그런 성경 말씀이 있음을 보고는 그 때부터 예수 믿었답니다.“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돌로 쳐 죽이라”이런 강력한 얘기는 정말 성경만이 가르쳐주는 무서운 효에 대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효자는 돌에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순종하라”는 말은 청종적 순종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조건 없이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즉“듣는 대로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순종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순종의 의미를 잘아야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순종에는 몇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노예적 순종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무서워서 혹은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기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그런 의미의 순종입니다. 두 번째로 조건적 혹은 실리적 순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단 순종해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다 보면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효에 대한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옛날에 효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산으로 땅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어서라는 것입니다. 땅이 없이는 부지런할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길은 오로지 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가진 땅을 꼭 물려받아야 하는 것이 사명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고로 아버지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산을 위해서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얘기입니다. 효를 실리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효를 통해서 실리를 얻으려는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 효는 있으나마나 합니다. 부모와 조상에게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야 복 받는다. 그래야 잘산다는 그런 동기에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실리적 순종, 조건적 순종이라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경과 순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감사의 동기에서 존경하는 것이고 사랑의 동기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높습니다. 그가 나보다 지혜롭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 더 높임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존경하고 순종해야 됩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한편,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시지요.”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 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와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어떻게 된 사연이냐?”,“네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참으로 효자로고.”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아닙니다, 임금님. 저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 내는 것은 좋으니라.”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버이날에만 선물 사들고 식사하고 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평소에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이 가장 잘 해드리는 효도입니다.
중국 고사에 이르기를“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했습니다. 가장 큰 효는 존경이요, 다음의 효는 욕을 돌리지 않는 것이요, 다음의 효는 봉양함이라고 합니다. 제때에 밥그릇이나 드렸다고 해서 효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존경함이 바로 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를 상대로“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전체의 60퍼센트가“속상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6.2퍼센트가“그저 극진히 대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존경”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효가 실종된 것입니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자는 있어도 효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지혜를 얻고, 순종함으로 영광을 얻고, 순종함으로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겸하여 장수까지 하리라 말씀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효가 여러분의 가정에 가풍이 되고, 윤리가 되어서 복된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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