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은 소녀가 전한 복음 (왕하 5:1~7, 14)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한 작은 소녀가 전한 복음 (왕하 5:1~7, 14)

본문

한 작은 소녀가 전한 복음 (왕하 5:1~7, 14)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세 사람이 대표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첫째는 아람의 장군 나아만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에서 잡혀온 작은 소녀가 등장을 합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아람의 장군인 나아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람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나라를 구원한 인물입니다. 오늘 성경에 그는 아주 크고 위대한 장군이며, 왕의 총애를 받는 큰 용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주위에 부자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근사해 보여도 그 사람도 고민이 있고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는 큰 용사이더라.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고치지 못하는 병이고, 살지 못하는 병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에이즈와 같은 병입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은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화려한 외투속에 자기의 더러운 문둥병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자기의 치부를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계집아이는 그가 문둥병자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빨래하다 보면 옷에 고름이 묻어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영적으로 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이 됩니다. 죄도 잘 전염이 됩니다. 문둥병은 결국 그 사람을 파면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라는 것은 그 사람을 결국 파멸과 심판으로 이끌어 갑니다.

문둥병 걸린 사람은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문둥병환자들은 왜 손이 다 짤립니까? 아픔을 느끼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에 넣고 손가락이 다 잘려도 아픔을 못 느낍니다. 우리가 죄에 오염 되면 양심의 가책을 잃어버립니다. 얼마 전에도 지승양이라는 어린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옆 동네 살던 40대 아저씨가 아이를 생매장해서 죽였습니다. 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깊게 죄에 오염된 문둥병 환자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무엇이 부족해서 교회에 나올까? 저런 사람은 학식이 없어 무엇이 부족해? 자식들도 잘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겠어?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말 못하는 고통과 한숨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든지 복음은 필요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해야 됩니다. 나아만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사람이 한 작은 소녀입니다. 그는 참 불행합니다. 아람사람들이 때를 지어 유대 국경을 넘어가서 유대인들을 잡아왔습니다. 작은 아이가 참하게 보이니 나아만이 자기 집에 하녀로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했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서 남의 나라에서 하루 종일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이고, 하녀이고, 유대 소녀이었고, 계집아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육체는 포로였지만 마음은 포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긍정적이었고 밝았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포로이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병실에 있고, 내가 위기가운데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모시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소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주인 나아만 장군을 볼 때 “저분이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종 선지자 앞에 가면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는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에게 가면 문제의 길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질병도 건강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해결 받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소녀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충만하고 풍성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포로로 끌려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 서도 그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소녀는 주인의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끌려가서 포로로 일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주인이 볼 때만 일하고 안보면 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일도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로이지만 너무 기특한 소녀이었습니다. 이 작은 소녀가 자기 주인의 문둥병 걸린 사실을 알고 나아만의 부인에게 “우리 장군님이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이 소녀가 믿을 수 없는 소녀라면 아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소녀이고,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이야기 하고, 남편이 왕에게 이야기해서 은과 금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도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뢰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거짓말 잘하는 사람을 누가 믿겠습니까? 요즘 전도 방법을 관계전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전도를 합니다. 실제로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면 그중에 86%가 아는 사람들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직장동료나 동리사람이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전도를 받았지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 전도를 받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나 문서나 방송을 통해서 전도 받은 것은 14%에 불가합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소녀는 아주 신뢰감을 주었던 여인입니다. 특별히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끌려갔을 때 열심히 일하고 보디발에게 신뢰감을 줍니다. 그러니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많은 종들 중에서 발탁을 해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총무로 삼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늘 신실하신 사람이요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소녀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고통당할 때 자기가 아픈 것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남이 슬퍼하면 나도 같이 슬퍼하고 누가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뻐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슬퍼하는데 기쁘고 노래가 나오면 곤란합니다. 남은 망해 가는데 나는 찬송이 나온다면 곤란합니다. 남이 슬퍼하면 내 마음도 슬픈 것입니다. 남이 기뻐하면 나도 내일처럼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심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비록 자기는 포로이지만 자기를 잡아온 이 장군의 고통에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리 장군님이 이스라엘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잘 사는 것 같아도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예수 믿지 않고 살면 마지막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만든 김영기 장로님이 한번은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많은 훈련생이 들어와서 훈련을 받는데 한밤중에 불이 났습니다. 닭장에 500마리의 닭이 있고, 옆에 토끼장에 앙고라토끼가 2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불씨가 날아와 불이 났습니다. 닭장과 토끼장이 바람이 불어 타오르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불덩이가 왔다 갔다 합니다. 토끼들이 불덩이가 되어서 뛰어다니고 닭들이 불덩이가 되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말할 것 없이 예배당으로 들어와서 그 모습을 보고 흐느껴 웁니다. 김영기 장로님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지 않고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의 종말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져서 뜨거운 폭탄이 되어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십시오. 저것이 우리가 당할 모습입니다.” 많은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천명을 이끄는 조폭 두목이 들어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 가서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장소에서 그것을 보았던 한 유명한 대학을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이 “내가 검사, 판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겠나?”라고 말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하며 그곳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김용기 장로님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의 종말을 볼 수 있을 때 아픔을 느낍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을 합니까? 지옥을 가는데,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가면 무엇을 합니까? 지옥을 가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보고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 작은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이 하나님의 종 앞에 있으면 병을 고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그 소녀는 그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을 때 남에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5일마다 시골에 장이 서면 약장사가 옵니다. 그들은 약을 너무 잘 팝니다. 그 약은 제대로 된 약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해서 염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합니다. 위장병, 암, 관절, 골수가 다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골 할머니들은 그 말을 믿고 20만원, 30만원 주고 약을 꼭 삽니다. 여러분 가짜 약을 팔면서도 진짜처럼 파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데 확신이 없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당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그렇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방황하는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 방황이 끝이 납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이 확신을 가지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만약에 전도했다가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아이고 창피해!” 그렇게 생각하고 전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감동이 있을 때 입을 열어서 복음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사업도 잘되고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작은 소녀는 마음만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부부간에 아무리 마음속으로 사랑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말을 여십시오.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저희 교회 한번 나와 보십시오.” 표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벙어리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소녀는 이렇게 실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살펴봅시다. 이 왕은 불신자와 같습니다. 그는 거룩한 땅에 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소녀는 이방 땅에 살았지만 너무나 믿음이 충만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여러분 이 왕을 보십시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아람왕 벤하닷의 친서를 가지고 수백명의 신화를 거느리고 많은 금, 은 보화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는 기절을 합니다. “아니 내가 신도 아닌데 이 사람의 문둥병을 고치라는 말이냐! 내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필시 우리에게 빌미를 주어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아닌가?” 그렇게 속단을 합니다.

왕은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근심을 합니다. 아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오너라.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가면 되느니라.”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해 하고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셔 두고도 그분께 도움을 청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는 속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방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 받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높임을 받으시고,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얕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환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문제가 있습니까?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능력이 부족하십니까?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호람은 불신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이때에 엘리사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내게 보내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세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까우십니까? 우리는 작은 소녀처럼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 자의 큰 영향력입니다.

오늘 이 소녀는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계집입니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녀이지만 오늘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함으로 장군의 마음을 움직였고,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 나아만 장군이 이제 엘리사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갔더니 엘리사가 밖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자기 하인들을 시켜서 “여보시오. 들어 올 것도 없고, 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났습니다. 사람이 오면 좀 나와 보던지, 안수를 해주던지, 환부를 살펴보던지 나오지도 않고 요단강에 씻으라는 말에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들이 “장군님! 여기까지 왔는데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되는데 이정도도 못합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해 봅시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몸을 담글 때 그 더러운 문둥병이 낳고 어린아이처럼 깨끗해 졌습니다. 나아만이 너무 좋아 덩실 덩실 춤을 춥니다. 엘리사를 찾아가서는 그가 가져간 모든 것을 선물로 주려고 했더니 엘리사는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퍼가지고 가서 이 흙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이방 장군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소문이 많은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한 작은 소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습니까? 작은 것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린도전서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약한 자들을 불러서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 땅에 120년 전에 복음이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크고 권세 있는 자들을 위해서 복음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멸시받는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학교를 통해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 작은 소녀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작은 소녀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입술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할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전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입을 열면 한 가정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 할 때 한 민족이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동네나 그 동네에 교회가 세워진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오세운 권사님 댁에 심방을 갔을 때 권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용인에 어떤 동네인데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조그마한 장소에서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짓고 전도사님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누구냐 하면 오병직 전도사님이십니다. 그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그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오세운 권사님 말씀에 이 집이 예수님 믿는지도 모르고 시집을 왔는데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고, 주일이면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한사람에 의해서 복음의 역사가 한 동네가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작은 소녀의 영향력이 너무나 큽니다. 그 후로 200년 후에 아람이 망하고 앗수르가 등장합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를 보냅니다. 요나가 그곳에서 회개하라고 외칠 때 이미 그곳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외침을 듣고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회개하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이 작은 소녀에 의해서 이미 아람 땅에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보면 광야에서 빌립집사가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가서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듣게 된 지역이 에디오피아입니다. 그 빌립집사의 전도가 한 민족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입술을 열 때 한 가정, 한 민족, 한 가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교회 교우들이 입술을 열 때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행사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평가를 받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복음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너를 통해 몇 영혼이나 하나님 앞에 나왔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비천한 영혼이지만 큰 영향력을 행사하실 것입니다.

두번째 본문에서 받은 교훈은 복음은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던 나아만이 이 작은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절망이 희망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열왕기하 7장에도 나옵니다. 사마리아성이 포위 되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성 밖에 있는 문둥병자 4명이 어차피 굶어 죽느니 적진에 가서 먹을 것 좀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성 밖으로 갔더니 적들이 다 도망가고 텅 비어 있습니다. 실컷 먹고 나니 성안이 생각이 납니다.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면 우리에게 벌이 임할 것이다. 어서가 이 사실을 고하자.” 달려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니 성안에 사람들이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살리는 소식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교회로 나오십시오. 그곳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그곳에 변화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네가 걸을 수 있다. 너도 고침 받을 수 있다. 너의 병이 나을 수 있다. 너의 인생이 회복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변화 될 수 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희망을 주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로마서 10장의 말씀입니다. 만약 작은 소녀가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이 나아만이 자기 처지만 비판하고 살아간다면 되는 일이 있었을까요? 그가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종을 소개했기 때문에 나아만이 치료받고 이 계집아이에게 얼마나 고마워했을까요? 아마 이 소녀를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믿지 못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그렇습니다. 누군가 전해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나아만이 무슨 믿음이 있었나요? 작은 소녀로부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을 받고 사마리아까지 가서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 전도의 사명이 우리 어깨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 나도 꼭 전도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확신이요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