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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장애우 사역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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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장애우 사역 (요 9:1~12)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4월 4일 노무현 대통령께서 장애인 차별 금지 법안에 서명하는 것을 뉴스로 봤습니다. 얼마 전에는 시각 장애인들 모임이 있었는데 제가 설교를 했고 우리나라 유일한 장애인 국회위원인 장향숙 의원이 축사를 맡아서 자리를 함께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일급 장애인이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는 그 자체가 ‘아주 놀라운 인식의 변화, 또 놀라운 발전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통계적으로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습니다. 세계보건기구 발표에 따르면 어느 나라나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인데 선진국은 20퍼센트 정도입니다. 배나 더 많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교인들이 이 분야에 봉사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음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랑부 목회, 점자봉사회, 녹음봉사회, 장애인봉사후원회, 착한사마리아인봉사회, 각 선교회 모두 다 장애인을 돌보는 어려운 일을 아주 기쁘게 일 년 내내, 벌써 10년 이상 잘 해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증 장애인 형제들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듭니다. 마음으로만 힘든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힘든 봉사입니다. 봉사회에서 매달 가지 않습니까? 장애인 어린이들 목욕시켜 주는 것을 한번 경험해 보세요. 저도 많이 따라가서 해 봤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약 400만의 장애인 형제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145만 정도가 중증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런 날을 정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이 장애 형제 사역을 열심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님의 설교 사역으로 설교를 그렇게 많이 하셨고, 또 하나는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치유 사역은 거의 가 다 장애인 형제를 회복시켜 주시는 사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뭐 큰 사역은 하지 못한다 하여도 마음만은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큰마음을 가지고 하자는데 이런 주일을 갖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말씀에는 장애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한명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40세이고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 사람과 만나게 되었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지나갔으면 좋았을 것을 제자들이 그 사람을 소재로 신학적인 어려운 질문을 했기 때문에 이 만남의 사건이 요한복음에 기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제자들이 주님에게 “랍비여!”라고 부른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랍비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선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회에서 최대의 존경자라는 뜻입니다. 존칭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다 랍비입니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직업 이상의 영적 권위가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취급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7절에 보면 “너희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랍비여!”라고 부른 사람은 상대방을 최고의 존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라보니여!”라고 부른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랍비’라든지 ‘라보니’라든지 혹은 현대 ‘라바이’라고 부르는 말은 사회에서 최고의 존경자를 향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랍비라고 불렀을 때 이것에 해당하는 책임이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권위자이시여, 최고의 지혜자이시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야지 그것을 못하면 랍비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의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습니다. 랍비라고 불렀을 때는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따르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랍비가 말한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낸다든지 그러지를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지금 앞에서 벌어진 상황과 제자들의 질문에 랍비적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 자체가 너무나도 해석하기 어려운 난제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이 랍비가 아니라면 “나도 모르겠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랍비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랍비입니다. 그래야 존경의 대상입니다. “이 문제의 대답을 하십시오.” 그래서 랍비라고 부른 것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제자들 스스로 이미 판결문을 가지고 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고난은 죗값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애매한 것은 그가 날 때부터라고 하는 시간적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장애인이 날 때부터가 아니고 중간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면 제자들은 질문을 안 했을 것입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네 죄야!”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죄 지을 시간도 없이 날 때부터 그렇게 되었으니까 뱃속에서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그것은 죄가 안 됩니다. 만약 부모의 죄로 규정을 한다면 “아니, 부모가 죄를 지었으면 부모가 죄를 받아야지 이 천진난만한, 아무 죄도 없는 이 어린아이가 죄를 받아야 합니까?”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어떤 때 성경적으로도 해석이 어렵고 의학적으로도 해석이 어려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 자체에도 문제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또 아비의 죄라고 했습니다. “아비의 죄를 자식들에게 3~4대까지 이루게 할 것이요”라는 말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묻는 배경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그 당시 사회에서 굉장한 정신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피타고라스학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학파는 불교와 비슷한 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 생애의 죄의 결과로 고난을 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가 그렇게 되는 경우가 의학적으로 있습니다. 산모가 아기를 가졌을 때 담배를 많이 피웠다든지 마약을 했다든지 아니면 무슨 무서운 성병에 걸렸다든지 해서 그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게 나타나는 것이 의학적이요 과학적입니다. 그럴 때는 당연히 죄가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랍비의 권위로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선명하고도 확실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방향이 바로 예수님의 답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문제를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의 시각은 심판적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모든 인간의 고난은 죗값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비록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이 이 사람과 똑같이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고난을 죗값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사실 인간의 고난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죗값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범죄를 저질러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오해가 생겼다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썼다든지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공연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애매한 고난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애매한 고난을 참으면 복이 된다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거룩한 고난이 있습니다. 순교자, 애국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고난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얼마나 고난이 많은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사형선고를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날마다 기뻐하면서 평생 계속합니다. 왜? 거룩한 고난이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적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로 떨어뜨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좀 더 지혜롭게 했어야 합니다. 장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질문을 했어야 합니다. 멀쩡한 사람을 세워놓고 죄인으로 규정해 버리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시각 장애인이 거기서 항의했다면 예수님마저 아주 난처할 뻔 했습니다. 제자들이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예수님에게 조용히 “이 사람이 이렇게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 하나님께는 어떤 뜻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봤어야 올바른 질문입니다.

유대인 문화나 한국 문화 가운데 비슷한 점은 좀 무례합니다. 이 제자들도 보세요.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가운데다 세워놓고 이미 죄인으로 규정하고 말합니다. 없는 죄를 억지로 만들어 멀쩡한 사람을 공갈 협박적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네 죄냐? 너희 부모 죄냐? 랍비여! 이 사람 앞에서 대답하소서.” 이 제자들의 몰살적 깡패적 언어 발상, 이런 발언은 외국 같으면 공개석상에서의 명예 훼손적 모멸감은 형사 입건이 될 정도입니다. 이 사람이 가만있어서 문제가 안 된 것입니다. 장애인의 장애 요인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선천적 요인입니다. 유전 인자의 이상으로 된 경우, 또는 산모가 임신 중에 어떤 심한 충격에 의한 경우,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후천적 요인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건강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각종 사고로 인해 우리가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나 전체 장애인 중에서 선천적 요인은 10퍼센트입니다. 90퍼센트가 후천적 요인에 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후천적 요인에 우리가 다 똑같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신체적으로 장애가 생기면 그날로 나는 장애인이지 무슨 다른 소립니까? 그런데서 평생 보장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큰 소리를 칠 수 없습니다. 이 장애인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면 정신적 지체장애인이 있고 신체적 지체장애인이 있습니다. 확실한 게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많아지면 장애 현상이 자연적으로 나타납니다.

저를 비롯해서 오늘 여기 안경 쓰시고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모두 시각장애인입니다. 저도 지금 안경 벗으면 설교도 못합니다. 이게 벌써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계에 의해서, 장비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내 스스로는 벌써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혹시 보청기 끼시고 내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 계십니까? 청각장애인이 되신 겁니다.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능력 상실입니다. 나이 많아져 보세요. 그렇게 죽자 살자 사랑하던 부부도 애정 표현이 다 장애인으로 변합니다. 누가 자신 있습니까? 금방 말하고 돌아서서 금방 잊어버립니다. 치매 환자 되신 겁니다. 아니, 종로 5가에서 종로 5가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 사람! 요새 심방 다니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모두 평준화 된다고! 큰 소리 칠 것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장애인이 됩니다. 안될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이가 고령이 되면 집에 누워있으나 산에 누워있으나 마찬가지랍니다.

이제 이 자리는 매우 썰렁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 시각장애인은 말은 안 해도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웬 사람들이 그냥 지나갈 것이지 나를 둘러서서 바라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아니한 나를 대상으로 토론하고 죄인으로 최급을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까지 끌어들여서 “부모가 죄인이요, 이 사람이 죄인이요?” 이러쿵 저렁쿵 하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은 상식 밖의 큰 실례를 범한 것입니다. 우선 그들의 신학이나 관념은 교만한 것입니다. 바리새적입니다. 자기들이 뭔데 아무 죄도 없고 멀쩡한 사람을 놓고 “네 죄냐, 네 부모의 죄냐?” 따지고 마치 검찰관이 죄수에게 묻는 듯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신학의 기초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렇게 많은 충돌을 한 겁니다.

만약 이 시각장애인이 성질이 나서 “너희들 도대체 누구냐? 그러면 너희들은 나보다 깨끗하게 살았냐? 이 나쁜 놈들아!”하고 막 폭언을 했다면 예수님이 뭐가 되겠습니까? 실제로 장애인 형제들은 비장애인들보다 죄짓는 확률이 적습니다. 대개가 다 겸손합니다. 오늘 말씀의 이 사람도 그런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잘 참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시각에 대해 주님은 어떤 시각으로 이 장애인을 보셨는가? 구원적 차원으로 보셨고 사명적 차원으로 보신 것입니다. “부모의 죄가 아니다. 자신의 죄는 더욱 아니다.” “아니, 그러면 뭡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이 사람의 고난을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적으로 봤습니다. 아무나 보고 죄인 취급을 합니다. 자기 맘대로 구원하고 자기 맘대로 저주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리새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인간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로, 어느 때인가 이것이 이유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도움이 된다.” 이것이 구원적 시각이요 사명적 차원의 시각입니다.

저는 LA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소천 과정에서 저는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매우 유명하신 분으로 우리나라 TV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제일 먼저 만드신 분이 그분입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를 만드셨습니다. LA에서 활동했는데 조금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말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모두 다 선하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은혜를 받고 “아! 마지막에 나도 저 분과 같이 떠나야지.” 이런 말을 우리들이 나누면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어떤 분이 암으로 고난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 같은 목사와 집사님, 권사님들이 함께 심방을 갔다고 합시다.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 그 주변에 쭉 둘러서서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이시여! 이 사람이 이렇게 일찍 죽는 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랬다고 합시다. 말이 되는 겁니까?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 환자뿐만이 아닙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사업이 망한 것은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좀 다니다가 잘난 체를 하기 시작하면 심판자처럼 되어 버립니다. 자기 맘대로 저주 선언하고 자기 맘대로 구원하고 자기 망상증에 걸렸는지 바리새적으로 변한단 말입니다. 정말 제자들에게 이 문제가 궁금증이 되었다면 조용히 예수님에게 “저런 경우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지 가르쳐주십시오.” 이랬어야지, 장본인을 세워두고 “죄 지어서 이렇게 되었는데 부모의 죄입니까, 이 사람 본인의 죄입니까?” 이것이 바리새적인 발상이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상처받은 장애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답변과 함께 그에게 큰 선물 하나를 주십니다. 6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장애인은 성질을 부리거나 자존심을 상한 불만 표시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여러 가지 말을 그냥 수용하고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건강상의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는 겁니다. “야, 이 병신아!” 화가 안 납니다. 내가 거기 해당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야, 이 병신아!” 이렇게 된 겁니다. 제자들은 상식 밖의 몰상식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상한 치료 방법도 조금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아니, 우리 신체의 노출된 부분 가운데 제일 민감한 눈이 티끌 하나만 들어가도 눈물을 쏟아냅니다. 거기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발라 주었다는 것은 이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아마 성질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막 거기서 폭언을 했을 것입니다.
“이 어디서 굴러온 잡것들이!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우리 부모까지 죄인을 만들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너희들이나 잘 먹고 잘 살아라!” 얼마든지 막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조용히 그 말을 다 듣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합니다. 실로암 못을 찾아갑니다. 그가 찾아간 실로암까지의 거리는 3마일 정도로 추정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식 초월의 순종은 하나님의 복의 임재성으로 나타난다.’ 그가 눈을 떠서 현장에 다시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래, 나를 죗값이라고 했느냐? 그러면 죗값을 받아야 되는데 왜 예수님은 나의 눈을 이렇게 뜨게 해주셨느냐?” 여기 본문에 아름다운 진리! “인간 고난은 하나님 사역의 쓰임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눈을 뜨고 첫 번째 한 일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0절에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11절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했더니 보게 되었노라.” 사실적인 예수의 기적 증언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만약 그가 80세까지 살았다면 그는 40년 동안 보는 사람마다 자기 체험을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찬양했을 것입니다. “상식 초월적 순종은 하나님의 복의 임재성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우리가 본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됩니다. 나와 형제들의 삶의 고난 속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것인가? 이것을 사명적 차원으로, 혹은 구원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의 능력!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떤 역사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오늘 장애인주일을 보내고, 우리 주변의 어떤 고난에 있는 사람도 그를 통한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포가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축복이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저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바리새적인 시각을 가지고 함부로 사람을 저주하고 심판적 차원에서 보았던 제자들에 비해서 예수님은 구원적 시각에서 사명적 차원에서 보고 그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고난과 형제의 고난을 바라보는 영적 능력을 주시고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가게 하옵소서.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우리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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