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떼의 비젼 (벧전 5:1-4, 요 10:7-14)
본문
성경 말씀은 하나님과 저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하나님과 저희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목축업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이야기를 손쉽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가 봉독한 말씀의 테마는 양은 목자의 소리를 듣고 목자는 양의 소리를 듣고 서로 알고 지내면서 양을 위해서 목자는 목숨을 바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자는 목숨을 바칩니다. 이 말씀이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저희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백성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대신하여 지불 하십니다.
이스라엘 당시에는 이 약속이 약속으로만 남았지 실제로 실천되지는 못했습니다. 언제 이 약속이 실천 되었느냐 하면 예수께서 오신 다음에 이 약속이 실천이 되었습니다. 세상 죄를 대신 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목자의 죽음과 같습니다. 모든 양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운명을 목자가 대신해서 자기 어깨에 짊어 졌습니다.
목자 된 하나님, 목자 된 예수, 양떼가 된 우리. 어떤 상황에서도 이미 우리의 목숨을 대신 짊어 질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저희 믿음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목자를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목자를 보낼 때는 양들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했더니 그럴 생각은 안하고 양들을 잘 길러가지고 살찐 양만 잡아서 먹을 궁리만 하는 목자. 잘 길러서 양털을 깎아서 옷을 해 입고 뻐기는 목자. 그런데 양중에 약한 양은 키우지도 않고 병들었는데 고쳐주지도 않고 다리가 부러졌는데 싸매주지도 않고 양들이 천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모으려고도 하지 않고 양들이 길을 잃었는데 잃은 양을 찾지도 않습니다.
대신 강압과 폭력으로 양떼를 다스리고 흩어진 양들을 야수들의 먹이가 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목자 되신 여러분. 당신들이 목자입니까? 이 말씀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양도 반발을 합니다. 다른 말로 양들의 반발. 양들의 저항. 어떻게 강압과 폭력에 견딥니까?
어떻게 다리가 부러졌다고 그러는데 싸매주지 않습니까? 잃은 양을 찾으러 오지도 않는 목자가 무슨 말입니까? 오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목자의 문제라고 예레미야서가 말했고 또 베드로 전서에도 사랑하는 여러분, 목자는 양을 먹이되 이해관계에 따라서 양을 먹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먹이십시오.
사랑하는 부모님들, 자식이 양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자식들 젊은 세대가 우리 양떼라고 한번 전제해보십시오.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저희 사회에 아주 작지만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군들이 작전을 하면서 탱크에 저희 여학생 두 명이 깔려 죽은 일이 있습니다.
미선이와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촛불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만해도 우리는 큰 나라 미국이 장갑차를 움직이면서 아이를 깔려 죽게 했구나. 비록 그것이 군사 작전이기는 하나 아쉽게 생각했고 촛불시위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와중에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통해서 그걸 계기로 반미 운동까지 펼쳐진 일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것 때문에 많이 갈라지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우리는 미선이 효순이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백성 전체가 다 당했다는 집단주의적 의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집단주의가 상당히 강한 나라 같습니다.
제가 미국을 다녀봐서 당국자들하고 얘기하는데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둘 죽은 건 우리가 고의로 죽인 게 아닌데 그렇게 반미로 까지 갈수 있느냐고 하는 얘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상당히 집단적으로 우리 마음을 모는 일이 아주 흔하게 됐습니다.
상황이 극 반전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낳은 사람인 조승희가 32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집단 사살을 했습니다. 저는 끔찍했습니다. 우리가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떠올리면 곧바로 미국에서 촛불 시위가 있고 반한 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까? 그런데 미국에서는 제가 언론을 듣자하니 한국인 전체로 확대시키지 말라. 미국에 이민 간 사람의 전체 문제로 확대 시키지 말라. 승희 한사람의 범죄라고 하자. 이런 얘기들이 사회 일각에서 많이 나오는걸 보고 소시민적 생각인지 모르지만 집단주의적 사회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가 훨씬 성숙한 거 아닌가. 저 자신이 위로 받고 싶어서 자위하는 얘기입니다.
사실 조승희는 어떤 성격으로 자라서 어떻게 이민을 가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다 우리 보도를 봐서 아는 얘기입니다. 조승희가 한 마리의 양입니다. 이민 가기 전에 이 땅의 양이었고 이민 간 다음에는 미국의 양이고. 한 마리 작은 양의 반발, 삐뚤어진 분노, 삐뚤어진 저항, 아주 뒤틀린 반항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우리 집단주의는 어떻게 반항합니까? 미국의 개인주의라 하는 것은 어떻게 반항합니까?
오늘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승희가 양떼인건 분명한데 그 승희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세탁소에서 겨우 직장 얻어서 일하는 대화 못하는 어머니뿐입니까? 아버지뿐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목자입니까? 이것을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로 규정하기 전에 이 세상 모든 곳에서는 목자가 자기 책임을 반기하면 양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양들도 반발하고 저항할 수 있는데 수많은 양이 죽고 심지어 목자까지도 죽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제발 미국 땅이 이것 때문에 korean들을 집단 살상자로 매도하지 않기를 또 그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보고 한편으로 감사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승희는 아마 어머니, 아버지가 어렵게 살면서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어려운길을 택해서 미국으로 갔을 겁니다.
틀림없이 승희와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을 겁니다. 같은 가족이지만 목자인 부모와 양된 승희 사이에는 서로 주고받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혹시 이 땅에 우리 사회에 와서 우리가 2주에 한 번씩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클리닉을 열고 있습니다만 혹시 이 땅에 와서 한 외국인 노동자가 승희와 같은 분노와 비극 속에서 작은 사건을 저질렀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 할 것 같습니까?
그 아이가 속한, 그 사람이 속한 전체를 매도할 것 같습니까? 한 개인의 일로 치부할 것 같습니까? 이 땅에 살아온 목자들은 어떻게 목양을 했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까?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제발 죽은 희생당한 그리고 부상당한 마음까지 다 썩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일이 없도록 국적을 불문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우린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 외에는 이 땅의 비극을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이런 말씀을 가지고 본문으로 갑니다. 진실로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압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가장 큰 비극은 목자와 양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말을 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대화의 벽. 가슴과 가슴을 나눌 수 없는 벽. 전문용어로 communication의 단절. 이것이 오늘 목자와 양 사이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communication의 channel이 열리지 않는데 무얼 가지고 구사할 수 있습니까?
반항밖에는 없습니다. 승희의 사건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 자신 주변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 가정끼리는 우리 사회끼리는 communication이 잘 됩니까? 서로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습니까? 알면 고개를 끄덕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아는 겁니까? 우리가 바라는 소리를 하나님은 아십니까?
우리 속담대로 열길 물속은 알 수 있는데 한 길 밖에 안 되는 사람 속은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 속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이 저희와 대화할 수 있습니까? 저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아픔을 하나님이 아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받아야 됩니다.
사람들 말이 그게 받고 싶으면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고 합니다. 아주 이상적 배합입니다. 찬 이성과 따뜻한 가슴으로. 그 말속에는 찬 이성은 따듯한 가슴일 때만 가능합니다. 가슴이 진실로 따뜻한 사람은 차가운 이성을 가져야 합니다. 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입니다.
냉철한 이성을 얘기하신 분들이 사랑의 가슴이 없으면 그건 이성이 아닙니다. 사랑하자고 가슴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을 못하면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뜻한 사랑의 가슴으로 받으면 살아가는 지혜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된, 차디찬, 객관적, 진실 된 머리로 받으면 우리는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으로 이웃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사이에 communication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communication이 없고 저와 저 자신속의 저 자신의 communication이 없고 부모와 자식사이에 communication이 없는데 어떻게 양떼를 목자가 돌볼 수 있으며 양떼는 목자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요지는 나는 양떼의 음성을 안다. 양떼의 생각을 안다. 양떼도 내 가슴을 알고 내 심정을 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서로 압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래 신앙을 가지셨다고 자부하시는 분들, 이제 방금 신앙을 찾았노라고 고백하시는 분들 한 가지만 오늘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저를 안다고 믿습니까? 그렇게 확신하고 호소하고 기도하십니까? 그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를 안다는데 진실로 호소해 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communication이 있다는 말은 진실로 기도할 수 있고 진실로 호소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기 때 끌어안을 수 있고 기쁠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하여 기꺼이 내 목숨을 준다. 더 이상 묻지도 말고 나는 그대를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돼있고 희생한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서로 주고받는 진실로 소통이 되는 그런 사회를 이뤄봅시다. 그런 사람이 되어봅시다. 하나님은 진실 된 목자.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대를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 그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대 양털 깎기 위해서 그대를 키워줄 생각이 없다. 아프고 힘들 때 못 본 척 할 수도 없다.
병들 때 내가 구경만 할 수도 없다. 양떼는 항상 자기 앞날을 생각합니다. 그 앞날은 목자의 앞날과 동일합니다. 양떼는 사는 것뿐인데 목자의 주위를 따라 살아갑니다. 목자의 vision이 없으면 양떼의 비전은 당연히 없습니다.
하나님의 vision은 죽은 자도 살리고 아픈 자는 낫게 하고 힘든 자는 위로해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양떼를 향한 뜻. 그 뜻이 하나님의 vision이면 그 vision은 오늘 우리한테 살아있는 vision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승희의 잠재적 가능성들이 무수하게 있습니다.
고난 받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국적을 초월하여 민족을 초월하여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의 목자이시기를 축원하고 받아드리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 그대들을 지켜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