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의인 열명만 있었으면/창1…
본문
설교: 지난주간 저는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참담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에 살던 한 한국계 젊은이가 권총으로 버지니아 공대에서 공부하던 학생과 교수 32명을 죽이고 29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살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 사람들이 나름대로 여원인과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사람을 끌어않고 치료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범인이 그렇게 외톨이로 살아가도록 보살펴주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관계 단절입니다. 어린 시절, 성장 할 때부터 가정에 형, 누나, 동생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족 식구들도 너무 바쁘다 보니 가족 간의 대화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 학교와 인터넷과 핸드폰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동급생들과의 관계는 경쟁과 차별로 인해 수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인간관계는 점점 차단되고 나 홀로 살게 됩니다. 인간은 홀로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홀로 살지 않고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어 돕는 배필이 되게 가정을 만드셨고 그 가정이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게 되자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 인간 속에 탐심을 집어넣어 이 관계를 파괴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시기 질투 미움 반목하고 결국 정상적인 삶을 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사랑과 용서, 섬김과 나눔이 문제 해결열쇠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릴 적부터 가정 공동체에서 사랑을 나누고 교회공동체 식구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형성하는 역할을 가정이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있습니다. 왜요? 핵가족화 되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바쁘게 살기 때문입니다. 학업도 경쟁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어울려 교제하고 함께 어울려 공동체 생활 하는 것을 낭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제는 천국의 복을 미리 맛보는 훈련이고 사랑과 용서, 섬김과 나눔을 통한 인격 수련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녀들을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한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의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왕따를 당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요셉은 배다른 형 10명이 주는 ‘왕따’를 어릴 때부터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7살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 형들은 참으로 무서운 자들입니다. 그 엄청난 짓을 하고도 22년 동안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어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모세는 가족에게서 갈대상자에 담겨 버림을 당합니다. 물론 일부러 버린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가족이 살기위해 아이를 갈대바구니 상자에 넣어 무시무시한 강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애굽 공주에게 발견되어 40년간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라지만 결국 자신을 길러준 바로 정권에 의해 버림을 받아 광야로 가서 40년 동안 처절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도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살해 위협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대왕 중 최고의 왕이 되게 하십니다. 다니엘도 예레미야도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왕따를 겪고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위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위로로 일어서서 인류역사에 위대한 인물들이 됩니다. 할렐루야!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면 소돔과 고모라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는 것은 엄청나게 부유하고 발달된 도시였지만 하나님이 도저히 용납키 어려운 도시였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과 헤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갈 곳을 선택할 우선권을 줍니다. 그때 롯은 주저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가 위치한 땅을 선택합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이유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돔과 고모라 땅은 사람이 살기에는 최고의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신앙적인 안목으로 그 땅을 보지 않고 육신의 안목,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진로를 정했습니다. 여기에서 롯 개인과 그 가정의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어떤 안목,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인이 갖고 있는 안목과 비신앙인이 갖고 있는 안목, 분명 엄청나게 다릅니다. 롯이 홀딱 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잘 사는 땅, 비옥하고 풍부한 도시인 소돔 고모라, 그 성은 왜 하나님의 진노를 사 멸망하게 된 것일까요?
1. 그 땅은 죄악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창세기 18:20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대하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울부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까지 들려와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짖음은 무엇이고 그 심히 중대한 죄악은 무엇일까요? 그 죄악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창세기 19장에서 설명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살펴보기 위해 두 천사를 보냅니다. 이 천사들이 처음 만난 소돔 주민은 바로 롯이었습니다. 롯은 비록 육신의 안목에 따라 소돔 고모라에 거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신앙이 남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두 천사를 집으로 모셔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롯의 집에 손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성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우리 성에 손님이 오셨다고 환영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엉뚱한 짓을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19장 5절에 이 사람들의 이상한 것을 요구합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나그네들과 동성애를 할 테니 끌어내라는 뜻입니다. 잘 보세요. 4절에는 그 성 사람이 무론노소(老少)하고 다 몰려왔다고까지 말합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늙은이든 젊은이든 할 것 없이 다 몰려와 동성애를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도 소돔 사람들을 뜻하는 sodomy라는 낱말이 동성애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한 도시였지만 이렇게 엄청난 성적타락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상관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2. 그곳에 의인의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소돔성 멸망의 결정적 이유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납니다. 바로 그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단 10명의 의인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반드시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망할만한 이유를 찾아보면 그런 원인이 없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나라, 그 사회가 안 망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안 망할 만큼 의롭고 훌륭해서도 아니다. 그 나라들도 다 문제가 있고 충분히 망할만한 이유들이 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는 그 나라에, 그 사회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에 의인 열 명만 찾으실 수 있다면 그 나라, 그 사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단 열 명이라도 찾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을 보내 소돔과 고모라를 살펴보게 하신 것입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라는 학자가 쓴 ‘로마제국 멸망사’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기번은 그 책에서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5가지로 지적했습니다. 1. 이혼율 급증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2. 과중한 세금과 세금의 남용, 3. 비정상적인 쾌락과 유흥의 추구, 4. 무분별한 군비 확장과 인구의 감소, 5.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로마제국도 소돔 고모라도 멸망의 공통적인 원인은 타락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너무 부정적인 시각만으로 본다고 할지 모르나 우리나라도, 이 사회도 로마와 소돔 고모라의 복사판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부인 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 다른 것이 있나요? 어느 하나 우리나라가 예외인 사항이 있나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만 둘러보면 이 사회를 지배하는 쾌락과 유흥의 물결, 성적인 타락과 가정의 붕괴가 분명히 보입니다.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러브호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도박문화, 심각한 이혼문화, 소돔 고모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도덕적 타락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썩었는지, 완전히 뿌리 채 썩어버린 이 나라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성도중에 러브호텔을 경영하는 분이 계시는데 밤에 숙박하러 오는 손님보다 낮에 잠깐 왔다가는 손님이 더 많답니다. 그 업에서 손을 떼라고 해야 하는데 교회를 떠날까 말도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심각합니다. 우리 성도가 세상을 잘 몰라서 그렇지 위험수위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만약 죄악과 타락의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우리나라도 벌써 몇 번은 망해야 마땅합니다. 그 대제국 로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망하고 소돔과 고모라도 유황불에 망했다면 우리나라는 왜 아직 안 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위기를 지적하고 이러다가 우리 큰일 난다고 경고를 하는데 비록 비틀비틀 위태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멀쩡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늘 성경이 분명히 대답해 줍니다.
왜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땅에 아직 의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망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인 10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불로 태워졌지만 그래도 이 땅에는 아직 의인 10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멸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들, 세계 선교를 위해 목숨 내걸고 살아가는 선교사들, 그리고 묵묵히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복지단체의 섬김 이들, 더 나아가 눈물로 골방에서, 기도원에서 산속 계곡에서 부르짖는 중보 기도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멈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역사를 보세요. 일제 36년의 고난과 압제, 6.25라는 엄청난 비극, IMF경제 위기, 그리고 50년 이상의 남북이 대치된 군사적 긴장 상태.... 이런 고난을 겪고도 오늘 이렇게 발전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각국이 한국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상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 땅에 아직은 의인이 열 명 이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인 속에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과연 우리나라를 아직 망하지 않게 지탱해준 이 10명의 의인은 누구일까요? 앞에서 열거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 그들만이 의인일까요? 우리도 그 ‘의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10명 속에 포함 될 의인이 우리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망하지 않게 하려고 애타게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는 이 아브라함 같은 사람,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의인입니까? 창 15: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할 때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됩니다.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신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깜짝 놀랍니다. 게다가 아무리 사악한 소돔과 고모라라 할지라도 적어도 거기 의인이 몇 사람은 남아있지 않겠는가? “하나님, 그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십니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랴?” “만약 그 성에서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찌하렵니까?” “의인 50명만 찾으면 내가 용서하리라.”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 숫자를 줄이기 시작합니다. 50에서 45, 45에서 40, 40에서 30, 30에서 20, 20에서 10명으로 줄입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기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장면은 결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숫자 놀음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목숨을 걸고 조카를 살리려고 하는 긴박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세를 높이 보셨습니다.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그 열정, 그 간절함,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조카 롯을 포함해 그래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 명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9장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누구를 생각하셨다고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예뻐서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롯은 육신의 안목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는 구원 받을만한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구해주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구했기에 하나님은 롯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10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당했지만, 또 롯도 결코 그 의인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를 생각하사 롯과 딸들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으로서 간구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1. 목숨 건 중보 기도자가 필요합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는 다수가 아니라 창의적인 소수에 의해 만들어진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가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리고 로마에서도, 또한 오늘 우리나라 우리 사회에서도 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창의적인 소수, 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 바알에게 아직 무릎 꿇지 아니한 소수를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고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목숨을 건 중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의 민족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위해 이렇게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이 나라가 이렇게 타락하고 범죄로 가득하고 부패되어 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나 한 사람이라도, 우리 교회만이라도 간절히 기도할 중보 기도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은 혼자 하나님 앞에 눈물의 중보기도를 드리는데 오늘 이 땅에는 누가 그 역할을 해야 할까요?
2. 욕심을 버린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중보기도 할 수 있을까요? 자기만을 챙기는 사람, 자기만을 생각하는 탐심이 가득한 사람은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누굴 위해 그렇게 처절한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소돔성, 고모라성 그 백성들은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처절하게 기도합니다. 롯 때문이라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란에서부터 데려온 조카, 아비가 없기에 애지중지 길렀던 조카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의 종들과 삼촌의 종들이 땅이 비좁아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양보하여 먼저 선택권을 부여합니다. 그때 조카 롯은 괘씸하게도 한 번도 사양치 않고 동편을 택하여 갑니다. 참으로 괘씸한 조카입니다. 만약 제가 그 아브라함이었다면 그렇게 도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쌤통이다 하고 모르는 척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카를 위해 아브라함은 정말 처절한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탐심에서 벗어나 사랑과 용서, 영혼구원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남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에 빠진 신자, 자기일과 자기와 관련된 사람의 일에는 열심이나 나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의 일에는 나물라라 하는 성도,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의 아픔과 슬픔을 내 것처럼 여기며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욕심을 벗은 의인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능력은 탐심이 벗어진 상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기도를 보세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요한복음17장 11~12절을 보세요.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이게 능력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약 한국이 망한다면 말씀을 신뢰하는 성도가 부족하여 망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기독교가 국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까? 그러지는 마십시요.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온 국민이 의무적으로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결정한 그 순간부터 기독교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 능력을 잃지 않고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하는 종교입니다.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성도가 몇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나라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 같은 중보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사람, 교회와 선교사를 위해 기도할 사람, 그리고 성도와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대한민국에 그런 의인 10명만 있다면 이 나라는 하나님이 지키실 것입니다. 그 의인은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