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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쓰임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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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쓰임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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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1-10



요즈음 책값이 많이 올랐는데 가장 비싼 책은 얼마나 될까요? 기네스 북에 오른 가장 비싼 책은 미국 조류학자 존 제임스 오더본이 1827∼1838년에 쓴 ‘미국의 새들’이라는 4권짜리 책이 8백 80만 달러에(한화 73억 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문을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데 아주 값비싸게 팔리는 것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군인용 잡낭이 런던 경매장에서 천 오백 만원에 팔렸습니다. 엘비스 프레슬 리가 사용하였다는 이유하나 때문입니다. 드레스와 가운이 약 29억원에 팔렸습니다. [20세기말 마지막 자유부인]으로 불리는 다이애나가 입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속옷 하나에 5만 7천 달라 우리 나라돈으로 5천만원에 팔렸습니다. 36살에 자살한 마릴린 먼로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을 촬영 때 입었던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똑같은 물건이지만 누구에게 쓰이냐에 따라 값이 다릅니다. 제가 입은 이 옷 제가 죽으면 얼마나 값을 쳐 주겠습니까? 아마 죽은 사람이 입은 옷이라고 아들도 입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똑같은 요리사도 청와대 요리사하고 대중 음식점 요리사가 다르게 취급받습니다. 똑같은 기사일지라도 대통령의 기사와 사장 기사는 다른 것입니다. 요는 누구에게 쓰임받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쓰임받느냐에 따라 아무런 가치가 없게 보이는 것도 대단한 값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세상의 나귀중 가장 가치있게 쓰임받은 나귀 한 마리가 나옵니다. 아마 이 나귀의 뼈가 지금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면 73억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1천억 원에 내놓아도 팔릴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한 관광수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쓰임받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1. 우리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당나귀는 벧바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입니다. 특별히 잘 생긴 것도 다른 것들보다 힘이 있는 것도 큰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그곳에 있으면 짐이나 나르다가 죽을 나귀일 것입니다. 그 나귀가 성경에 기록될 만큼 유명해지고 이 천년이 지난 오늘 이곳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주님의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골 한 구석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갈 나귀이지만 주님이 사용하시면 유명해 질 수 있고 값지게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나귀새끼를 타시고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나귀일지라도 주님이 사용하시면 고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한 시대 쓰임받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쓰여지는 시간, 주님을 위해 쓰여지는 물질, 주님을 위해 쓰여지는 건강 낭비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2. 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 것을 기뻐합니까?
1) 우리의 소유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주인이 쓰시기 때문입니다.(3, 9). 이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다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빈손들고 왔다 빈손들고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청지기입니다.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데 얼마나 기쁩니까?
2) 모든 것을 알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2)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보냅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그대로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그대로 맞았습니다. 우리의 재능과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특성과 우리의 수준과 우리의 기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3)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3)
나귀를 가져오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이 말씀은 오랜 전에 예언된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메시야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9-10)

우리 주님의 메시야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사정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딤후2:19에서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막연한 종교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사정과 능력, 지능, 적성, 한계를 아시고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3.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순종함으로 기쁘게 쓰임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보내어 우리 주님께서는 나귀를 쓰시겠다고 합니다.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5절에 어떤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왜 그것을 쓰겠냐는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말하자 모두가 기쁨으로 내어 줍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 한가지 원리는 순종입니다.
1)제자들을 보십시오.(2)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합니다. 남의 나귀를 무조건 풀어 온다는 것 그것 도둑 강도입니다. 그것도 대낮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저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너무나 이치에 맡지 않는 말입니다. 비도덕적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순종합니다.
2)나귀 주인(눅19:13)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5-6)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이의하나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3)나귀 새끼를 보십시오.
주인이 아니더라도 그대로 반항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도록 쓰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여 줄려하지만 아이가 입을 다물고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를 주시려 하지만 그가 받지 않겠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사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하여 사용하실 때 사무엘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말씀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을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도록 기쁨으로 내어 놓으십시오. 우리의 물질과 건강, 시간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이 그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한갖 갈릴리 어부로 이름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용하니 그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주님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니 그는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왕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한갓 목동으로 이름없이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것일지라도 주님이 사용하시면 가장 값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쓰임받느냐에 따라 인생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강도에게 쓰임받으며 아무리 열심을 한다할 지라도 강도일 따름입니다.
폐품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황소의 머리"도 자전거의 좌석과 손잡이로 만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일지라도 피카소의 손에서는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일지라도 미켈란젤로에게 가면 걸작「모세」와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가치있고 기쁜 일입니까?

자신을 보잘 것 없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주님의 사용을 받느냐 못받느냐의 문제이지 재능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내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오 헨리』는 말하기를 "길가에 조그마한 돌 하나라도 목적이 없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다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무엇에 우리를 쓰시길 원하시는가 주님의 음성에 예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생활하면서도 불가근 불가원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신다고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열성 성도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예배 생활도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아주 교회에 안나가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새벽 예배까지 다니며 열성성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 왜 우리가 주님을 위해 기쁘게 쓰임받지를 못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방해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1)우리의 이성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나 주인이나 도저히 이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 알 때 그것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행동은 믿음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성을 신뢰하는 것보다, 경험을 신뢰하는 것보다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신뢰의 대상을 옮기십시오. 제자들은 즉시 응답했습니다.
이성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얽메인 끈을 풀어야 합니다. 죄의 끈을 풀고, 세상의 끈을 풀고, 이기주의의 끈을 풀고, 체면의 끈, 나쁜 습관의 끈을 풀고, 고집의 끈, 아집의 끈, 교만의 끈을 풀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끌고 가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2)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까? 라는 염려 때문입니다. 이기심,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안하는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되는 것같이 보일 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왜 나만 이런 일을 하여야 하느냐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쓰임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주님 스스로 일을 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주님이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을 준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십니다. 아리마데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덤을 준비하십니다. 쓰임받는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우리가 손해되는 것같지만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물질, 우리의 삶을 주님께 기쁘게 쓰임받으면 그곳에서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귀를 쓰심으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 놓습니다. 나무가지를 흔들면 개선 장군을 환호하듯 환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릅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습니까? 하잖은 나귀 새끼도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하잖은 짐승이지만 우리 주님의 영광스런 십자가 사역에 쓰임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전 영국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한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며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한 외국 사람이 지나다보니 그 노인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해 그 노인에게 바이올린을 좀 만져보자고 했답니다. 그렇잖아도 손이 시렸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낡은 바이올린을 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순간 행인들의 발길은 멈췄고 한 푼 두 푼 노인의 모자에는 던진 돈이 수북하게 쌓였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고 군중 속에서 “파가니니다! 파가니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이태리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였답니다. 똑같은 악기이지만 누구의 손에 쓰임받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집니다. 자신이 스스로 악기를 연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연주하면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화음으로 연주될 것입니다.
한 시대 주님으로부터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시간 여러분과 저를 향하여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쓰임받는 것을 기뻐합니다./마가복음11:1-10/ 김필곤 목사/20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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