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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지도자와 실패한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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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8:6-16


대통령 선거가 이번주에 있습니다. 누가 될 것같습니까? 저는 알고 있습니다. 표많이 받은 사람이 이깁니다. 사람은 권력에 대하여 상당한 욕망이 있습니다. 니체는 "이미 생명있는 모든 곳에 권력의지가 있음을 발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을 좋아한 드골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수상이나 대통령이 죽어 천국에 오면 그들을 환영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드골이 죽어 천국에 왔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일어나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었답니다. 관례대로 하나님께서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일어나면 저자가 이 자리를 낙아 챌 것이다."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겠지요. 요즈음 대통령 후보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 지도자일까요? 17세기에는 목사들이 선거설교를 하였습니다. 한 250년 동안 이 전통이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목사들은 선한 통치자의 자격을 "현명, 경건, 정의감"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사람이 능력있는 통치자인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막스 웨버는 "정열, 책임감, 식견"을 말했도 데일 잔드는 그의 책 "리더쉽의 3요소"에서 "지식, 신뢰, 권력"을 말했습니다. 투표는 잘해야 합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권력 갖기를 좋아하는데 그 권력을 갖음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대표적으로 권력을 갖음으로 성공한 왕과 실패한 왕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공한 인생, 성공한 지도자, 성공한 부모, 성공한 신앙인으로 남을 것인가를 교훈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성공한 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요?

1.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울은 참으로 효자였고 인격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외모적으로도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건으로 인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건이 무엇입니까?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이 능력있는 왕이었지만 골리앗으로 인하여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울은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여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 때 어린 목동 다윗이 나타나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패전으로 고통당할 줄 알았던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니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겠습니까? 승리를 환영하는 인파가 나와 요즈음 같으면 월드컵 4강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환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혜 없는 여인들이 찬양을 부르는데‘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왕이라면 이 말 듣고 어떻겠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불쾌했습니다. 감정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미워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꼭 꼬투리를 잡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사람이 웃는 것도, 그 사람이 칭찬하는 것도 그 사람의 걸음 걸이도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것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까지 싫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를지지 하지 않으면 그 사람까지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다윗이 자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해도 싫고 다윗이 자신의 사위가 되어도 싫고 자신을 위해 적을 물리치고 승리해 주어도 싫은 것입니다. 이유 없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감정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쓴 뿌리가 되어 이 감정인 자신의 삶을 지배해 버립니다. 이것을 인생을 왜곡되게 이끌어 가는 상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이 상처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이 상처 때문에 사울은 10여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 하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마쳐 버렸습니다. 이 감정적 상처 치유받지 못하면 이것은 어떻게 인생을 비극적으로 지배하는가를 보십시오. 8절 보십시오. 이 심히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분노의 대상도 장소도 시기도 분간하지 못하고 분노의 노예로 만듭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자기를 위해 싸워준 사람입니다. 분노를 내려면 여인들을 향하여 내어야 합니다. 사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9절을 보세요.‘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목은 의심의 눈으로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관련시킵니다. 그리고 추측을 합니다.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억측을 부리는 것입니다. 과민 반응, 신경쇠약, 노이로제에 걸립니다. 의부증, 의처증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의 병이 생깁니다. 결국 어떻게 진전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악한 영의 포로가 되어 가정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자기의 직장을 자신의 인생을 실패의 길로 끌로 가버립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야료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생트집을 잡고 떼를 쓴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섭섭합니다. 모든 것이 왜곡되게 보입니다.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여야 자신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에게 맡겨준 일을 하지 못합니다.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평생동안 이 상처의 노예가되어 다윗을 쫓다가 실패한 왕이 되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 역시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 하는데 자기 집에 찾아와 기름을 부으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는 집에 오라고도 안합니다. 얼마나 기분 나쁜일이고 열등감을 가질 일입니까? 그것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나갔을 때 형들이 어떻게 대합니까? 모멸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 문제삼지 않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섬겼던 사울이 자신을 10여년 동안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싶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12,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고 그의 마음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 13:22)" 다윗이 자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 18:1-6)"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실패한 인생, 실패한 신앙인, 실패한 교인, 실패한 가정, 실패한 지도자, 실패한 직장인이 아니라 성공한 인생, 성공한 신앙인, 성공한 가정, 성공한 지도자, 성공한 직장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리에 집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초점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지배의 지도력이 아니라 섬김의 지도력으로 성공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사울의 인생이 이 사건을 통해 비참하게 전개되어 갑니까?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8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말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 하고 투덜거렸다. (삼상 18:8)
공동 번역에서도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 가겠구나"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자리(position)에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것도, 창을 던진 것도, 좌천시킨 것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도 다 자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이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사람이 자리에 관심을 갖는 것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사람 병신됩니다. 폭군이 되고 독제자가 되고 파렴치 범이 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자리에 집착하다 비극으로 끝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자리에 집착하다 총맞아 죽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을까봐 끊임없이 중상과 모략을 하고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까봐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리를 얻지 못하면 내가 누군데 나를 그 자리에 앉혀 주지 않느냐고 분노합니다. 그 자리에 오르면 그것을 끝까지 차지하고 싶어 경쟁자를 교묘한 방법으로 퇴출시키고 적대시합니다. "내가 목사인데, 내가 장로인데, 내가 사장인데, 내가 어머니인데 내가 아버지인데, 내가 ..." 이것밖에 대접을 하지 않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어디에서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즈음 선거철입니다. 잘 관찰해야 합니다. 누가 자리에 집착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치꾼이라고 합니다. 정치가와 정치꾼을 구별해야 합니다. 영어로 전자는 '스테이츠먼' 후자는 '폴리티션'이라고 합니다. 스테이츠먼이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경세가(經世家)라면 폴리티션은 국가보다 자신과 당파의 이익에 집착하는 정상배(政商輩)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는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정치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정치인을 말하고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하는 정치인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자리에 집착하면 결국 인생 정치꾼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꾼 신앙인 정치꾼 주부 정치꾼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자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누가 되든 나라 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국민의 나라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주어지면 겸손히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리에 연연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을 삼으며 그 일에 충실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지혜롭게 행합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차례 있습니다.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도망을 갑니다. 그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삼하 16장 10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리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 16:10)"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싸웁니다. 자리 싸움입니다.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합니다.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 자,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이 자리는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드릴까?"에 있습니다. 예수님는 하나님이십니다.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인간을 섬겼습니다. 자기 몸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진성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이루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직장에서 이루고 교회에서 이루고 가정에서 이루고 사회에서 이루는 것이 진정 성공한 지도자입니다. 성공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 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리에 처할 수도 있도 남이 짓밟는 자리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오해의 자리에 자존심이 상하는 자리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울이 이렇게 상처를 받고 그 것으로 인하여 실패한 지도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인의 말을 듣고 심히 불쾌하고 노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당대 최고의 왕입니다. 잠깐 여인들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여론이 잠깐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사실을 호도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좋지 않게 말해도 옳은 일이면 바른 일이면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일이면 모든 사람이 싫어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이 누구십니까?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명의 한 소년이었습니다. 산골의 소년이었습니다. 왕이 될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있는 유명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워주었습니다. 왕이 여인들이 노래한다고 되고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가 여인들의 평가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론을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론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졌지 사명이나 진실이나 백성의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보고 뚜렷한 기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을 끌고 목적지를 가야할 사람입니다. 실패하는 신앙인은 늘 사람의 인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신앙인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입니다.
2000년 5월 25일 과천에서 한 대학생에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해서 시체를 토막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어머님이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같이 문학회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명문대 출신입니다. 그분의 꿈이 대통령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군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녔습니다. 야망이 있는 분입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일기에 의하면 시계보는 법을 모른 다고 맞고, 운동화 끈 못 묶는다고 맞고, 밥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으로 맞고, 무릎꿇고 잠언을 낭독하게 하고 형과 집안 형제들과 비교하여 늘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그 한마디만 들었더라면...’어머니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평가, 아버지의 평가, 선생님의 평가, 친구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냐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 그 때 어떤 평가를 받느냐 그것이 진정 성공과 실패의 기준입니다. 비교의식에 의해 인생 비참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짓밟혀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그것에 마음 쓸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실패자라고 해도 그것으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 까지 나를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로 불렀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실패한다고 나의 가치가 변하는 것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병들었다고 나의 가치가 변하는 것 아닙니다. 1억원짜리 수펴 구겨졌다고 일원의 가치가 없는 것 아닙니다. 흙묻었다고, 심지어는 찟어졌다고 일억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 구겨지고 찟겨지고 흩트러 졌다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어찌 우리가 비굴하게 살겠습니까? 환난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피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 7:9)"
이 음성이 여러분과 저에게 들려주는 음성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평가는 다 이기적이고 즉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인생이란 자신이 기준이 되어 평가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평가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가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가 진정 성공과 실패의 기준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는 평가를 들어면 됩니다.

성공한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까? 성공한 아내, 성공한 남편, 성공한 지도자, 성공한 인격자가 되고 싶습니까?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거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오직 주님이 내 주인이 되어 나를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상처가 나의 주인이 되게 하면 결국 그 상처와 함께 내가 파멸되고 나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병들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자리에 집념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으로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 인생의 진정한 성공입니다. 자리에 집착하면 열등감과 교만으로 자신의 인생은 늘 불안해 지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시기와 질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출 때 진정 섬김의 지도력은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너무 사람의 평가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사람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그것으로 인생을 실패일 뿐입니다. 지금 내 생각 지금의 기준이 전부는 아닙니다. 나를 정확하게 평가하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공한 지도자와 실패한 지도자/사무엘상18:6-16/ 김필곤 목사/ 열린교회/ 200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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