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분명한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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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19:1-7
교회 다시시는 성도님이면 한 번쯤 들어본 고전적인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두 분의 수녀와 택시를 타고 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가운데에 앉고 나이 많은 늙은 수녀님이 오른 쪽에 나이 젊은 아름다운 수녀님이 왼쪽에 앉았다고 합니다. 차가 우측으로 돌아 갑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좌측에 앉은 젊은 수녀님 쪽으로 몸이 기울어 집니다. 그 때 신부님은 "주여!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지나 차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나이 많은 수녀님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는데 그 때 신부님은 "주여! 시험에 들리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신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사 자신이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자신에게 편리한 쪽으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쪽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 일반적인 인생입니다. 이런 유의 인간형을 셀프-오리엔테이션(Self-orientation)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자기 지향형 인간입니다. 자기지식과 자기 경험 지향적 인간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에 의해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가 주도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환경 지향적 인간이 있습니다. 어더-오리엔테이션(Other-orientation)이라고 한답니다.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주도되고, 종속되어 지는 사람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는 사람입니다. 남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것같고 자존심 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둘 다 아닙니다. 신앙 지향적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페이뜨-오리엔테이션(Faith-orientation)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준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삶의 기준이 자기에게도 상황에도 "유용성, 편리성, 유희성" 있지 않습니다. 판단 기준이 삶의 기준이, 가치 기준이 분명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 4대 왕인 여호사밧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1. 어떤 경우든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히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3)
목적과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차를 타고 운전석에 앉았는데 목적지가 없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났는데 목적지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였는데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학생이 학교에 갔는데 직장인이 일터에 나갔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을 여호와를 찾는데 분명하게 고정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나옵니다. 이 분은 이스라엘 나라가 현재 우리 나라처럼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남쪽 유다 나라의 4대 왕입니다. 남쪽 유다 왕 중에서 3명의 현군을 히스기야, 아사, 여호사밧 왕이라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씨 조선의 세종대왕쯤 되는 왕입니다.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려 부자나라 강한 나라, 정의롭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귀 영화가 극에 달하자 북쪽 이스라엘 아합왕의 딸과 자기 아들을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 며느리는 이방신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좇지않고 인간을 좇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해 버립니다. 18장 1절을 읽어 보십시오. 한번 잘못 찾아 간 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잘못된 길로 빠져듭니다. 목적지와는 멀어집니다. 이스라엘 왕이 연합군을 만들자고 합니다.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전쟁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도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자고 합니다. 17:4절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 400명이 전쟁을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5).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물어 보자고 합니다. 미가라는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16절 보십시오.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여호사밧은 단호하게 결단하지 못하고 이방 선지자의 말을 따라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왕은 죽었고(33)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만 살아 나왔습니다. 19장 1절에 평안이 돌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것이지 실상은 평안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쾌락을 찾고 세상을 찾으면 기쁨이 올 것같지만 그러나 결과는 실패이고 눈물이고 비극입니다. 이 때 선지자 예후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오늘 본문 2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쫓지 않을 때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과거 왕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왕이지만 그는 이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20장 3-4절을 보십시오. 6-7절을 보십시오. 12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 돈을 찾는 삶이 아닙니다. 명예를 찾는 삶이 아닙니다. 권력을 찾는 삶이 아닙니다. 문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삶입니다. 이게 신앙인의 삶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찬송과 기쁨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찾지 않아고 하나님을 찾으면 즐거움은 저절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즐거움이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봉서 장로의 간증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학생 만나는 재미로 다녔지 신앙은 없었다고 합니다. 40이 넘어서야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교회가면 무엇보다 몰려드는 잠을 참기 힘들었답니다. 목사님 설교는 자장가였고 찬송가를 4, 5절까지 부르는 것도 정말 지루했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도들이 기도하면 남자보다 배가 더 걸려 싫었다고 합니다. 이제 끝나려나 생각하면 또 “원하옵건대…”가 반복되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병상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연로한 목사님이 4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와서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5분, 10분씩 계속되는 그 기도소리가 지루하고 귀찮기도 해서 시큰둥하게 대했는데 매일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의 정성에 감복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 수술을 받은 뒤 40일 만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필름을 들고와서는“구선생, 내가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아무래도 다리를 잘라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였고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절망감에 빠져 가슴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답니다. 그러자 의사가 “진정하세요.어렵겠지만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봅시다”라고 말했답니다. 수술에 성공할 확률은 30%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정성을 다해 기도했는데 자신은 그래도 교만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면 1차 수술에서 성공했어야지"하고 시꾼둥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의사가 수술 결과를 가지고 와 “구선생, 주님이 도우셨습니다.다리를 안 잘라도 되겠습니다”그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분의 첫 번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뿐이었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답니다. 병이 나아 교회에 나가 인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신도들의 기도로 당신이 나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씀 한마디 하셔야죠”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키는대로“여러분 감사합니다.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제가 나았답니다”그러자 목사님이 나를 쿡 찌르면서 작은 소리로 "여러분 덕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나았다고 해야죠”다시 시키는대로 “실례했습니다.여러분 덕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덕분이랍니다”그러나 내심은 “뭘 예수가 고쳐줘, 의사가 고쳐주었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더욱 등한시 했는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사업도 망하고 자신의 다리 통증으로 나날을 고통으로 보내었고 부인이 낙담해 앓아 눕고 말았답니다. 그 때 곽기석씨 부부의 전도를 받고 아내가 병이 낳고 본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자기 집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 하는 데 자신은 한쪽에서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조금 지나자 기도하면서 방바닥을 치는데 머리가 울렸고 시끄러워 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곽규석씨 내외를 비롯 서수남 윤복희 정훈희 김자옥 고은아씨 등이 공부하였는데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 말입니다”속이 뒤틀려 “쳇, 메뚜기와 석청이라. 그야말로 고단백 영양식에 로열젤리만 자셨는데 뭐가 헐벗고 굶주린거야”라고 말하자 성경공부팀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기도를 받는데 며칠간 잠을 못잔 사람이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나는 찬송가 405장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찬양 가운데 안개가 자욱하고 한 분이 내게로 걸어오셨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는데 눈물을 흘렸는지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흘 뒤 늘 망치로 때리던 것 같던 아픔이 점차 누그러지는 것 같았는데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분은 성경공부에는 합류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오직 주님을 찾는 삶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구봉서’가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를 짖고 연예인들을 전도하며 간증집회와 우간다에 학교를 짖고 선교하는 일과 섬지방 선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돈을 찾던 삶, 인기를 찾던 삶에서 하나님을 찾는 삶으로 변화되기까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왜 진즉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라고 말합니다. 그랬으면 더 인생을 보람있게 살고 그 돈많이 벌었을 때 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 인생 한 번 사는 것입니다. 누구를 찾으면 인생을 살겠습니까? 무엇을 찾으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우리 하나님을 찾으며 사는 길이 가장 기쁘게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6)라고 말씀합니다.
2. 무슨 일을 맡았던 하나님만 위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하게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6).
삶의 동기 문제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인기를 위한 삶, 명예를 위한 삶, 부귀 영화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기준을 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입니다. 이제 여호사밧은 실패를 통해 뼈져린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라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경제를 살리자고 가는 곳마다 말합니다. 어느 대통령은 크리스마스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축사를 하라고 하니까? "경제가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면 성탄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대통령 만들어 주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어디 덧납니까? 경제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현실적으로 맡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패전국입니다. 패허화된 국토를 재건합시다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우리 힘을 합하여 다실 한 번 일어나자라고 연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는 말은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성에 재판관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참 귀중한 말씀입니다.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재판관을 세운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판사가 되게 한 것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앙 고백인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고백도 이런 고백이어야 할 줄 압니다. 나의 맡겨 준 일, 나의 건강, 나의 재물, 나의 시간, 나의 감정, 나의 재능 여호와를 위하여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는 사람을 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일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이 원칙을 세워야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다는 분명한 기준 말입니다. 여호와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손해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위해 하면 그것은 나에게 보장이 되고 우리 가정 내가 거하는 곳이 보장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해도 여호와를 위하여, 사업을 해도 여호와를 위하여, 운동을 해도 여호와를 위해, 놀이를 하도 여호와를 위해, 정치를 해도 여호와를 위해, 예술을 해도 여호와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멋진 삶이겠습니까? 이것이 보람있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주식회사 영성 회장이시고 서울 서대문 결핵병원내 베데스다 교회 설립자이신 이정재 장로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 분은 40년간 매월 평균 200명 이상, 지금까지 모두 7만명 이상의 결핵환자들을 돌보신 분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결핵환자를 위해 인생을 바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전남 장흥의 농가에서 4남 5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목포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6세때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남산 토굴에서 담요 몇 장을 깔고 지내는 등 어려움 속에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사카린 등 인공 감리료 제조에 손을 대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33세 때인 69년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고 합니다.당시로서는 치명적인 결핵이라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시립 서대문 병원.많은 결핵환자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 장로는 “살려만 주시면 여생을 결핵환자를 위해 바치겠다”며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서원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남은 인생 주를 위해 살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적같이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빚을 갚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 결핵환자들을 돕는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시가로 무려 550억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보금자리’를 설립했습니다. 종합병원 응급실 등에서 치료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일, 수술비를 구하지 못해 치료시기를 놓쳐 불구가 되거나 죽는 사람들을 고치는 일, 400만명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결핵환자를 돕는 일에도 힘을 쏟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멋인 인생입니까? 나만 내 가족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기준을 분명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재능,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시간 주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이렇게 기준을 분명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죽는 것 아닙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저는 선교 헌금 개인적으로 1년에 1억을 하시면서 사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1천만원 십일조 하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 분들 망하거나 인생 불행한 것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살아 있은 동안, 주어졌을 때,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주를 위해 사용하고 주를 위해 일하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3.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7).
방법의 문제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꾸 내 방법, 세상의 방법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진정 성공적인 인생은 하나님의 방법을 택할 때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판사들을 임명하면서 삼가 행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삼가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리하여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판하고자 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재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세가지입니다. 불의함이 없이 재판하라는 것입다. 편벽되이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편협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되면 자꾸 실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뜻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어 자기 뜻만 성취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워싱턴대 월터 윌리엄스교수는 "미국의 실정"이란 책에서 유능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네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정치력, 둘째 국가발전을 위해 장기적 목표를 설정, 실행할 수 있는 능력, 세째 정책을 스스로 분석, 비판할 수 있는 능력, 네째 조직적인 통치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통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 땅에 성취하는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가정에, 내가 소속된 교회에, 내가 일하는 일터에 내가 머무르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분명히 서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217장을 지은 분이 계십니다. 미국의 아델라이데 폴라드여사입니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신유집회에서 안수받고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했는데 기금 마련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기도 시간에 어떤 나이 많이 드신 할머니가 기도하는데 "주님, 우리 생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감동을 받아 이 찬송을 작시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생의 길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살다 인생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초조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주어지는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성취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을 줄 앎니다.
" ( 217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보면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를 보면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이것이 유익한가? 이것이 편리한가? 이것이 기쁨을 줄 것인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일을 어떻게 하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함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온다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유익이 눈 앞에 있다 하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돈많은 중년 부인입니다. 이국 땅에서 일가 친척도 없이 외롭게 사는 청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다윗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름 부은 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바운더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요셉이 죽습니까? 다윗이 비참하게 됩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뜻을 따르면 당장 눈 앞에 이득이 없을 것 같지만 그 길이 성공의 길이고 그길이 보장된 길입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가 분명하고 방법이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히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1-3)
무슨 일을 맡았던 하나님만 위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하게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6).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7).
기준이 분명한 신앙인/역대하 19:1-7/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