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8- 11)
본문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인간은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 의, 식, 주를 위해 힘써왔고 지금도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의, 식, 주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된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차의 냉동차 칸 안에 갇혔던 철도청 직원이 약 일곱 시간 후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들이 다 퇴근한 시간에 냉동차 칸에 들어갔다가 갇힌 그는 온 힘과 목청을 다하여 문을 두드리고 소리쳤으나 새벽에 순찰하는 사람이 이 칸을 점검하기까지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순찰하는 사람은 냉동차가 전기 고장으로 작동되어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철도청 직원이 죽은 이유는 여기가 냉동차 칸 안이니까 몇 시간 갇혀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는 염려와 잘못된 관념으로 인한 것입니다. 냉동실에서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가동되지 않아 춥지도 않은 냉동실 안에서 염려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세상에 실존하는 동물들 중에 위장에 구멍이 생기도록 염려하는 동물은 아마도 사람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날마다 염려하며 사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염려 없는 날이면, 염려 안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불안할 정도로 염려는 습관을 넘어서 중독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염려꺼리가 있어서 염려이고, 염려꺼리가 없어서 또 걱정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늘 범사에 염려가 충만하시기에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염려꺼리를 모두 다 없애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 '염려거리가 없어 큰 걱정이라고' 또 염려했다고 합니다. 아마, 염려도 은사(?)인가 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기 마련입니다.
염려라는 토양위에다 말씀이라는 씨앗과 기도라는 비료를 뿌린다면 어떤 말씀이나 어떤 기도로도 성장과 응답으로 자랄 수 없음을 곧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염려를 붙들고 살게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염려가 나를 붙들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염려는 일종의 병이며 그것도 중병에 속합니다.
염려라는 말은 본래 '목을 조르다. 나누어지다'라는 뜻이 있는데 염려가 우리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은 나누어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도 갈등하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인간이 염려하는 것 중에 85퍼센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필요 없는 소모적인 염려로 출혈을 하는가요? 뿐만 아니라, 염려해도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일들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가불하여 미리 염려하지는 않는가요?
우리는 질병에 걸리면 병으로 죽는 것보다, 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염려로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또한 직장을 잃었을 때도 직장을 잃은 고통보다,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음에 대한 염려가 더 많은 것입니다. 세상에 염려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인데 바로 두통입니다.
염려의 뿌리는 '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염려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붙들어 매시는 분이십니다. 염려로 익숙해지고 염려로 세뇌된 우리의 토양을 맡김의 토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염려가 있으나,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문제가 많으나, 걱정이 안돼서 걱정인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대적 사단은 성도의 염려와 불평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단을 배부르게 하려면 염려하고 범사에 불평할 것이고 사단을 굶기려면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변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무한한 기적의 가능성이 충만한 미래에 집중해야 합니다.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낳을 뿐이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낳습니다. 염려 중독증의 특효약은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잘 맡기는 은혜
큰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운데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정의는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 때 기분 나빠하거나 이미 버린 쓰레기를 아쉬워하거나, 다시 가져온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맡겨버리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 맡겨 버린 염려들로 인하여 마음에 평안이 흘러야 진짜 맡긴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꺼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은혜,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맡겨지는 은혜, 버리는 축복. 더 나아가 걱정은 많은데 걱정이 안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욕탕에 가보면 카운터 뒤편에 이런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긴 것만 책임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귀중한 것들을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은 맡긴 것만 책임져 주십니다.
나무는 잎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동안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근심 없는 사회가 없고 근심 없을 때가 없고 근심 없는 사람도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이면을 바라다보면 좋은 일만이 아니라 궂은일도 있고 또 궂은일만이 아니라 기쁜 일도 있고 이렇게 궂은일과 기쁜 일이 서로 교차하면서 인생이 점철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실 사람의 행·불행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도 그 이면 속에 감추어진 것이 행·불행의 더 큰 의미가 된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걱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걱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근심이나 염려나 걱정들 중에는 쓸데없는 것도 참 많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걱정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떠나버린 차와 마찬가지인데 이 과거지사, 지나버린 이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걱정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세상의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을 닫고 열 줄 아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조절할 줄 아는 것도 또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큰 능력인 것입니다. 과거는 닫을 줄 알아야합니다. 지나간 일은 우리가 마음의 창문을 닫고 잊을 줄 알아야 됩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는 것에는 울고 힘쓰는 것이 오늘의 나를 병들게 하고 오늘의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우
기우란 오지 않을 일, 있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황당한 걱정 속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걱정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걱정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걱정, 이것은 사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자아가 강하고 고집이 강한 사람에게 있는데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상하고 그 고집으로 남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얼마든지 더 좋은 일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된 것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뜻을 꺾을 때 더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를 내세우려는 걱정, 날씨 때문에 하는 걱정, 병들까하는 걱정 등등도 있습니다.
인생은, 살아가는 삶에서 걱정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을 빼낼 수는 없는데 걱정을 하되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일을 걱정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도 걱정과 근심을 했는데, 바울은 그 근심이 너희들 구원을 이루었고 그 근심이 너희를 깨끗하게 했고 그 근심이 너희들에게 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심은 망하게 하는 근심, 쓸데없는 근심도 있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좋은 근심도 있고 우리를 흥하게 하는 근심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아주 어려움 중에 고린도교회를 개척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게 세워진 교회, 눈물로 목회를 했던 이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 부도덕한 사건과 교회분파 분쟁이 일어나서 교회가 크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것만큼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책망을 했는데 직설적으로 책망을 했습니다. 이 책망을 하면서 바울은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고 또 바울 자신도 걱정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의 책망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의 책망을 하자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였고, 애통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시 경건해 지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의 마음은 참 기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죄가 분쟁 때문에 너희들의 마음뿐 아니라 내 마음에도 근심이 되었는데 그 근심이 회개를 이루고 오히려 열심인 신앙으로 발전했으니, 너희의 근심이 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그러면서 바울은 근심에는 세상적인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근심, 세상에 속한 근심은 상실과 욕심과 죄책에 관한 것입니다. 주식 사놓고 걱정하는 사람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걱정하는 사람들, 병들면 어떨까 걱정하는 사람들, 날 잡아놓고 비오면 어떨까 걱정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에 속한 근심으로 우리에게 해가 되고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놓고 벌 받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을 합니다. 죄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와 벌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인데 이 차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죄 자체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책벌과 형벌만 근심하는 것, 이건 세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 자체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지만 사탄은 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들켜서 책망이나 비난이나 징계 받는 그 자체가 두렵다는 것인데 이런 근심은 세상적인 근심이요, 이런 근심은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 이제 하나님 앞에 그 지은 죄를 은폐하려고 그 지은 죄와 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그 자체를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매 맞고 나서 한 기도가 자기 죄를 덮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슬초로 나를 씻겨주소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덮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우슬초로 씻겨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제 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죄 자체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윗에게 그 풍난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죄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을 받을 사람은 죄를 두려워하되,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용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아파하고 내 양심에 물들여진 검은 그 죄악의 덩어리를 아파한 것이 아니라 들킬까봐서 내 체면 때문에 내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한다면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말 쇼저라고 하는데이 말의 뜻은 병든 것에서 낳게 되고 망한 것에서 일으키게 되는 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이 기뻐하는 근심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에 따른 근심을 해야 됩니다. 더 큰 십자가를 지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하고 더 충성하지 못한 것, 형제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내 자아가 더 깨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혈기를 내서 내 마음대로 한 것을 우리는 근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뜻에 따른 근심은 축복된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겸손으로 이어지고 회개로 이어져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서 이전보다 더 좋은 자리로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허락하신 근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심 걱정할 일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7장 10절에 보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후회할 수 없다는 것은 취소할 수 없는, 주저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일까요? 맨 날 과거나 현재의 죄를 뉘우치고 살아가는 것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잘못된 상태에서 뉘우치고 되돌아서는 것”과 또한 “주님과 함께 깨닫는 상태, 주님의 마음과 연합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사도행전 11장 18절에 나오는 생명을 얻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 51편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시인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34편 18절에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심령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7장 15절에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근심을 하면 마음이 상할 정도일까요?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신앙의 몸부림이요, 천국을 향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61장 1절에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 147편 3절과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에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깨달으려고 애쓰는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 생명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들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는 자”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 근심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은 아주 단순하며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근심에서 자유를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을 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근심을 해야 됩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자는 근심, 거룩한 근심, 이런 근심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죄도 덮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더 귀하고 위대한 것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 세상 걱정 아무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때로는 작은 일이 풀려질지 모르지만 더 큰일이 꼬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근심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 근심하기보다는 내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한 근심이 아니라 진실하기 위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한 근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기 위해서 정말로 근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해 주신다고 했고 복을 주신다고 했으며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근심하지 않고 근심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근심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우리가 더 높은 사람 더 깨끗한 사람 더 거룩한, 값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값있는 삶을 위하여 이렇게 바울처럼 고린도 교인들처럼 근심하여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하나님의 인생을 책임져주는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