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와 목적 (고후6:1-10)
본문
고린도후서 6장 1∼10절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이 고기를 잡아야 하며 이 고기와 자신과는 무슨 원수가 있기에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고기는 노인 자신을 원수인 줄로 생각하겠지만 노인은 사실 그 고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노인은 힘도 없고, 고기를 잡아도 노인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고기가 걸렸으니까 그 고기를 잡았습니다. 굉장히 큰 고기였습니다. 그것을 끌고 뭍으로 나올 때 상어 떼들이 와서 다 뜯어먹고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살아도 이처럼 결과는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알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지구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과 설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오장육부와 마음과 생각까지 옷감을 짜듯 만드셨습니다. 사랑의 기술로 날실과 씨실을 재료로 하여 짜셨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만든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 목적과 존재 목적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목적을 잘못 설정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럴듯한데 아닌 목적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잘못된 인생의 목적을 사이비 목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이비(似而非)’란 아주 다른 게 아니고 겉으로는 그럴싸한데 아닌 것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1장 7- 9절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갔던 이들이 왜 갔느냐는 질문을 통하여 목적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간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간 것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간 것도 아닌 선지자 요한을 보러 간 것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요한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평가하십니다. 이 말씀과 똑 같은 상황이 우리 인생에서 오늘날 벌어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냐? 선한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냐? 그럼, 물질을 남기기 위해서냐?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니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교묘히 속이는 사이비 인생목적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 이름 남기기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참으로 멋있는 속담입니다. 그러나 이 속담이 무수한 호랑이들의 가죽을 벗겼습니다. 우수개 소리이지만 그래서 지금은 한국의 호랑이를 볼 수 없나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껍데기를 벗기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름을 남기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주객이 전도될 수 있는 위험한 속담입니다. 참되게 살다보니 이름이 남는 것이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 여기서‘명예’는 히브리어 ‘쉠’으로 ‘지위, 명예, 명성, 평판’ 등으로 번역됩니다. 쉽게 말해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굴욕적인 말인지 알면 놀랄 것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든지 거짓을 행할 수 있습니다. 비굴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속이고 이름을 남기는 것은 옳은 삶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항상 염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목적이 중요하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평가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잠언의 말씀은 재물보다는 명예를, 금은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라는 말로,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이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름 남기는 것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기 이름 남기려다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사울 왕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갈멜에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좋은 전리품과 살진 가축들을 진멸하지 않고 자기 소유를 삼으려다 자기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삼상15:23). 그가 세운 전쟁 기념비, 그의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2. 선행 쌓기입니다.
개나 돼지처럼 자기를 위하여만 살지 않고 남을 생각해 주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선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정신이요 앞으로 후손에게 남겨줄 위대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고등종교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말씀하십니다.“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하나님께서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게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목표이지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무엇을 바라고 하는 덕목이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과거의 업보를 선행과 자비를 통하여 상쇄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고마워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아나 과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도 애굽의 종살이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 과거를 생각하며 선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행은 이 세상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우리가 세상에만 국한된 존재라면 선행이 가장 귀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세상만의 존재가 아닙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요일4:5)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의 목적으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선행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히 해야 합니다.“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구제도 선행도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3. 물질 모으기입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 건강과 재물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불길한 징조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쓰다가 놓고 가는 것들입니다. 영원을 선물로 받은 인간이 한시적인 것만 누리려고 아등바등한다면 만드신 하나님 기분 나쁘실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사는 것보다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소유의 속성상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노력하며 그 결과가 올 때 잠시 만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의 삶을 구속합니다. 삶의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존재 가치와 소유 가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만약 같다면 부자는 행복하고 돈이 조금 없는 사람은 불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혼율, 자살률은 잘 사는 나라일수록 더 많습니다. 많이 가질수록 현실에 불만을 더 많이 가진다는 증거입니다. 영원을 위해 창조된 성도가 세상이 다 그런다고 재물 모으기로 인생을 탕진하면 안 됩니다.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잠27:24)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교훈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많이들은 말씀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우리는 이 물질에 관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 청년의 쓸쓸한 뒷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0)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 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빛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에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럴 듯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만, 삶의 목적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남기며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그것이고, 선행을 베풀며 물질을 모으는 것이 그것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는 이와 같은 목표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곤충학자 베이컨은 곤충들을 연구하면서 세 종류의 사람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 개미 같은 사람은 남에게 신세지거나 피해는 주지 않지만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일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거미 같은 사람은 남을 이용해 사기를 치고 자기 욕심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주는 아주 고약한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세 번째는 벌 같은 사람은 자기가 희생하고 수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주 달고 좋은 약이 되는 꿀을 공급해 주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 31)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은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소요리 문답 제 1 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삶의 목적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먹는 것도 나의 욕심을 위하여 지나치게 값비싼 것이나 먹어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마시는 것도 아무것이나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알콜이나 마약같은 것 마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일하는 것도 직장 일이나 가정 일이나 교회 일이나 큰일이나 잡다한 일들까지도 일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가? 출40:34-35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다 완성하였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대하5:11-14에 보면 다윗이 제사장들을 스스로 정결케 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할 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8:29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마25:21에 충성된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더 많은 것을 맡기시고 축복하십니다.
2. 사람들과 교회에 거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10:32)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원리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요,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간관계에서 어느 사회생활이든지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 말 한 마디라도 유익을 주고, 냉수 한 그릇이라도 돕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한 번은 어떤 지식 여성이 영국의 철인 '토마스 카알라일'에게 '선생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카알라일은 그 여인의 교만한 마음을 짐작하고 대답하기를 '당신이 만일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아시려거든 지금이라도 곧 돌아가서 당신의 바느질 그릇부터 정리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당장에 눈앞에 있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고 쓸데없이 큰 것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인생의 진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주고 저희로 구원 얻게 하라
바울은 먼저 시범을 보였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 33)고 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시키려고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했습니다.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 주는 사람. 그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희로 구원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9:19-22에 보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적용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전도하며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우리도 남은 인생을 정말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갑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다. 모든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주며 구원을 얻게 하는 최고의 일을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 세상 지나가고 천국에서 영원한 자랑의 면류관들이 됩시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는 늘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와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공허하고 삶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러 삶의 고통이 그저 무의미하게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삶은 얼마나 괴로운 것이겠습니까?
본문 말씀처럼 그저 많이 견뎌야 하고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면 삶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아이를 출산하는 어머니처럼,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처럼, 승진을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처럼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면 그에 따르는 괴로움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모든 일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많이 견디고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다른 여러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 한 사역자들이 그토록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직책이 훼방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직책이란 바로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단지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욱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8∼10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에게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기쁨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저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큰 소망과 목적 및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현재의 모든 일은 너무나 귀합니다. 주님의 크고 놀랍고 귀한 계획 속에서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더욱 믿음에 있어서 강해지고 온전해지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삶 속에서 항상 주님의 계획 속에서 기쁨이 충만하고 승리하며 능력있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광대하신 주님,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해같이 빛나게 하소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어도 가야 할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처량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내일이 없는 사람이요 소망이 사람입니다. "태어났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열심히 살다가 시간이 되면 갈 곳으로 가겠지!"라는 식의 삶은 너무나 무책임한 삶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세상을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인생의 목적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고 어리석게 변명하시렵니까? 세상에서 명예나 돈으로 쾌락을 누렸던 사람일수록 허무감을 더욱 많이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인간을 만든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영원히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길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