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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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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마 22:34~40)
마경훈 목사 (소망교회)

신앙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전13:13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여 사랑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했습니다. 고전12장에서 신령한 은사들에 대해서 다루다가 31절에 가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한 후에 고전13장으로 넘어가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닙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입니다. 은사, 능력, 믿음, 축복, 기적, 신유... 이런 것들은 신앙인들이 사모하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뒷전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뒷전으로 밀려 난 이유는 사랑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사랑 안에는 믿음도 소망도 들어 있고 그 외에 성경에 약속된 은혜와 축복, 신유, 은사, 능력, 기적 등이 들어 있는데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13장에서 사랑을 한 마디로 말하지 못하고 다양한 사랑의 현상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는 사랑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1.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며, 인간이 타락하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신 구원주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많으나 그 중 첫 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큰지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하나님을 향한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14:21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어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두 가지로 나눠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법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는 지금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곁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우리에게 에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2)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4:20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형제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형제들은 주님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 아내를 괴롭히고 제 자녀들을 괴롭힌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향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 집에 가서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노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말없이 봉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에 지나도록 수고합니다. 목사가 상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쁨으로 수고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주님의 교회에 대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 어떤 희생과 헌신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아들을 죽여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왜 즉시 순종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독자 이삭을 포기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시간을 포기하고, 취미도 포기하고, 권리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2. 사랑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세 가지 사랑을 다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유가 책임이라는 태두리 안에서 허용되는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허용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사랑이라는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미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 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니 우주 안에 어떤 피조물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을 자연적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자연적 인간은 나름대로 사랑 받을 존재이지만 처음 받았던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다시 사셔서 이전 보다 더 사랑 받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잘 모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릇이라는 사실 자체로만도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그 조건에 합당한 경우에만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조건에 의해서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롬5:6,8,10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어떤 허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다 같이 외칩시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다. 나는 내가 사랑해야 할 존재다”


3. 사랑의 대상은 이웃입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형제, 자매, 친척,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배우자까지 이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합니까?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가장 좋은 길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그들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도 좋은 사랑의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서 더 강력하게 실천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마귀에게 사랑을 빼앗기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 사소한 일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의 하셔서 충만한 사랑으로 교회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나와 외모가다르듯이사고와가치관이 다릅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반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친해지면 반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기억 하십시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충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사람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믿음이 흔들린다면 나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충돌은 나 자신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충돌이있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자아의 찌꺼기들이 떠오릅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충돌을 통해서 떠오르니 충돌도 감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의 찌꺼기가 보이면 하나님 앞에 그 찌꺼기를 처리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아픔은 나를 더 폭넓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원수가지 사랑하는 훈련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의 충돌이 일어나면 상대와 완전히 담담을 쌓아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옳지 않습니다. 한번 찍히면 영원히 찍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도 기독교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악을 사랑으로 이기는 것이 기독교적인 대인관계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덜 되서 그러니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잘 난척하지 않는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친한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소외감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추진력도 있어야 하지만 성격이 좋아야합니다. 상처주지 않고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표정에 대해서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오. 그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대화를 불만과 불평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분별하고 잘 권면해야 합니다.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면서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 신앙에 도움이 안 됩니다.
내 자녀에게는 관대하고 남의 자녀에게는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하셔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들 대문에 시험 드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듯이 자신의 영역을 정해놓고 침범 못하게 하는 일도 주의해야 합니다.
모임을 가지면 쓸데없는 소리나 반대되는 행동으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고쳐야 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자기 할말만 하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동체 개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눈치가 부족하든지...
사랑은 표현되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는 훈련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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