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은 없다 (욥 20:21)
본문
요절 :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욥20:21)
본문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환란을 겪고 있는 욥에게 친구 소발이 한 말이나 그런데 욥에게는 해당치 않는 것으로서 소발이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악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은 맞는 말임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됩니다. (21절), 어느 누구에게도 100점짜리 인생은 없습니다. 100점짜리 인생은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100점짜리 생을 소유하고자 함에 범사가 불만족이며, 삶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불만족Ⅰ : 건강
인간의 육신은 기계와 같고, 흙으로 지어진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런저런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사람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무슨 병이라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00점짜리 건강은 없습니다. 두통, 당뇨, 고혈압, 저혈압, 설사, 변비,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온몸이 저리고 쑤심, 안질, 골다공증, 정신병, 무좀, 습진, 귀, 입, 간, 장, 치아, 피부...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희귀병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건강은 중요하고도 필요합니다. 해서 건강에 주의도 해야 하고, 관심도 가져야 합니다. 허나 내 몸의 어디도 고장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질병이 생길 수 있고, 갖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에 좀 이상 라도(이상이 생겨도) ‘이럴 수도 있지 뭐 사람인데... ’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이는 바울이 자기 몸의 찌르는 가시, 곧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십니다. 이후, 바울은 자신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니 그의 몸은 병이 없어야 하고, 혹시 병에 걸렸더라도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헌데 그의 몸에는 병이 있었고, 하나님께선 고쳐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간구는 인간의 욕망을 위한 재물, 권력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었건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니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신 것일까요? 외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플루머(Plummer)의 말을 빌립니다. “바울의 기도는 거절당했으나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인간은 고통과 약함을 통하여 영이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약함을 알고 겸손히 자기를 낮춤은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되는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말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100점 건강을 갖고자 안달을 하면 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과 육이 합성된 존재임으로 영적 건강으로 내적인 질병을 정복해야 합니다. 건강한 영으로 50의 아픔을 20, 10, 5로 줄여야 합니다. 50의 아픔을 80, 90, 95로 만듦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몸을 사랑하되 내 몸을 우상화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기뻐했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찌르는 가시를 통하여 머물게 했고, 모든 기독교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머물게’라는 헬라어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을 펴고 확고부동하게 머문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동의 은혜를 자신에게 머물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건강이 없음을 알고 지금 내 몸의 아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와, 믿음으로 고통을 줄이고, 기쁨으로 힘있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에 대한 불만족을 버리시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하며 사십시오. 병이 있어도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건강이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좋은 상태이거나 아무런 병도 없고 또는 약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 있는 말입니다.
불만족 Ⅱ : 사람
부모, 자녀, 부부, 형제자매, 교우, 이웃, 직장의 상하... 사람은 사람,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부딪치며 생활하고 있고, ‘너’에게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너’가 ‘나’에게 100점짜리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너’도 ‘나’도 100점짜리는 아닙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사장, 내 친구, 내 동료, 내 목사, 내 교인에게서 100점을 원해서는 아니됩니다. ‘너’에 대한 ‘나’의 불평불만은 ‘너’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100점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없는 것을 찾으니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에게서 부족함이 보이면 ‘나’에게도 부족함이 있음을 보고 자족해야 합니다. ‘너’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어야만 됩니다. “너에게서 필요를 찾으려 말고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주라” 제 결혼 주례사입니다. 예수님께선 내어주신 사랑을 하셨습니다. 생명까지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너와 나, 우리는 언제나 받으려는 사랑에 주려 있기에 항상 불만족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면서도 ‘너를 위해서’라고 위장하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 의미를 상대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바라고, 지나친 욕구충족의 추구 때문에 미움이 생기고, 싸움이 발생하며,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떻다구요? 아내가 어떻다구요? 내 자식은 왜 이 모양이냐구요? 내 이웃이 싫다구요? 없어졌으면 좋겠다구요? 없어보십시오. 무인도에 가서 살아 보십시오. 불만이 제거되는 그 순간부터 가슴을 치고, 외롭고, 슬플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 100점짜리 찾지 않으셨습니다. 하나같이 근량미달이었습니다. 그러나 100점짜리로 만드시려고 3년 동안 이끌고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다듬으셨습니다. 사람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서 관계하면 할수록 불만족의 덩어리는 더 커지며, 기쁨의 삶은 더 멀어집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 내 교인, 내 목사, 우리사장, 내 직원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 뿐, 가까이 가서 보면 내 것보다 더 작습니다. 어떤 부인이 주님께 자기를 한번 만나달라고 늘 기도했답니다. 그녀의 끈질긴 청원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3가지만 말해라. 더는 아니된다” “지금의 남편과 도저히 못살겠으니 그를 죽게 하고 더 좋은 남편과 살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 소원은 즉시 성취되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데 문상객들이 모두 남편의 온갖 좋은 점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너무 성급했음을 후회했습니다. 해서 주님께 “그만한 남편도 없는데 제가 미련했으니 다시 살려 주세요”라고 간구, 두 번째 청도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딱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데 무엇을 구할까? 영생불사?, 돈?, 권력?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좋은데... 궁리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구할 것이 너무 많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여인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제 마지막인데 무엇을 청원할까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주님께서 껄껄 웃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살다가 무슨 일을 당하여도, 누구를 만나도, 항상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달라고 청하거라”
불만족 Ⅲ : 축복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이 땅위의 누구에게도 결코 100점짜리 축복이 없습니다. ‘쌍가마에도 근심이 있다’ 우리의 속담입니다.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22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20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한결같이 100점짜리 복이 없음을 말씀하심입니다. 인간의 대표적 탐욕은 돈, 물질입니다. 헌데 이에 대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절대적 필요충족을 할 수 없습니다. 스토아학파는 “당신이 만약 누구를 행복하게 하고자하면 소유물을 증가 시켜주지 말고 그의 욕심을 제거해주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학설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욕망을 없앨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욕망 제거가 자급자족이 아니됨을 알았습니다. 신급자족,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빌4:1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내 복을 타인과 비교, 행복해지려고 하면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까닭은 죽을 때까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을 받았고 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행복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불만족, 불행은 내가 복을 받았고, 행복한 사람임을 모르거나, 사단에게 빼앗겨서 와지는 것입니다. 100점짜리 완전한 복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 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은 파멸을 초래합니다.
놀만 빈센트 피일(N.V.Peale) 목사가 발리(Bali)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갔습니다. 큰 산업 시설도,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그런데 왜 그들이 행복하게 살까?’ 라는 의문을 갖고 일주일 동안 섬 주민들과 인터뷰한 결과입니다.
1,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simple).
3,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 a beautiful island).
‘nothing' 'simple' 'enough' 'like' 'beautiful', 주목해야 할 단어들입니다. 이란 왕 팔레비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중의 왕’을 자처하며 2500년전 누렸던 페르샤 왕국의 영화를 다시 이루겠다고 천명, ‘백색혁명’을 주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송까지 받았습니다. 허나 장기집권을 함에 따라 비밀경찰이 생겼고, 정치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저녁 파티 비용으로 1억달러, 전용 비행기 화장실까지 순금으로 장식, 600명의 호위병...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회교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왕좌에 축출, 모로코에서 바하마로, 바하마에서 멕시코, 미국, 파나마로 떠돌다가 1980년 7월 2일 카이로의 한 육군병원에서 임파선암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육체의 악에 물들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플라톤(Platon)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