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자 (삼하 6:1-19)
본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그 보좌 위에 좌정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쏟아 우리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경배 받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의 종교적인 놀이요, 하나님을 더욱 아프게 하는 망령된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이지, 예배당을 다녀가는 것이 아니며, 친한 친구들이나 만나러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고리덴 붐’이라는 여성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앙인입니다. 그 할머니가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 시절에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답니다. 예배당 문을 걷어차면서 두 명의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총부리를 겨누고 흔들면서 두 군인은 소리쳤습니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 내로 예배당에서 나가라. 예배당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여 버린다.” 이것이 실제의 사건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제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5분의 시간만 남은 것입니다.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할 것이냐, 아니면 일어나서 나가야 하느냐 참으로 긴박한 순간입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으면 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시계를 바라보던 군인들은 소리쳤습니다.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 남아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다 거룩한 표정이었고, 주님을 예배하는 중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이었습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크리스천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자, 계속하여 우리 주님께 함께 예배드리십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놀라셨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읽고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우리와 같은 크리스천이요, 신실한 형제들이었으니 다행이었지, 정말로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박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면 어쩔 것입니까? 우리들 시대에 또 우리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결단할 것입니까?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평안하게 하려고 합니다. 예배당에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니면 나갈 것이냐고 묻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한 것은 우리 영주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함께 죽을 각오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지금 죽어도 이 자리에서 예배드린다는 감사와 감격 속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할렐루야!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그의 목적, 그리고 그의 즐거움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예배인데,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한 우리의 잔치가 되고 있습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 오랫동안 드려온 예배, 참으로 자연스럽고, 순서에 익숙해지고 보니, 예배의 감동과 감격은 사라지고, 습관에 젖은 또 한번의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잘 준비해야 하고, 정성을 다하여야겠습니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구원자, 나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면서 이번의 예배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것이며, 최선을 다한 예배였다고 간증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 법궤를 옮겨오는 사건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사건의 주인공은 다윗도 아니요, 오벧에돔이나 아미나답의 두 아들이나 다윗의 부인 미갈도 아니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남북을 통일하고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여부스족속이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천연적인 요새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조성된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요압이란 장군을 시켜 그곳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하고, 다윗이 출전하여 시온산성을 빼앗고, 다윗성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되면서 블레셋과의 한판 전쟁을 치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다윗이 왕이 되어 이후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 전에 일찌감치 다윗 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전쟁이라고 하면 수없는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왕이 된 것은 나라를 안정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 국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믿도록 본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알레유다라는 곳의 아미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성막에 모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 개인의 집에 모시게 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법궤가 아미나답의 집에 오게 된 것은 사사시대의 말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에 엘리 제사장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로 하여금 법궤를 모시고 전쟁에 참가하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하도 치열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겠다는 생각으로 법궤를 모시고 출전하였는데, 전쟁은 패하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간 도시마다 독종이 퍼지고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수레에 실어 벳세메스라는 동리로 보내온 것입니다.
벳세메스에 법궤가 도착하였는데, 사람들이 법궤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면서 수레를 끌어온 소를 잡고, 수레를 장작으로 패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법궤를 구경하기 위하여 몰려왔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법궤 뚜껑을 여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시므로 그 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온 법궤를 무서워하여 바알레유다 곧 기럇여아림의 사람들에게 기별하여 법궤를 모셔가라고 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법궤를 가져다가 아미나답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그 집에 아주 오랫동안 지나게 되었습니다. 구약주경학자들이 연대를 계산하기를 법궤가 아미나답의 집에 있었던 기간은 무려 70년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제사장으로 일할 때에 벌써 2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다시 이어 사울 왕의 40년간 통치를 보내고, 다윗의 시대에 이르렀으니, 무려 7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사시대의 말기 아벡 전투에서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을 정복하기까지 약70년 동안 아미나답의 집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자,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자기를 위하여 두로에서 백향목을 가져다가 왕궁을 지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고, 왕권도 확립하고, 예루살렘이 행정적인 수도만 아니라, 전 국민적으로 인정받는 진정한 수도가 되게 하려면 종교적인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를 모시는 장막을 준비하고, 법궤를 모셔오는 국가적인 대행사를 계획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일개 목동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주셨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하시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법궤를 모신 중앙성소를 예루살렘에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배를 받으시는 곳이며,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속죄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지성소에 두는 법궤 뚜껑인 속죄소에 나타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법궤는 증거궤, 언약궤, 궤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데, 조각목이라는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금으로 씌웠습니다.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와 높이는 한 규빗 반이었습니다. 여기서 규빗이라고 하면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를 가리키는데, 45.6cm였습니다. 길이가 114cm, 너비와 높이가 68.4cm였습니다. 이 법궤를 증거궤, 언약궤라고 부르는 것은 이 안에 모세가 받은 율법의 두 돌판을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를 넣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어두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그리고 길지 않은 지팡이로 보여 집니다.
이 법궤의 뚜껑은 법궤와 같은 길이와 너비로 만드는데, 뚜껑의 좌우에 하나님의 영물인 그룹이 양 날개를 펴고 뚜껑을 덮고 있는데, 바로 그 날개 아래를 속죄소,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자리요,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3만의 군인을 소집하였습니다. 국가적인 행사에 혹시라도 블레셋이 훼방하거나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골고루 선발하여 법궤를 모셔오는 거국적인 행사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 있었지, 법궤를 어떻게 운반하는지, 몰랐으며, 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선생들에게 묻지 않고, 새수레를 준비하였습니다. 다윗은 새수레에 법궤를 싣고 아미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법궤는 원래 제사장들이 메었고,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들이 메어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이 속한 족속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왜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데 신중하지 못하고,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군인들을 소집하면서 천부장이나 백부장 같은 군 장교들과 의논하여 신속하게 운반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새 수레를 만들어 벳세메스로 보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법궤를 모시려면 헌 수레보다는 새수레가 좋을 것이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고 명하신 규례가 아니라, 이방인의 관습에 따르는 것이요, 아주 간편하고 별로 수고할 것이 없는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안일한 생각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미나답의 집에서는 정신차리고 법궤에 대한 자세한 규례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두 아들 웃사와 아효라는 사람이 법궤를 운반하는 책임을 지고 아효는 앞에서 소를 끌고 갔으며, 웃사는 수레에 법궤를 싣고 그 옆에 올라타고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법궤를 운반하는 일행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었습니다. 목이 타고, 배고픈 마당에 곡식을 추수하는 풋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 것 같습니다. 소들이 이리저리 뛰는 바람에 수레 위에 있는 법궤가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이 때 웃사가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인하여 진노하시고, 그를 그곳에서 치므로 죽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는 거국적인 행사인데,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죽이시므로, 더 이상 행사를 강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웃사를 치신 곳’이라는 뜻인데, 다윗은 몹시 섭섭한 듯합니다. 자기의 열심과 열정은 무시하시고 웃사를 치시므로 죽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온다는 것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다윗도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이라는 레위인의 집에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시 아미나답을 집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요, 한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어떻게 다시 법궤를 받아들일 것입니까?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은 가드림몬 사람이었는데, 레위지파였습니다. 그래서 가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집안이었습니다. 이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하나님은 오벧에돔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오벧에돔이란 사람은 레위인으로 나중에 성전 문지기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8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모든 아들들이 가문을 다스리고 있었고, 큰 용사였으며, 능력이 있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를 잘 감당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오벧에돔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자손들이 모두다 62명이었는데, 다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두다 오벧에돔이 그의 집에 법궤를 잘 모신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사람 오벧에돔은 그의 자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모실 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웃사가 죽은 것을 교훈삼아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고 법궤가 자기 집에 들어온 것을 감사하면서 감격스럽게 모시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소문을 들어보니 법궤를 모시고 있는 오벧에돔의 집안이 잘 되고, 소유에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다윗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잘 모시면 그렇게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래의 계획대로 예루살렘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운반할 때는 레위지파의 고핫사람들이 메거나 제사장들이 메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궤는 싣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메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쉬운 방법이 아니라, 굳은살이 생기고, 멍이 들어도 어깨에 메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당신을 배우려고 하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멍에를 메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안전하게 갔을 때에 다윗은 이제는 되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베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면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왔습니다.
다윗은 이 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을 축복하고,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을 나누어 주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다윗이 준비한 장막 가운데 준비된 자리에 두었습니다.
이때에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면서 백성들과 어울려 뛰놀고 있는 왕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사울의 딸이요, 다윗의 부인이 된 미갈이라는 여자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면서 “방탕한 자가 예의도 모르고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천한 계집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었다.”고 책망하고 나무랍니다. 하나님은 이 여자 미갈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법궤를 운반하는 사건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미나답의 집안은 법궤를 모신 것이 아니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쉬운 방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보아온 법궤, 습관에 젖어 타성에 젖은 친숙한 법궤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여도 우리는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그의 일을 할 때에 진정한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그의 뜻대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미갈이란 여성도 아미나답의 집안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제3자적인 자세, 구경꾼, 관람객이지, 은혜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왕족이요, 공주였으며, 다윗을 향하여 너는 일개 목동출신이라고 비난하고, 교만하여 무시하다보니 은혜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자하였습니다.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은 법궤 모시는 것을 감사함으로 감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모신 집이라고 하면 자기 집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생 감격 속에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단 하루를 모실 수 있어도 성전인데, 3개월이나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특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역사상에 단 한번 있을 사건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감격이었습니다.
다윗의 신앙도 매우 인간답지만 그래도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순수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법궤를 사모하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이 빼앗는다.”는 말씀처럼 사모하였습니다. 좀 더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었습니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 속에 있는 것을 보면서 언제나 죄송한 마음이 들어 후에는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가 법궤를 모시고 오는 데 억지가 아닌 감격 속에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가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왕이 되어서 옷이 벗어지는 줄로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들과 유리되지 않고 동일시하였습니다. 자기를 열고, 오픈하였습니다. 자기의 약점도 자기의 허물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방문하는 신앙보다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나라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심령, 내 가정, 내 안에 모시고 사는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절대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스스로 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의 제1문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령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기쁨은 구원받은 확신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은혜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어야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영력을 더해주시고, 하나님과 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시들어가던 우리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싶고, 복음 전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어떤 심정으로 감당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양 어깨에 멍에를 메고, 여러분의 등에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멍에를 메지 않고는 주님을 배울 수 없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내가 먼 멍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지고 가시는 것이요, 십자가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순종하십시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라고 하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모든 것이 찬송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패하였어도 상관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영성의 사람도 실수하고, 잘못하였어도 어디에서 믿음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고, 심기일전하여 일어서면 됩니다. 지금까지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어도 이제부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감사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