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날의 기쁨 (스 2:64~67, 행 1:6~8)
본문
광복 61주년을 맞이합니다. 일제 강점 시기에 많은 설움과 고통을 받았지만 36년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민국을 다시 찾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총과 회복의 날이 광복절입니다. 당시에 광복을 맞이한 분들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상상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 얼싸안았을 것이고, 마음대로 활보할 수도 없었던 길을 마음껏 달렸을 것이고, 빛을 보지도 못했던 태극기가 길거리에서 빛을 보게 되었고, 숨어서 부르던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을 것입니다.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나신 저의 장인은 정말 곁에서 보면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아쉬워하고, 밴쿠버에서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은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성도는 처음 봤다”고 할 만큼 참 성도로 사신 분입니다. 성경 QT를 세상 떠나기 전까지 하셔서 다 기록해 두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짐을 정리해드리다 보니 옛날 것들을 얼마나 꼼꼼히 정리해 두셨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옛날 일제 강점 시기에 일본에서 공부하셨는데 그 때 일본에서 보험을 드신 증서가 있었습니다. 아마 1940년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증서에 함자를 김자, 홍자, 수자를 쓰셨는데 성씨를 ‘김’(金)인데 ‘김궁’(金宮)으로 바꾸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개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자 다음에 삽입부호를 그리고 ‘궁’자를 넣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강제로 넣은 것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개명을 하지 않으면 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된 후에 일본식 성씨 ‘김궁’을 다시 ‘김’으로 회복한 것은 물론입니다. 당시에는 내 성씨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것만 가지고도 감격이 컸을 것입니다. 그 외에 다시 찾아 기쁨을 누렸던 것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다시 얻은 날은 말로 할 수 없이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날의 기쁨은 그들 개인이 누리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은 그들로 하여금 잃었던 하나님의 성을 다시 찾는 기쁨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기쁨을 역사적으로 보세요.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와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온 출애굽의 기쁨이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앞세워 가지고 갔던 법궤가 112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법궤를 다시 성전에 옮기는 순간 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지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1900년 동안 국토 없이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오니즘을 제창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기쁨은 비길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찾는 백성들의 기쁨은 어떤 기쁨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찾는 기쁨은 어두움 속에서 다시 빛을 찾은 광복의 기쁨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권을 찾은 것은 나라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아무리 선조들이 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주권을 빼앗기면 우리 땅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전쟁 때의 서울 수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고 피난길에 올랐다가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정부가 돌아오고, 가정이 돌아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속하다’, ‘되찾다’는 말은 ‘건지다’, ‘도로 사다’, ‘회복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를 구할 경우에 ‘표를 얻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된 것은 입장권을 얻은 것입니다. 들어갈 수 있는 표를 얻은 것입니다. 명절에 고향 가는 기차표를 얻은 것입니다. 아파트 딱지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 내 것이 되었고 내 것에 대한 당당한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 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당당히 살지 못했는데 이제는 권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독립이며 해방입니다.
코카콜라의 시장 점유율이 수십 년 동안 감소세를 이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60%를 차지하던 시장 점유율이 1983년에는 24%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눈을 가린 채 시음 행사를 하였습니다. 눈을 가린 채 마시고 어느 콜라가 맛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코카콜라의 주력 상품보다 펩시콜라가 많이 팔리는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코카콜라는 시장 회복을 위해 새로운 방안으로 제품의 종류를 확대하였습니다. 다이어트 코크, 무 카페인 코크, 체리 코크 등을 차례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는 1985년에 주력 상품을 철수하고 대신 덜 달고 덜 복잡한 새로운 코크로 대체한 것입니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옛 코카콜라는 사라졌다가 얼마 후에 새로운 ‘코카콜라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방송이 속보로 전할만큼 미국 시장에서는 대단한 뉴스거리였습니다. 새 것이 아니라 옛 것을 되찾는 기쁨이 있습니다. 새 것에 대하여는 냉담하지만 옛 것을 회복하는데 대한 기대감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훗날의 새 예루살렘을 기대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예루살렘을 얻는 기쁨도 우리에게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기쁨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다시 얻은 광복의 기쁨을 맛보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다시 찾아야 하는 삶의 중심입니다.
예루살렘은 삶의 중심입니다. 왜 삶의 중심입니까?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성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다윗의 성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히 그들의 성지로 여기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가장 성스러운 성지입니다. 예루살렘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도성입니다. 그런데 한번 가보세요. 전혀 거룩하지 않아요.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장사꾼들이 우글거리고, 지금도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얼룩진 곳입니다. 그래도 거룩한 도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삶의 중심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리게 하였던 모리아입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이 왕조를 도읍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중심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의 입성과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시온 영광이 빛나는 곳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라는 말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예루살렘은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시편 122:6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사람을 형통하게 하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도시 그 자체가 복이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는 갈릴리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말기는 예루살렘 중심이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를 보세요. 사도행전 1:4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8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복음의 중심입니다. 교회의 중심입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1900년의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나라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1948년 5월 14일에 국가로 건립되었습니다. 유대인인 로스 차일드가 있습니다. 후손인 이 집안은 지금도 금융계의 황제입니다. 이 가문은 수에즈운하를 샀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대표적인 시오니스트였습니다. 이런 시오니즘을 주창하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국가를 다시 세웠습니다. 잃었던 땅과 주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는 “남자는 자기가 잃어버린 갈비뼈를 되찾고 여자는 자기가 태어난 남자의 가슴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 힘이 서로 당겨서 남녀가 맺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되찾고 되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은 사랑하게 하고, 하나로 맺어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국토는 마치 어머니 같습니다. 어머니의 가슴 같습니다. 어머니의 배 같습니다. 아마 우리의 잃었던 땅도 잃어버린 자녀를 간절하게 찾았을 것입니다. “내 땅에 왜 남이 와 짓밟고 살지?”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하는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가꾸어야 할 우리의 땅입니다. 지금도 세계에는 국토 없는 민족이 있습니다. 국가의 삼대 요소가 있습니다. 주권과, 국토와, 국민입니다. 그런데 민족은 있지만 국토가 없고, 주권이 없는 민족이 있습니다. 터키와 이라크에 분포되어 사는 쿠르드족이 그렇습니다. 국토와 주권이 없다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우리가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주권을 되찾고, 국토를 다시 회복하고, 국민이 다시 모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입니까? 탐스런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보다 아름답고 복 있는 나라입니다. 외국과 비교해볼 때에 우리나라만큼 좋은 나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심성만 좋으면 더 좋을 것입니다. 자연을 보존만 잘 하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 해수욕장 보니 아직도 멀었습디다. 해수욕장에 낮에는 물 반, 사람 반이고, 밤만 되면 광란이고, 아침이면 모래 반, 쓰레기 반입니다. 이걸 고쳐야 선진국이고, 아름다운 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은 정말 좋은 도시입니다. 도시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습니다. 앞에는 강이 흐릅니다. 도심지에 있는 강 가운데 서울의 한강만큼 크고 괜찮은 강도 흔치 않습니다. 풍수지리를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벌써 보면 아름답고 멋있지 않습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북한산과 인수봉이 너무 아름다워 탐이 나서 그랬답니다.
우리의 대한민국, 우리의 서울은 잘 지켜야 하는 우리의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나라를 절대 빼앗기면 안 됩니다. 요즘 ‘작전통제권’ 환수가 정치적 이슈입니다. 주권국가로서 자주국방을 하자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가 북한과 군사력을 비교해볼 때에 미국의 도움 없이 작전이 가능하고 이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밉다고 하더라도 과연 ‘작통권’을 환수하고 미국이 손을 땐 상태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실리를 따져봐야 합니다. 어렵게 지켜온 주권과 국토를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과 ‘자주’라는 명분만을 가지고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분단만 되지 않았다면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작통권’을 환수하고 주권을 잃고 사는 것은 결코 우리가 지금까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은 누구나 통일을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통일입니다. 민주통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나라입니다. 아무렇게나 통일하자는 것은 무서운 발상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을 빼앗기지 말고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날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시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회중이 42,360명이었습니다. 남종과 여종이 7,337명이었습니다. 노래하는 자가 200명이었습니다. 그 외에 말, 노새, 낙타, 나귀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날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돌아오는 자 가운데 노래하는 자가 왜 필요할까요? 백성들의 기쁨을 노래하기 위하여 노래하는 자가 함께 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를 다시 찾는 비유가 나옵니다. 양을 도로 찾고, 동전을 도로 찾고, 잃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는 한결같이 기뻐한다고 합니다. 다시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것은 기쁨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명기 4:27에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다 흩어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4:30에는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라고 합니다.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데이비드 코트렐의 책 ‘성경에서 배우는 크리스천 리더십’에는 방해를 받는 비효율적인 회의는 시간을 낭비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생산성 떨어뜨리는 주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방해하여 빼앗긴 시간을 회복하는 데는 그 시간의 세 배를 소요하게 됩니다. 방해받지 않은 20분은 방해받은 60분 보다 더 생산적입니다. 일제 강압 기간 동안 방해받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우리 경제, 문화는 세 배는 더 빨리 성장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고 전쟁만 없었다면 세 배는 더 성장했을 것입니다. 일제 강압, 분단과 전쟁, 이산과 실향, 이 모든 것은 국가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요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독립,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디다고 하더라도 해방된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요덕스토리’라는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함경도의 요덕 수용소의 실상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극중에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하여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남녘에만 마시고 공화국에도 임하여 주소서”. 이 노래가 여러 번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가슴이 멥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남녘에 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이 곳 대한민국에 임해야 합니다. 물론 북녘에도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더디지 않습니까? 북한도 속히 자유와 평화를 되찾아 우리 민족의 기쁨이 충만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다시 찾아야 합니다. 복음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얼마 전 ‘인터콥’이라는 선교단체가 ‘아프가니스탄 2006 평화행사’를 한다고 1,500명이 집회를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하였다가 다시 철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선교단체는 특히 중동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하는 단체입니다. 이번 행사에서도 평화집회, 운동회, 문화스포츠 행사등을 하려고 하였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Back to Jerusalem)이라는 구호를 항상 가장 앞세웁니다.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이 주님께로 돌아오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하신 시간 가운데서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입니다.
히틀러는 암살을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그는 어느 점성가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점성가는 “당신은 축제일에 암살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히틀러는 친위대 사령관을 불러 유대인의 축제일에는 경비를 보통 때의 열배, 아니 50배로 철저히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때 점성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암살되는 날이 바로 유대인의 축제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히틀러의 죽음은 유대인의 기쁨입니다. 히틀러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독립이며, 해방이며, 기쁨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일본의 패방이 우리의 회복이며, 해방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국이 다시 복음으로 회복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의 기대는 다시 복음을 꽃피울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결론
학교에서 음주예방 포스트를 그리라고 했더니 어떤 아이가 이렇게 그렸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옆집”. 어쩜 자기 집도 못 찾습니까?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가정, 자기 직장, 자기 소명을 찾아야지요. 하나님은 잃은 것을 다시 찾게 하시는 회복과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고 일어나니 옆집”은 안 합니다. 회복하시는 하나님은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내 집”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묵상’에서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되찾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욥이 고백한 대로 빼앗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회복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나라의 운명도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평화운동 지도자였던 머스티(A. J. Muste)는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 자체가 길이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찾는 것은 그 자체가 평화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 자체가 평화의 도시입니다. 나라의 해방과 독립은 그 자체가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해방도 그 자체로 평화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은 기쁨이 평화를 위한 일이 되고, 해방의 기쁨이 평화가 되고, 평화를 이 땅에 선포하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