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문이 열린 곳에서 (창 28:10~22)
본문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창25:22)고 증거 합니다. 열 달이 지나서 쌍둥이 두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5-26) 야곱은 복중 전쟁에서 패하고 에서가 장자로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쉽게 물러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격렬하게 몸싸움을 했습니다. 자기를 뿌리치고 나가는 에서의 발꿈치를 꽉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참 유별나게 태어났지요. 다들 안 나가려고 움츠리고 “먼저 가시죠 형님, 아니 아우 먼저” 이렇게 양보하다가 시간차를 두고 출생 하는 게 일반적인 쌍둥이 형제 아닙니까?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먼저 태어나려고 싸움을 하면서 아우가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혈육적으로 형제였지만 허물기 어려운 장벽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린시절을 한번 돌아볼까요? 태어나는 순간 에서는 장자라서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도 에서를 향해 말합니다. “아유, 이 아이가 에서군요. 조부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아이죠? 역시 할아버지를 닮아 늠름하게 생겼군요.” “맞아요, 척 봐도 보통아이가 아니란 걸 금방 알겠군요.”
간발의 차이로 장자가 되지 못한 야곱은 면전에서 수없는 서러움을 당하며 자랐을 겁니다.
사실 당시의 장자권은 가부장적인 사회에 있어서 상당한 특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씨족의 족장을 이을 후계자였습니다. 그 가계의 사법, 입법, 행정권이 모두 그에게 주어지는 절대 권력을 소유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어머니에게 같은 날 태어나고도 당하는 차별대우와 불이익은 그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비교의식과 반복되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경쟁심으로 충만한 잘못된 성격의 소유자로 변해 갔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이런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두고 보자. 나는 형 에서 보다 성공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해 주고 말 것이다.” 에서는 제멋대로의 기질을 갖고 있어서 사냥을 좋아하고 결혼도 자기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은 야성적 기질이 가부장으로 적합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아꼈고 온순하고 조용하여 늘 어머니 곁에 맴도는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팥죽도 잘 끓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리브가의 맘 한켠에는 산고를 겪을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차자인 야곱을 더욱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겉은 온순하나 마음엔 불덩이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사회 제도의 순리에는 관심이 없고 어찌하면 장자로서의 권리를 내가 차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순서 때문에 이런 불이익을 받는 것은 모순이야 참을 수가 없어...” 그의 생각은 언제나 장자권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장자권만 내 것이 된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결과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 시킬 거야. 내가 장자가 되면 모든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줄 거야”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창25:29-30)
자아가 깨어진 신앙인 야곱이라면 “형님, 사냥하느라 많이 시장한 것 같소? 내가 팥죽을 끊이고 있으니 잠시 쉬며 기다리시오. 내가 한 그릇 크게 쏘겠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곤란에 처한 형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눈을 번득였습니다.
얼마나 흥분 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그의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상대의 작은 약점은 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아낌없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것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가진 것을 이용해서 일평생 목적인 장자권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는 흥정을 시작합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25:31-34)
인간적인 야곱. 깨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팥죽을 먹는 형을 얼마나 조소했을까요? 떡도 줍니다. 떡은 자신에게 속아준 보너스 입니다.
세상의 것이 인생의 전부인 자연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는 마치 짐승 같습니다. 어디 사람 냄새가 납니까?
도둑질이나 살인은 죄 인줄 알지만 이런 물욕과 세상자랑에 사로 잡혀 사는 인생은 속으로 죽음의 병이든 사람 같습니다. 치료가 더 어렵습니다. 드러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직분도 가지고 오랜 신앙의 경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령은 아직 깨어지지 않은 자연인이요 짐승 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에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얼마나 동물적입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고분고분하면 그를 함부로 대하진 않습니까? 빚이라도 졌다면 그들에게 교만하게 군림하진 않습니까? 약점을 잡고 있습니까? 그래서 때를 기다립니까? 누군가 당신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것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당신은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약점과 실수 앞에 얼마나 재빠르게 행동하십니까? 한 치의 틈도 없이 예리한 발톱과 사나운 이빨을 들이 대지 않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우리의 본능은 사자나 호랑이 보다 더 빠릅니다. 집요하기는 더러운 하이에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냄새만 나면 몰려들어 치명타를 날리려고 얼마나 빈틈없이 준비합니까?
이런 삶이 깨어지지 않은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과 기쁨이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어떤 때는 거룩해 보이도록 위장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마음에는 자신의 목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심 외엔 그 마음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진심으로 그 뜻을 구하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까봐 가급적 멀리 피합니다.
그들의 삶은 분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이익이 되는 것은 기회를 포착하여 얻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사방팔방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 세상 욕심이란 것이 굉장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 아니면 친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 속내는 알 수 없습니다. 물질 앞에 부모자식이 다투고 형제가 원수가 되고 부부도 남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겉보기엔 다른 문제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돈과 권력이 우리의 싸움의 근원입니다.
그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것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 안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 줄도 모릅니다.
거듭나지 않고 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 속에 있어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표시도 잘나지 않고 세상 가치에 물들어 어떻게 보면 그것이 잘사는 방식 같아서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인을 구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죄짓지 않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는 그런 사람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오십니다. 차라리 고통스러워 울며 하나님을 갈구하는 영혼을 원하십니다.
결국 야곱은 아버지 이삭까지 속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은 본성은 그것을 취할 때까지 끝없이 덤빕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맘속에 있는 욕심은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습니다. 채워도 끝이 없는 갈증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4)는 얘기를 들은 리브가는 야곱과 함께 남편을 속입니다. 야곱을 에서인척 하여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곱이 대신 받게 합니다. 팔에 염소의 털로 위장까지 하여 완벽하게 속이고 에서가 받을 축복의 기도를 받아냅니다. 이것을 뒤늦게 안 에서는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질러 가려고 하다가 큰 낭패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시14:24)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믿지 않고 인간의 계획을 추진합니다. 시기적으로 급박하고 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아버지도 형제도 부부도 없는 것입니다. 동업자만 있습니다. 뜻과 이익이 맞으니 하나가 됩니다. 이기심, 자기중심,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언제나 이기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겉보기엔 친절하고 사람 좋아 보일수가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온유한 사람으로 비춰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를 도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나 교훈 그리고 축복, 종교인이란 명함과 직분에 대한 명예 등을 얻으려고만 하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더욱 헌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자연인들과 구원받아도 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받는 것에 만족하고 관심이 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거부 합니다.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도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외적인 명예와 지위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이렇게 깨어지지 못한 야곱의 삶은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이라는 밧단 아람을 향해 도망을 갑니다. 형 에서의 살기등등한 분노에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갑니다. 야곱은 돈과 명예, 성공을 쫒아가다가 자기 복 만을 위해 전심전력하다가 부모형제를 떠나 외로운 나그네 길을 떠나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자연인인 야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이 기회를 오히려 연단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를 은혜 베푸실 기회로 삼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고난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회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베푸실 기회입니다. 그는 이제 회심과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정금같이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은 그를 단련하실 것 입니다. 야곱의 인생 여정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집을 떠나 4,50킬로미터를 걸어 도착한 곳이 루스, 벧엘 이라는 곳입니다. 야곱은 이곳에서 밤을 맞습니다.
그는 여기서 일생에 처음으로 좌절을 맛봅니다. 죄인이라는 생각을 한전도 해본 적이 없던 그가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죄의 두려움이 약대 한 마리 끌고 오지 못할 정도로 급히 이 광야로 그를 몰아냈습니다.
자기는 스스로 명예와 부를 가지고 다스리고 사람들을 호령하는 삶을 원했지만 이제는 정처 없이 광야를 홀홀 단신으로 지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그는 루스성에 들어가지 않고 춥고 배고픈 몸을 들판에 누입니다. 그의 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휴...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들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익숙한 환경이 아닙니다. 춥고 위험한 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잘 수 가 없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부모를 떠난 외로움과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두고 온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간절했을 것 입니다. 늘 그의 가정을 지켜 주시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새삼 그리워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외롭고 두렵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깜박 잠이 든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바라본 사닥다리는 땅에서 하늘 문까지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야곱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은 나의 집에만 계신분이 아니고 머나먼 이곳까지 계시는 분이란 겁니다.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사닥다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죠.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무소부재하심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현재 야곱의 삶은 어떠합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 앞뒤좌우의 문들이 모두 막히고 난 다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사닥다리가 내려왔습니다. 인간의 계획, 인간의 방법이 끊어진 자리에 비로소 하늘의 사닥다리가 내려왔습니다. 내가 놓으려던 욕심의 다리와 세상의 모든 다리가 끊어졌을 때 비로소 하늘의 다리가 그에게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비로소 들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의 위로가 다 끊어진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로소 그는 깨어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3절 이하의 약속의 말씀을 야곱에게 주십니다. 어떤 때 만나주시고 어디에 찾아오실까요? 하늘문은 어디에 열릴까요?
힘들고 어려울 때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선하고 의롭고 점 없고 흠이 없어야 만나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만날 생각이 없는 것 입니다.
언제 우리가 의롭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사람이 되겠는가?
한 십년 산에 들어가 금식도하고 기도하면 될까요?
모세처럼 광야에서 수양하고 수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다들 하산하여 대나무 하나 꽂던데요? 자기가 하나님 되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 있던가요? 귀신을 믿던 하나님을 믿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가 높아져 귀신이나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곳은 언제나 문제가 있는 곳 입니다. 실패한 자리에 주님이 오시고 낭패한 자리에 주님은 오십니다. 나의 길이 캄캄하고 막막할 때 주님은 나의 등불로 나의 힘으로 능력으로 찾아와 주십니다. 나를 그곳에서 만나 주십니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기독교의 하나님은 내가 흠이 없어야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좌절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릴 때 나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때 주님은 나를 찾아오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이 지켜 주시네
겁내지 마라 두려워 마라 주님 너를 지켜 주시리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너를 지켜 주시네
이 세상 험한 풍파 몰아 칠 때도 주님 너를 지켜 주시네
주님은 나의 소망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
우리는 야곱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척했지만 이 땅의 복을 사랑하고 이 땅의 것들을 더 원하던 사람입니다. 학교 직장 물질 안락함 명예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이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까? 세상 사람의 바램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의 사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진정한 삶의 목적은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멀리, 내 맘대로의 신앙의 길을 걸어 다닐 때, 세상 바라보고 세상을 사랑하다 이제 절망과 허무함으로 걸어가는 그 길에 주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하늘 문이 열린 것 입니다. 그리고 홀로된 고독한 야곱, 두려워하고 절망한 야곱을 향해,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행복, 인간 최고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놀랍게 야곱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무너진 야곱의 마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다시 언약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보호하겠다. 다시 너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을 다시 야곱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야망밖에 없던 야곱에게, 꿈이 없던 그에게 하나님은 꿈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물질이나 부요함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 즉 꿈과 비전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분이 나의 기업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꿈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땅에 닿은 사닥다리가 거듭나면서 고백했던 예수님인줄 믿습니다. 이 땅과 하늘을 잇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그분은 구원의 사닥다리이면서, 모든 것을 은혜로 풍성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오직 그 분을 통하여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 갈수가 있습니다. 야곱이 쌓던 인간의 사닥다리, 땅에 있는 사닥다리로는 위로 올라 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다시 떨어지고 맙니다. 바벨탑처럼 무너질 뿐입니다.
야곱에게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리고 천사가 왕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야곱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 됨 같이 야곱도 하나님의 자녀로 이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계속 자라갈 것입니다. 그는 20년 후 얍복강에서 완전히 깨어질 때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영적아이는 자라가야 합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완전히 우리가 깨어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말씀과 기도와 훈련을 멈추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최학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