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我城) 무너뜨리기
본문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반드시 맞다. 고는 하지 않지만 우리 교역자들에게 경종을 주는 그런 대목을 소개한다.
청중들에게 모두 일어서서 눈을 감으세요. 그러고 나서 자신이 북쪽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오른 팔을 들어 가르치라고 하였다.
동서남북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북쪽이라고 생각된 곳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른 팔을 든 채 눈만 뜨라고 하였다. 자신이 북쪽이라고 생각하던 곳과 다른 사람들이 북쪽이라고 가르친 곳을 보라고 할 때 북쪽은 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가르친 곳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자신이 북쪽이라고 확신한 자들은 또 오른 팔로 가르치며 눈을 뜨라고 하였다. 역시 모두가 다 처음에 자신들이 북쪽이라고 생각한 곳을 가르치자 이것을 본 리더는 나침판으로 북쪽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성경공부를 하였고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간 목회를 하며 성경을 연구하여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속의 은혜를 받아 소명의식으로 말미암아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절대로 믿는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성경을 믿고 연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 귀한 진리를 내 어리석은 생각에 가두어두고 내 방식으로 예수를 믿는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그 아집을 깨는 것은 진리를 벗어난 것처럼 큰 일 나는 줄로 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진리의 사수하는 것으로 믿어 아집을 영 깨지 못하고 만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는 것은 성경에는 우맹이라고 한다. 자기의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평생 깨어지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신학교 때 배운 성경지식, 전도사 때 보는 성경 관 목사 때 성경을 수십 년 동안의 성경 연구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라고 한 진리는 변할 리는 없지만 그러나 그 수준은 날로 진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아성을 여리고성처럼 무너뜨리고 아집(我執)이 깨어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하다.
사람이 죽을 고비 당하고서야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자신의 아집을 포기한 것처럼 낮아질 수 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을 때 허리를 굽힐 수 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재산 그리고 자녀를 다 잃고 건강마저 잃고서 이렇게 말한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미안하지만 이것은 아성이 깨어진 것이라고 하기보다 반복된 훈련이다. 수 없이 낮아지려고 하던 믿음의 수고가 일시적으로 이루진 훈련이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그것도 무화과뭉치로 어떻게 그 죽을병을 고쳤는지…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그리고 지구가 역회전 하여 아하스의 해시계가 10도나 물러가는 증상이 일어나고 그 생명이 15년이나 연장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부활을 체험하였다. 이 정도의 체험을 한 것이라고 하면 우리 생각에도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히스기야도 절대 하나님주의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다 깨어진 줄로 알았다.
그런데 바벨론 사신들이 방문할 때 그 깨어지지 못한 그 마음의 아성이 드러났다. 그 마음의 상태가 교만하여 각종 보물을 다 보여주었다.
그 일로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하기를 하나님께서 왕의 교만한 마음을 보시고 왕이 보여준 왕궁의 보물과 성전의 모든 보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며 왕의 자손은 내시로 잡혀가리라. 하였다.
이것은 마음에 아성이 무너지지 않고 인간의 완악함이 깨어지지 않았다. 는 책망의 말씀이다.
(왕하20:17-18)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어느 부모가 15년 더 살겠다고 아들과 자손들이 원수의 나라에 나라를 잃게 되고 부모가 보는 눈앞에서 자식이 적의 칼에 맞아 붉은 피를 분수대처럼 뿜어 대며 땅바닥에서 펄펄 뛰다 죽어가는 시신을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기를 원하겠는가? 그것도 모자라서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이역만리 원수의 나라로 끌려가며 그나마 다행히 산 자손들은 환관으로 보내기를 원하겠는가?
부모가 이러고도 15년을 더 산 것을 자기의 생각에 도취되어 간증하며 지구가 역회적 하였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마음은 항상 자녀들이 힘들어 할 때 대신 살기도 하고 자식들이 죽어갈 때 대신 죽고 싶은 것인데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한 것으로 받아드렸다고 하면 차라리 이삭처럼 말씀대로 죽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삭처럼 죽지 않고 살아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살고픈 아성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병 낫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사건을 기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말씀이 의도한 바 그 핵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볼 때 자기의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병이 치료되어 마음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하는 말씀을 듣고서야 깨어지게 된다.
(사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 회개의 열매는 후일 성전 기물이 바벨론에 잘 보관 되었다가 포로에서 귀환할 때 하나님께서 되돌려 주신 것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죽을병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그 사건에 흥분하지 말라. 아니 세상에 절대 의지한 것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우리의 아집이 깨어진 것으로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성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적을 체험하여 겸손해졌다고 믿었다가는 목회자의 발등을 깨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아성이 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들을 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병이나 사고 아니면 실패로 마음이 여릴 때 하나님께서 주신 필요한 말씀이요. 합당한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그 마음에 잘 박힌 못처럼 박힘으로 말미암아 그 아집이 깨어지게 될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도 바위가 갈라지고 천지가 진동하는 역사에도 부수어지지 않던 그 마음이 세미한 음성으로 물처럼 녹아져 흐르고 말았고 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역자들에게 불같은 말씀, 반석을 부숴버리는 방망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줄로 믿는다.
이 말씀으로 가시와 엉컹귀와 같이 헝클어진 마음, 반석과 같이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이 태워지고 깨뜨려지도록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일에 전무하여 전할 때 여리고성과 같은 고집과 본성의 아성이 무너지리라 믿는다.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황등성심교회 박용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