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 (렘 5:1)
본문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넒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할렐루야!
신문에서 사람 찾는 광고를 봤습니다. 사람을 찾는 광고 중에는 집나간 사람을 찾는 광고도 있고, 돈 떼먹고 도망친 사람을 수배하는 광고도 있습니다. 중국집에 가도 벽에 수배자 사진이 쭉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찾는 제일 많은 광고는 신입사원 모집, 경력사원 모집, 즉 구인광고가 제일 많습니다.
거기에는 자격이 있습니다. 나이, 학력, 외국어 등을 묻습니다. 이런 것이 자격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외국어를 얼마나 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7개 국어는 그냥 합니다.’ 하는 만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물어봤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일본말로 “아리까리”, 인도말로 “알간디 모르간디”, 프랑스말로 “알송달송”, 독일말로 “애매모흐”, 중국말로 “갸우뚱”, 러시아말로 “모르노스키”, 이렇게 하면 7개 국어는 그냥 하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물론 나이 제한도 없고 학력 제한도 없이 사람을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린 그런 자격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중학생도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갑니다. 초등학생도 의무교육이지만 나이가 되고 수업능력이 있어야 학생이 됩니다. 자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자격을 요구합니다.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도울 봉사자 선발의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① 잘 먹고 ② 잘 웃고 ③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
그 자신도 봉사자로서의 자신의 자격에 대해 “I am nothing!”이라고 말합니다.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겁니다.
1979년 노벨상 수상할 때에 “I am nothing!(아엠 낫씽!)” “자신을 비우니까 언제나 누구라도 웃음으로 대할 수 있고 끝까지 일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대합니까?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저 사람 앞에서도 웃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옵소서”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 봉사자의 자격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됩니다. 하다못해 내 것을 남에게 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자격을 갖출 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을 찾으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 역시 자격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구원을 위해서는 10명의 의인을 찾으셨던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은 ‘한 사람’의 자격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자격의 기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오늘 성경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넒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한사람이라도 찾으면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은 정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를 외치를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로 심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정의는 ‘justice’는 ‘올바른 도리’입니다. 마땅히 행할 바른 길을 얘기합니다. 여러분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마땅한 도리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습니다. 한번은 집에서 입던 대로 허술한 옷차림으로 소위 명품관 매장에 갔더니 점원이 ‘,’ 인사는 해놓고 대하는 태도가 ‘빨리 나가세요’ 하는 식으로 물어봐도 대답도 잘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다음날 소위 명품 옷을 화려하게 입고 갔더니 점원의 태도가 달라지더랍니다. 얼마나 친절한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한다든지 이것저것 꺼내면서 입어보라고 권하기도 하더랍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세요?
「 옷이 날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차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집니다. 이것을 사회심리학에서 ‘권위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권위에 대해 복종하려는 법칙으로 행동한다는 겁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도 한 신문기자가 가장 작은 티코를 타고 호텔에 갔더니 문 열어 주는 것은 고사하고 정문 앞에 대지 못하게 해서 화가 났습니다. 다음에 그랜저를 타고 가니까 문도 열어주고 서비스도 많아 ‘왜 차별대우 하냐?고 서비스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요?’라고 신문에 항의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권위의 법칙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기꾼들이 이 법칙을 잘 이용합니다. 그럴듯한 명함을 가지고 다니거나 - 나 판사입니다. 나 변호사입니다. 나 검사입니다. 나 교수입니다. 나 회장입니다. 그리고 번듯하게 옷 차려입고 외제차를 타는 것도 다 권위의 법칙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속게 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권위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 복종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합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려는 의무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권위 앞에 약합니까? 직함입니까? 옷차림입니까? 아니면 좋은 차를 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큰 집에서 사는 사람입니까? 부자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에게 복종 한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과연 하나님의 권위 앞에 어떤 자세를 갖고 있습니까?
오늘 정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진정한 권위자로 믿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만이 내 주인이시고 당신만이 나를 다스리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이런 자세를 가졌느냐는 말입니다.
기드온은 아말렉 군대 미디안 연합군과 싸울 때 300명으로 승리했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13만 5천명이 쳐들어 왔을 때 기드온과 일거 싸우겠다고 한 사람이 3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 너무 많다고 해서 돌려보내니까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만 명도 많다고 하고 물을 먹게 했는데 이것이 시험이었습니다. 엎드려 먹는 사람이 9천 7백 명, 손으로 떠먹은 사람은 3백 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3백 명을 용사로 뽑으셨습니다.
제가 교회학교 다닐 때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손으로 떠먹는 사람은 조심성이 있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13만 5천명의 대군 앞에 9천 7백 명과 3백 명, 어떤 사람이 싸우는 것이 이기겠습니까? 9천 7백 명이나 3백 명이나 다 같습니다. 9천 7백 명도 다른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려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3백 명이라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전쟁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누구냐? 정의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니까 사람들이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기드온은 단호히 말을 합니다. “아니다! 나도 아니고 내 자식들도 아니고 하나님만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이런 사람이 정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십니다.
-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도 하나님의 창조주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인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라고 했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
- 출애굽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시면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메추라기, 전쟁의 승리, 홍해바다를 가르고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천국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심도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정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바른길, 정의는 하나님을 최고의 권위자로 믿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권위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권위에의 복종입니다. 요즘 우리교회의 최고의 권위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이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자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학식이 많다는 것, 이런 사회적인 권위를 가지고 여기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제 세례 대상자되신 분들 문답을 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일찍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께서 만나자고 하시면 약속시간보다 일찍 갈까요? 늦게 갈까요?” 이구동성으로 일찍 간다고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 만가기 전에 리허설도 하고 무슨 대답을 할 것인지, 인사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합니까?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오늘 다들 일찍 오셨네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은 정의를 행하는 자!라고 했는데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여러분 오늘까지는 그냥 넘어 갑시다. 다음주부터는 약속시간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일찍 오셔야지요. 당연히 앞자리부터 나와서 앉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자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아 선지자 당시에 지도자들은 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사상들은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2:8) ②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 나라 관리하라는 정치인들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④ 하나님 말을 전하는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름대신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최고의 권위자이시고 우리들이 당연히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여러분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와 엘리제사장을 아시잖아요. 엘리제사장은 집안 대대로 제사장입니다. 자식들도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은 비참하게 죽고 그 아버지도 이 소식을 듣고 놀래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여러분 제사장이라고 다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어떻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의 엄마는 하나님을 우선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립니다. 사무엘을 하나님의 성전에 두어서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키웁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무엘을 크게 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는 자! 하나님을 우선시 하는 자, 하나님의 권위 앞에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들어 쓰시고 축복해하시고 세우십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직위에 있든지 하나님을 높이는 정의를 행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 두 번째는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한 아가씨가 지하철 사람 많은 곳에서 방귀가 나오려고 하는 겁니다. 참으려고 해도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머리를 썼습니다. 창문을 이렇게 하니까 삑삑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삑삑할 때 같이 방귀를 꾸었습니다. 완전범죄 아니겠어요? 옆에 있던 아줌마가 째려보면서 하는 말이 “소리는 됐는데 냄새는 어떻게 할껴?”
진리 속에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진리는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 성령이 다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하나하나를 보면 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입니다. 원리를 제공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성령님은 역사하는 영입니다. 다 다릅니다. 어떻게 이것을 같이 구원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2가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얘기를 합니다. 성경에만 좋은 얘기가 있습니까? 석가모니도 좋은 얘기를 했고 누구도 좋은 얘기를 했고...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훈이 아니라 삶의 원리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 불교의 경전하고는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 말씀의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번 구원받은 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너희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가 됐다, 천국 갔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겁니다. 이 생명은 자라나야 합니다. 계속 진행형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구원을 이어 갔다는 겁니다.
또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로 병 고침도 받고 방언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방언 받은 사람이 오늘 받았다고 해가지고 아침에도 방언, 점심에도 방언, 하루 종일 방언을 하면 미쳤다고 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그칩니다. 치료받은 사람이 다음에 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일회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라는 말은 성령이 계속에서 내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습니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교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지속해 나갈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가 내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할렐루야!
성령의 은사는 다릅니다.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제겐 조카가 둘이 있습니다. 예쁜 여자아이들입니다. 큰 아버지가 무엇을 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뭘 사먹으라고 돈을 주는데 한 아이는 돈을 받아 들고 가서 먹을 것을 잘 사옵니다. 대견합니다. 그냥 종종걸음 해도 가서 잘 사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는 돈을 줘도 안사옵니다. 단지 큰 아버지 보고 같이 가게에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같이 갑니다. 그런데 가게에 가서도 뭘 덥썩 집지 않습니다. 제가 이거 ? 가리키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보면 천원줘서 끝나는데 같이 가서 물건을 고르게 되면 돈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사옵니다. 그리고 사가지고 와서는 먹습니다. ‘아직 숙기가 없어서 그런가 보네. 다음에는 혼자서 가게에 가게 해야지. ’ 아이는 아직도 혼자서 가게에 가지 않습니다. 꼭 아버지 드실 것까지 사옵니다.
언제든지 보면 돈 받은 사람은 돈밖에 쓸 것이 없는데 큰 아버지와 같이 가는 애는 돈 이상의 것을 항상 얻어 옵니다. 혼자서 가는 아이는 대견하기는 하지만 작은 아이는 돈을 주던 안주던 오면 몸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달라붙기도 하고 눕기도 합니다. 청계천 복원한 것을 보러 가자고 하면 큰 애는 안갑니다. 작은 애는 가자고 짝 달라 붙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갑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힘들면 업어 주기고 하구요. 그렇게 걸어가다가 을지로 교회까지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용돈도 받아 왔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도 똑같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것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는 예수는 십자가라고 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돌아가셔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셔서,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성령은 과거에도 하나님 말씀, 오늘도 하나님 말씀, 내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만 하면 이 말씀이 내게 임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내가 성령님을 사모하면 성령을 내게 주셔서 내게 방언의 은사도 주십니다. 방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치유의 은사도 주십니다. 그것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남이 병은 고쳐주면서 자기병은 못 고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웃겨서 ‘남이 병은 고치면서 자기 못 고치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하늘 삼층천까지 갔다 왔다. 육신의 병 낫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천국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에서 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병들었어도. 가난해도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내게 능력주시면 나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단계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이 끝나니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기도 중에 성령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곳에 가면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라고 사도행전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갑니다. 빌립의 네 딸이 예언자, 예언의기능이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이 정확하게 얘기를 합니다. “가면 위험합니다. 가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그들도 성령 안에서 예언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맞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야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본인도 로마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식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까지 데려다 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붙잡힙니다. 자기가 로마인임을 하고 그는 거기에 가서 죄수의 몸이 돼서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얘기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단계와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행하는, 구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진행형입니다.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도 진행형, 예수도 진행형, 성령도 진행형입니다. 할렐루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탤런트 최수종씨를 아시지요.
한 젊은이의 삶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젊은이는 외국에 나가 광고 마케팅을 공부하여 크게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부모님은 남미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고 유학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했으니 나도 유학 가서 꿈을 이루게 하옵소서.'
말씀을 벽에 붙여 놓고 이렇게 새벽마다 기도하니까, 기적적으로 유학의 길이 열려서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학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셔서 생활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밀가루 한 포대를 사다 놓고 4개월 동안 수제비만 먹다가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어서 다시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귀국 후에도 오갈 데가 없어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신문을 덮고 잤습니다. 극장에서 점원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힘들어도 항상 ‘하나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반드시 성공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극장 점원을 연예계로 인도하시더니, 점점 유명해져서 스타가 되게 하셨습니다. 최수종씨는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창에 “최수종”을 쳐보세요. 특채로 들어간 탤런트, ‘특채탤런트’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새벽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습니다. 다니면서 간증도 많이 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진리를 구하는 자는 성공을 합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정지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 능력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구원하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100억을 벌었다!” 는 것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100만원이 생겼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어떻게 쓸건 지 할 일이 많아집니다. 옷을 살 건지, 여행을 갈 건지, 한턱낼 건지, 못했던 헌금을 할 건지(헌금 얘기를 늦게 하니까 믿음이 없어서 보이지요.) 여튼 내 수중에 돈이 있어야지 남의 주머니의 돈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들이 받은 은혜를 보면 하나님 나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주관적인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돈이 아니라 큰 아버지를 구할 줄 아는 조카 녀석,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여러분 내 수중에 돈이 얼마가 있느냐?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 갈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 큰 사랑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속에 지금 오셨네
나의 생명되는 나의 예수님 영원토록 못 모셔 내 기쁨넘치네(498장)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권위자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성령님이 아니고 과거가 아니고 진행형의 말씀이요, 예수님이요, 성령님입니다.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오창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