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한 찬양 (시 108:1~6)
본문
오늘 본문의 1절에는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성경의 다른 번역들을 보면 이 1절이 아주 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1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하느님.
마음을 정했습니다.
노래하리이다. 거문고 타며 노래하리이다.
나의 마음아 눈을 떠라.
정성껏 찬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성경」도 1절을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진실로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어성경들을 보면 1절에 'fixed'(KJV) 'steadfast'(NIV) 등 강한 뜻을 가진 단어들이 나옵니다.
찬양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찬양은 경건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찬양 없는 예배, 찬양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귀한 찬양을 할 때 우리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나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서 찬양해야 합니다.
정성을 다 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찬양하실 때 이와 같이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찬양대원들, 찬양하실 때 이와 같이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대원에게는 음악의 기량이 필요합니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찬양하려는 자세입니다.
시편 108편을 지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마음을 다해 찬양을 하겠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찬양의 사람, 찬양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전해지게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 한 찬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뜻을 잘 알고 찬양해야합니다.
우리는 그저 「찬송가」에 있는 가사를, 또는 파워포인트의 화면에 있는 가사를 보면서 거기에 곡조를 붙여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 한 찬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찬송, 이 찬양의 뜻이 어떤 것인가?’ 생각하면서 불러야합니다.
이 이야기는 두어 번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방송사에서는 아나운서에게 방송할 원고를 주면서 ‘아무개 아나운서, 이것을 읽으세요.’ 하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반드시 ‘아무개 아나운서, 이것을 방송하세요.’ 해야 합니다.
읽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방송하는 것은 아나운서가 자기의 교양과 상식과 경험으로 그 원고의 내용을 다 소화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송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해야지, 읽는 식으로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번 찬송을 불렀습니다.
입례송을 불렀고, 예배에의 부름 다음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삼위영가를 불렀고 기도 다음에 다시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양대원들은 기도송을 했고 특별찬양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 찬송, 찬양들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읽는 식으로 부르셨습니까, 아니면 내용을 소화하기 위해 힘쓰면서 부르셨습니까?
3년 전의 일입니다.
교역자와 직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1박2일로 위로여행을 다녀오는데 그 해는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부산까지 가면서 교회 버스 안에서 찬송가 보지 않고 부르기 시합을 했습니다.
의외로 그와 같은 일에 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절은 어떻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2절, 3절, 끝까지 틀리지 않고, 막히지 않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저부터 그랬습니다.
그 때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그렇게 찬송을 오래, 많이 부르고 인도하고 그랬으면 웬만한 찬송은 다 외웠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찬송을 너무 타성적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로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저 「찬송가」를 보고 곡조를 붙여 읽다보니, 알기 쉽게 말하면 건성으로 부르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가 눈에서 머리를 거쳐, 그 다음에 마음을 거쳐서 입으로 나와야 그것이 마음을 다한 찬송,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저 눈에서 머리를 거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마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나오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교역자와 직원들이 이렇다면 성도들은 더 심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찬송을 부를 때 「찬송가」를 보지 않고 부르려고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기억해 내느라고 머리를 많이 쓰는 동안에 찬송이 마음도 거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이 QT를 할 때 성경을 읽는데 한글성경을 읽지 않고 영어성경을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 못마땅한 눈으로 보았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영어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한글성경 대신에 영어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성경은 읽기 쉽기 때문에 편하게 술술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성경은 단어의 뜻을 생각해야하고, 때로는 사전도 찾아야하고, 해석을 해 가면서 읽어야합니다.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이에 맛을 느끼게 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 일리가 있구나!’ 했습니다.
찬송을 너무 쉽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이 성경은 누가 기록했나?’ ‘언제, 어디서 기록했나?’ ‘왜 기록했나?’ ‘여기에 나오는 이 단어는 어떤 뜻인가?’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나?’ 알기 위해 많이 힘씁니다.
찬양과 말씀이 격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찬양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찬양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다한 찬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이 찬송은 누가 작사했나?’ ‘누가 작곡했나?’ ‘왜 작사했나?’ 이것을 알고 부르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찬송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며, 나도 같은 마음으로 부르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은 일제 말에 남궁억 선생이 지었습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압제가 점점 심해져서 사람들이 소망이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남궁억 선생은 나라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쓰다가 이 나라를 살릴 길은 믿음과 교육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조금 연고가 있는 강원도 홍천 보리울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어린이들을 힘써 가르쳤습니다.
한편으로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무궁화 묘판을 만들어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나눠 주었습니다
이 분은 양반신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런 일은 천민이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친척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창밖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가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강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동산이라는 것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일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내력을 알면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렵고 일에 대한 열정이 예전만 못한 지금, 이 찬송은 우리가 더욱 힘써 불어야 할 찬송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은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가 지었습니다.
교황청에서 종교재판을 열고 루터를 소환했는데 그 소환에 따라 보름스 성으로 들어갈 때 작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시골의 신부인 루터가 교황청의 강한 권력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누가보아도 성립되지 않는 게임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주님이 강한 성이 되고 방패와 병기가 된다고 노래하면서 이 싸움에 임합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이것이 찬양의 힘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이 찬송을 부르면 우리는 더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찬송을 건성으로 부르지 않고 뜻을 잘 알고 부르기에 힘써 우리의 찬양이 마음을 다한 찬양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둘째,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더욱 힘써 찬양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부르는 찬양이 마음을 다 한 찬양입니다.
시편 108편은 시편 57편의 앞부분과 시편 60편의 뒷부분이 합해서 만들어진 시입니다.
그래서 시편 108편을 ‘혼합시’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혼합시를 만들었을까, 그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요즘 문제되고 있는 것처럼 실적을 늘이기 위해서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의 모체가 된 57편과 60편의 공통점은 그 때 다윗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57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시입니다.
60편은 다윗이 즉위 초기에 주변의 적들과 정신없이 싸울 때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 찬양에 힘썼습니다. 마음을 다해 찬양하기에 힘썼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울며 쫓길 때도 시편 3편을 지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3편 6절입니다.
편안할 때는 찬양을 잘 하다가 어려울 때 찬양을 멈추면 안 됩니다.
어려울 때 더 힘써 찬양해야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성에서 전도하다가 고발을 당했습니다.
많이 맞고 갇혔습니다. 그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아시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싶었지만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이곳으로 왔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일 당하라고 나를 이리로 보냈나?’ 하는 회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마음을 다한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찬양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서 찬양한 결과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조창호 집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올해 77살이고 수지에 살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이 분의 이야기를 몇 번 하였는데 찬양과 연관하여 이 분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합니다.
6․25때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43년을 북한에서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 13년은 감옥에서 보냈고 나머지 기간은 탄광에서 보냈습니다.
감옥생활은 원산, 회창, 덕천, 만포, 아오지 특별수용소, 강계,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한두 군데 빼놓고는 모두 춥고 외진 곳들, 힘든 곳들입니다.
광부 생활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춥다는 중강진 부근 호하라는 곳에서 했습니다.
결핵에 걸렸습니다. 광부생활을 하면서 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규폐증 2기에 걸렸고, 왼쪽 눈을 실명했고, 왼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이기고 소망을 버리지 않고 지내다가, 1994년에 탈북하여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찬송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분의 수기「돌아온 사자: 조창호의 북한생활 사십삼 년」이라는 책의 166쪽과 167쪽에서 직접 읽어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1천 명 가운데서 한 명 살아남을까말까 한 그 지옥 같은 교화소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 나왔을까 신기하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않은 희망이 내 삶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화소에 들어오면 자포자기하고 모든 희망을 버렸지만, 나는 도리어 자포자기 하던 생활을 한 단락 지으며 거꾸로 희망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힘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교화소뿐만 아니라 북한 어디에도 신앙의 자유란 없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어도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간구했다. 물론 찬송도 부를 수 없었지만 입 속으로 늘 불렀다. 나 혼자 이겨내지 못할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은 내게 늘 편안함과 새로운 의욕을 주었다. 또 내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주님을 수없이 원망하더라도 종국에는 평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도하실까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만은 어머니와 나는 함께 있다고 믿어졌다.
늘 어머니께서 잘 부르시던 찬송을 생각했다. 그 찬송은 지금도 찬송가를 보지 않고서도 혼자 부를 수 있다. 43년의 질곡도 내게서 신앙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예수는 나의 힘이오 내 생명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일 이 주 예수
이 찬송을 찬송가를 보지 않고 혼자서 부를 수 있다니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저희보다 낫습니다.
오늘 우리가 남선교회대회를 하는데, 작년 남선교회대회를 할 때 이 분을 오시게 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성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 서예를 하시는 저희 교회 현상각 권사님이 이 찬송, 「찬송가」 93장의 가사를 붓으로 써서 이 분에게 선물로 드렸습니다.
현상각 권사님은 6․25 때 인민군 포병소위였지요.
50여 년 전에는 국군포병 장교와 인민군 포병장교로 서로 맞섰는데 믿음 안에서 형제가 되어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퍽 의미 있게 여겨졌습니다.
어려울 때 더욱 힘써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 한 찬양을 하시기 바랍니다.
힘이 날 것입니다,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것입니다.
나가서는 그 어려움이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08편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이여” “여호와여”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은 ‘이 노래는 하나님께 바치는 노래입니다.’ 하는 뜻입니다.
특별히 3절에서 5절까지를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까지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표현들이 강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일반음악과 찬송이 어떻게 다릅니까?
일반 음악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 있고 조국에 바치는 노래도 있고 황제를 위한 교향곡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그 대상이 사람이나 이 땅위의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복음성가가 점점 많이 퍼지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아침마다 교역자와 직원들이 예배를 드릴 때도 찬송가 대신에 조그만 복음성가집을 만들어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성가와 찬송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제일 많이 듣는 답은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안에도 복음성가가 많이 있다.’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공통된 대답 하나는 찬송가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복음성가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의 기본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2절 앞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비파와 수금은 찬양을 돕기 위한 도구입니다.
‘너희들, 자지 말고 깨어서, 찬양을 돕는 너희의 본분을 다 해라’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기도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10분 전에 찬양대 연습실에 들려 찬양대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그 때 성경에서 찬양대와 관계있는 말씀을 하나씩 택해 읽습니다.
그 일을 깨닫게 되는 것이 성경에는 찬양에 대한 말씀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찬양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등촌동에 있는 그리스도 신학대학이라는 학교의 채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파에 속한 신학교육기관입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파를 시작한 분은 동석기(董錫琪: 1881~1972)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분은 원래 감리교 목사님으로서 3․1 운동 때는 화성시에 있는 남양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수원․화성 지방의 만세운동을 지도했습니다.
동석기 목사님의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북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회도 북한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을 학생들에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습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안내하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파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채플에도 반주가 없으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악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대에 맞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겼지만 ‘원칙적으로는 맞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파와 수금이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깨어 찬양을 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이 말씀에서 어떤 흔들림과 방황 끝에 결단을 내리고 믿음으로 분연히 일어나 찬양하려는 다윗의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오랜 방황과 갈등 끝에 얻은 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신자들이 도달해야 할 최상의 고백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겠다는 것은 이 고백, 이 결단의 열매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다한 찬양의 열매를 주님께 드려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찬양의 뜻을 잘 알고 부르며, 어려울 때 더욱 힘써 찬양하고,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원칙을 잘 지켜 마음을 다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신앙생활에는 큰 유익과 진보가 있도록 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오늘 임명을 받는 찬양대원들이 되시기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