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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렘 4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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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렘 48:11∼12)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예레미야 48장 11∼12절

영적 무관심, 게으름, 탐욕, 교만, 쾌락의 찌끼 제거해야
고난은 축복의 통로...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 찾게 해
시련의 바람 세상 잠 깨우는 도구, 영적 신앙 성숙 도와

제가 일본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일본 목사님 한분이 제게 “일본 사람은 밥과 반찬을 절대로 비벼서 먹지 않는데 왜 한국 사람은 밥과 반찬을 비벼서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일본은 섬나라이기에 외세의 침략이 거의 없었지만 한국은 반도국가로 5000년 역사 동안 대륙에서 5000번 이상 침략을 받았고, 또 일본의 침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밥과 반찬을 따로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대응도 하고 일하며 생활해야 하기에 밥과 반찬을 한곳에 넣고 비벼 먹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은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십니다.

1. 평안하면 찌끼가 끼게 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 편안하면 우리 마음에 찌끼가 끼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큰 통에 포도송이를 넣고 발로 밟습니다. 그런데 그 통속에는 포도즙과 껍질, 찌끼까지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큰 통을 가만히 두었다가 가라앉으면 위에 있는 포도즙만 다른 통에 옮깁니다. 그리고 또 가만히 두었다가 윗 부분만 다른 통에 옮깁니다. 이렇게 수 차례하면 나중에는 맛과 향이 좋은 포도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것을 예로 들면서 모합에 대해 말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변방 국가입니다. 그런데 모압은 옛날부터 외세의 침입도 없었고, 포로로 잡힌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그들의 삶 가운데 찌끼가 끼게 되었습니다. 이 그릇 저 그릇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옛 습관과 전통에 안주해 있어 부패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침략을 당하고 고난이 오도록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압의 모습은 우리들의 신앙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모압처럼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면 찌끼가 낍니다.

첫째 영적인 무관심의 찌끼가 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도 아니하고 부귀, 영화, 공명이 그대로 있으면 영적인 생활에 찌끼가 끼어서 영적인 생활이 죽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에 무관심합니다. 기도에 무관심하고 말씀 읽는 것도 무관심하고 회개하고 전도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영적 무관심 속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 무관심은 우리의 신앙 날개를 꺾어버립니다. 뉴질랜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맹수도 없습니다. 모든 짐승들이 온순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습니다. 날개도 근사하고 색깔도 좋지만 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습니다. 조류학자들은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 편하게 생활하다가 날개가 퇴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너무 편하면 영적으로 무관심해지는 것입니다.

둘째 게으름의 찌끼가 낍니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잠언 19장 15절에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삶에 고난이 닥치면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고,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도 합니다. 불철주야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삶이 편해지면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말씀도 읽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차례 겨우 교회에 출석합니다. 게으름으로 영적인 굶주임에 허덕이게 됩니다. 평안이 계속되면 여러 가지 더러운 찌끼들이 끼게 됩니다. 안셀무스는 ‘태만은 살아있는 사람의 무덤’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탐욕의 찌끼도 낍니다. 편안하면 탐욕이 들어옵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탐욕이 들어올 시간이 없습니다. 게으른 마음은 마귀의 공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편안하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와서 탐욕을 가져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이 에덴 낙원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고 먹을 것도 풍족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할 일이 없습니다.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말을 듣고 탐욕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게으른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오자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었습니다.

넷째 교만의 찌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경쟁상대가 없이 평안하면 교만이 들어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호세아 13장 6절에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 찾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평안하면 교만의 찌끼가 끼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세상 쾌락의 찌끼인 것입니다. 평안하면 음탕하고 술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 어찌 음탕한 마음이 들어오며 술취하고 방탕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부하고 귀하게 되면 술취하게 되고 음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평안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안해져서 영적생활을 등한시하면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때문에 평안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축복만 계속되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축복이 계속되고 편안하기만 하면 삶의 찌끼가 반드시 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은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고난은 삶에 찌끼를 없애고 향기롭고 좋은 상태로 만듭니다. 고난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첫째 고난 당하면 회개하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타지에서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겨우 돼지치기로 연명하지만 고난이 따릅니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부귀, 영화, 공명이 있을 때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따라 살았지만 고난이 다가오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할 때 주님은 얼굴을 감추고 숨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난을 당하여서 괴로울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찾고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은 다시 얼굴을 나타내시고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회개시키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을 당하면 반성하게 됩니다. 세상과 탐욕을 벗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세상을 따라가고 탐욕을 따라 가다가도 고난이 심히 다가와서 고통을 당하면 탐욕과 세상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7절에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베드로전서 4장 2절에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고난당할 때 옛습관을 벗어 버리고 새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삶의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 사람은 변화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난은 우리를 반성시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 받을 때 깨어집니다. 그릇은 깨어지면 못쓰지만 사람은 깨어져야 합니다. 자기 중심에 서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사람도 쓸 수 없고, 하나님도 쓸 수 없습니다. 깨어진 사람만이 온전히 쓰이게 됩니다. 깨어지지 아니하면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 고집으로 삽니다. 고난이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밑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한 폭풍을 보내셨기에 파선될 위기가 임하게 되었을 때 폭풍의 근원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비로소 폭풍은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으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틀 동안이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삼일째 비로소 회개하고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로 요나를 토하게 하시고, 그를 사명자로 쓰신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47년 목회를 보더라도 고난당할 때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고난당할 때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럴 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이런 체험으로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의 삶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면 파멸당합니다. 사람들은 꿈과 소망을 잃어 버리면 절망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던 사람은 고난당하면 더욱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고난이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게 만듭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고난당할 때 신앙의 열심을 더 찾게 됩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던 사람도 생활에 축복이 임하고 삶이 평안해지면 신앙이 미지근해지고 점점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을수록 뜨거워지면 좋겠는데 축복을 받을수록 신앙이 식어져가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이후 한국교회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세계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철야기도를 시작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산기도를 시작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한국교회가 게을러지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의 불이 시들해져 점점 형식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성장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열심을 되찾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두가지 방법을 동원하셔서 교회를 깨우십니다. 하나는 성령을 부으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핍박이 오게 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인데,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핍박을 당하기 전에 회개하고 성령 충만을 받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1절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나아가게 합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의 신앙은 점점 열심을 내고 힘이 있게 되어서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연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3.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나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만 계속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고난에 들어가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과 환상을 주고 위로를 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부모, 형제, 처자가 다 떠나고 실패와 낭패를 당하여 사망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갈지라도 기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내려갈지라도 하나님 위로를 통해서 축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꿈과 소망을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고난만 당하게 한다면 누구든지 꿈과 희망을 잃어 버리고 자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고난을 당하게 하고 난 다음에 깨어지고 회개하면 마침내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축복만 계속되어도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람이 너무 평안하면 게을러집니다. 신명기 8장 11절로 16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만 계속되면 낙심하게 되고, 축복을 주면 게을러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어떤 아프리카 대표가 강연을 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출세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점령한 후 그 나라의 우수한 인재를 자국으로 데리고 가 대학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석?박사 학위를 받고 아프리카로 돌아온 95%에서 99%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국가서 공부해서 학위를 얻고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바에는 차라리 출세하지 않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그분이 그런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평안한 삶을 살다보면 믿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할 때 늘 깨어있어야 됩니다. 신앙의 비빔밥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축복의 희망을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고난속에 축복의 은총의 손길이 있어 고난당할 때도 축복의 비빔밥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로 22절에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2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극한 고난을 당하고 절망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와 축복과 소망이 또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할 즈음에 피할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둡는가 하면 광명한 빛이 내 앞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갈길이 없는 캄캄한 동굴에 들어갔는가 하면 그 동굴에 하나님이 터널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역설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에 부딪혔는가 하면 선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절망인가 하면 또 소망의 문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낭패 되었다고 하면 또 성공의 문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축복은 언제나 비빔밥으로 같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받을 때는 또 고난의 채찍도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 가운데 게을러지지 않게 하나님은 계속 고난을 주어서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축복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때리므로 잠들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을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축복과 함께 비빔밥을, 축복에도 고난과 함께 비빔밥을 먹는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겨울이 지난후에 춘삼월이 다가오면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합니다. 왜 바람이 부는 것일까요? 겨울 동안 잠이 푹 들은 나무는 춘삼월이 와도 물기를 끌어 올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잎이 트고 꽃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으려고 생각을 안합니다. 나무를 잠에서 깨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막 흔들어 놓으면 뿌리채 흔들리니까 “어∼ 벌써 봄이 왔네? 물기를 빨아 올려야 되겠다. 싹이 돋아야 되겠다. 잎과 꽃을 피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무풍지대로 있으면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세상 잠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시련의 바람이 불어 우리를 흔들면 우리가 세상 잠에서 깨어나서 “이것 큰일났구나! 정신차려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해서 성령의 생수를 받아 들이고 잠에서 깨어나고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항상 평안해도 안되고 항상 환난을 받아도 안되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때 방심하지 말고 내가 안주하면 고난의 바람이 불고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아야 됩니다. 고난당할 때 회개하고 희망을 굳게 붙잡고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얼마있어 축복을 준다는 것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언제나 축복과 더불어 고난이 오고 고난이 왔는가 하면 또 축복이 오는 비빔밥 신앙이라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알고 굳세게 서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를 교육하고 키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매도 때리시고 잘했을 때는 축복도 주셔서 우리의 신앙 인격이 균형있게 잘자라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만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선한 자녀들이 다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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