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치료자 되신 하나님 (출 15:22~27)
본문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기적이며 감격적인 구원사건을 들라면 그것은 바로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홍해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병들이 쳐들어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하나님은 밤새도록 동풍을 불어 홍해를 가르고 그 마른땅 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걸어서 건너게 한 뒤, 뒤쫓아 오는 애굽 군대 위에 홍해 바닷물이 다시 덮치게 하여 모두 빠뜨려 죽이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홍해의 구원사건 직후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큰 파도를 하나 겨우 넘겼나 싶은데 또 다시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위기를 겨우 이겨냈는가 싶은데 곧바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15:22~23을 읽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구원사건을 체험한 직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여정이 시작되는데 수르광야라는 곳에 이르러 3일이나 헤매도 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사막에서 물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먹을 것은 없어도 수십일 이상 견딜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단 며칠도 견딜 수 없습니다. 사흘씩이나 물을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 거의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어떤 오아시스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오아시스의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이 쓰다는 말이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데 이 ‘쓰다’는 말은 물속에 염분이 많이 들어있어서 짠 맛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사흘 만에 겨우 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짜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몽골에 선교사로 갔다가 몇 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 가지런하던 이가 다 상하고 빠져 있었습니다. 까닭을 물으니 몽골은 물에 석회석 성분이 많아서 신토불이라고 그 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마셔 와서 아무 문제도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이나 외국인이 가서 그 물을 오래 마시면 잇몸이 상하고 치아가 빠지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물 좋은 것이 참 큰 축복입니다. 마라의 물도 바닷가에 가까워서 염분이 많이 들어있어 식수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히브리말로 쓰다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붙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마라 같은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은혜로 이제 좀 살만 한 것 같은데 또 다시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물을 찾지 못하고 소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비틀거리게 됩니다. 드디어 지쳐 쓰러질 때쯤 되었는데 겨우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제 살았구나 싶어 달려가 보니 그 오아시스의 물은 쓴물이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쓰디쓴 순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게 됩니다. 내가 왜 사나? 이렇게 살아 뭐하나 싶고, 완전히 모든 소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피난 갔던 나오미는 거기서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며느리 룻만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터덜터덜 돌아옵니다. 그런 나오미를 고향 사람들이 알아보고 “나오미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출애굽기에도 나오듯 ‘쓰다’는 뜻이므로 “나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닌 인생의 쓴맛 다 본 불쌍한 여인이다”는 말이지요.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들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오미처럼 처절한 인생의 실패와 아픔을 겪으면서, 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모조리 맛본 후에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순간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행끼리 몰려다닌다고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행과 실패는 계속 몰려오고 우리는 그 인생의 쓴맛 때문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원망이냐, 기도냐?
그런데 바로 이 인생의 마라의 순간에, 인생의 가장 쓰디쓴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24절과 25절을 보면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특기는 불평과 원망입니다. 홍해바다에서 진퇴양난의 위험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까지 끌고나와 죽게 만드냐”며 원망하는데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광야생활 끝날 때까지 40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어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께 불평하고, 조금만 괴로우면 모세를 원망하곤 합니다. 오늘 마라의 쓴물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그 주특기인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24절을 보면 백성들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고 원망합니다. 설마 이렇게 점잖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했겠습니까? “야! 이놈의 모세야, 도대체 우리보고 뭘 마시라는 거냐? 목말라 죽으라는 말이냐?”라고 막 해댔겠지요. 조금만 배고프면, 조금만 목마르면 불평하는 습관이요 조금만 힘들고 괴로우면 원망하는 습관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은 습관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늘 원망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입에 “아이고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못 살겠다” 소리를 달고 삽니다. 조금만 힘들거나 어려우면 늘 주변 사람들을 탓합니다. 재빨리 원망의 대상을 찾아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늘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탓을 하고 공격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습관을 바꾸십시오. “죽겠다, 죽겠다” 하면 정말 죽을 일만 생깁니다. “못 살겠다, 힘들다” 하면 정말 못 살 일, 힘든 일만 계속 생깁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을 고치고 정신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살겠다, 살겠다” 하면 살 일이 생기고,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정말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감사하다, 즐겁다” 하면 정말 감사할 일, 즐거운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자세와 습관이 정말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보세요.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목마른 순간인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혀 다르게 반응하지 않습니까? 25절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해결방법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고 과연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해 주시니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아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쓰디쓴 부분들을 단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절망은 소망으로 바뀌고, 불행은 행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내 인생에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못 믿었기 때문에 방금 전에 열 가지 재앙을 보고, 겨우 사흘 전에 자기 눈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도 지금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홍해까지 가르신 하나님이 그까짓 먹을 물 없어서 그 사랑하는 백성을 목말라 죽게 하시겠습니까? 먹을 것 없어 굶어죽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적은 것이 없다고 홍해의 기적까지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투덜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구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그까짓 인생에서 쓴맛 좀 봤다고, 어려움 좀 당했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못 믿고 투덜거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홍해기적보다 몇 배 몇십 배 더 놀라운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닥쳐오는 마라의 쓴물들을 다 단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 가지고 어려울 때마다 쓸 때마다 부르짖어 해결 받는 모세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 라파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교훈을 주십니다. 다같이 25절 뒷부분에 나오는 ‘거기서’부터 26절까지 읽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이 마라의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도를 정하십니다.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는 법입니다. 네 가지 조건이란 첫째, “너희가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면”입니다. 청종이란 말은 ‘듣고 또 듣는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는 자세입니다. 둘째,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로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른 삶을 사는 자세입니다. 셋째,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로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넷째,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입니다. 그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어떻게 하겠다고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아시지요?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의 죽음 가운데 대부분은 사람이나 가축에게 내린 질병입니다. 질병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고 힘들게 하는 일들을 뜻합니다. 바로 그 질병이나 불행이나 고통을 모두 제하여 주시고 치유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기서 ‘여호와 라파’ 즉 “여호와가 치료하신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좀 더 정확하게 읽으면 ‘아니 여호와 로프에카’ 즉 “나 여호와는 너의 치료자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치료자, 나의 의사가 되어 나를 고치고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나의 치료자 되신 하나님을 만나라
세상에서 몸에 병 하나 안 가지고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이렇게 멀쩡해 뵈지만 실은 몸에 이런 저런 병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크든 적든 몸에 병 하나 이상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병을 빨리 고쳐야지 그대로 놔두면 더 큰 병으로 발전해서 결국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성도들 가운데 육신의 병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병은 병원에서 의사가 고치고 약으로 고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고쳐지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병 치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마치 잘못된 신앙이나 미신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5:15에 분명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일으키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병이나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 주께서 그 기도를 듣고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의사가 고치고 약이 고쳐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을 통해 주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못 믿는 것이 오히려 불신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부터라도 내 육신 속에 있는 질병을 위해,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상관없고 불치병이라도 상관없으니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또 나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성도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또 안 믿는 사람의 병도 고쳐주셔서 예수 믿는 기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의 치료자 되신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예수님의 피 묻은 손으로 어루만지사 치유하실 줄 믿습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와 구역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질병뿐 아닙니다. 세상에서 인생의 쓴 뿌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려서 받은 학대,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한 깊은 상처, 자라면서 겪은 아픔과 시련으로 인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멍과 상처들...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과 영혼에 쓴 뿌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와 쓴 뿌리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고 그 상처는 저 영혼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쓴 뿌리들 위에 또 다른 쓴 뿌리를 얼기설기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쓴 뿌리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곪아 터져서 병이 됩니다. 정신이 병들고 영혼이 병듭니다. 그 병은 불평이나 원망으로 나타납니다. 쓸데없는 고집이나 남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절망과 좌절로 나타납니다. 결국 우리 인생도 망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도 망치고 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질병과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영혼의 상처와 쓴 뿌리입니다.
그러면 이 영혼의 병과 쓴 뿌리는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육신의 질병은 좋은 의사나 약을 만나면 나을 수 있지만 이 인생의 쓴 뿌리, 내 영혼의 질병은 하나님을 못 만나면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어렴풋이 하나님을 믿고 아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내 삶이 바뀌고 내 정신과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개조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도, 심지어 목회자 중에도 인생의 쓴 뿌리, 영혼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를 오래 다녔으면서도, 심지어 신학교 나와 목회자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치료자 되신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병원 가서 의사를 만나더라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그의 처방을 따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감기니까 약국 가서 이런 약을 지어 먹으세요”라고 의사가 처방하는데 환자가 제 마음대로 생각하길 “아무래도 이 의사는 못 믿겠어, 내 병은 틀림없이 감기가 아니라 폐암이야”라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의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사도 같은 처방을 하면 또 못 믿고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똑같은 검사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병원 패키지 투어 형 환자’라고 하는데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하나님을 내 영혼의 치유자요 내 인생의 치료자로 온전히 믿고 나를 맡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 또 다른 해결방법을 찾아 전전하게 되지요. 이런 경우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영혼의 상처와 쓴 뿌리는 절대 치유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의심과 불안 속에서 치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거나 그 분께 내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속에도, 또 제 속에도 반드시 ‘마라’가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상처, 그로 인한 공격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치료 받아야 합니다. 이게 치료되어야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만나십시오. 나의 치료자 되신 하나님을 꼭 만나십시오.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분께 내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이 시간 “하나님, 저는 환자입니다. 육체적으로, 무엇보다 영적으로 불치병 환자입니다”라고 인정하고, “이 불치병 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고쳐 주세요”라고 고백하십시오. 이렇게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하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