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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피어나는 소망의 꽃 (욥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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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피어나는 소망의 꽃 (욥 17:1-16)
: 서정호 목사




절망에서 피어나는 소망의 꽃(욥17장 1-16)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순경과 역경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순경이요,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어려운 시련과 고난이 밀어닥치는 것이 역경입니다. 순경에는 순경에 처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고, 역경에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한 정신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위기는 닥쳐와도 절망이란 없다

우리에게 위기는 닥쳐와도 절망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위기와 절망을 뚫고 나갈 소망과 가능성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고 겨울에는 추위와 싸웁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갖 병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모든 악이나 온갖 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역사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긴장은 생기 있는 삶을 살게 한다

최근에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편안한 삶이 생명을 단축시키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실험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먼저 동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의 동물은 아주 좋은 환경에서 먹이도 충분히 먹으며 편안히 살도록 했고, 다른 그룹의 동물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가운데 약간의 음식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마 안가서 좋은 환경에 살던 동물들이 먼저 병들기 시작했고 생기가 없어졌으며 빨리 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과 긴장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생기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에서 고통의 환경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대부분의 경우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가 쉽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머리로 아는 고통과 생활에서 느끼는 고통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을 때는 없는 사람들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또 있을 때는 고통이 어떠니, 인생의 고난이 어떠니 하고 말들은 잘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모두 당황해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을 보면 절망과 희망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먼저 절망적인 사건이 있은 후에 희망이 예언되거나 희망을 주는 사건이 따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는 절망의 긴 굴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절망의 굴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아들 이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생활한 것이 4백여 년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 고난을 당하면서 그 고난의 짐을 벗으리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세가 나타나서 저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 4백년은 너무나 긴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는 하였지만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까지 또다시 4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절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엘리바스가 한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욥의 비참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본문 1절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욥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돈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권력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은 모든 사람이 맞서야 하는 적입니다. 더구나 이 죽음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절에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앞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 날 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겠는가?

우선 하지 않을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그 말이 선합니다. 죽으면서까지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을 안다면 받을 돈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가지 않을 데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할 일도 많을 줄 압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내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이제 조금 있다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죄를 가지고 주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생각하고,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먼저 자기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 가운데 막힌 담이 있어서 서로 외면하는 사람,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 한 교회에 다니면서도 서로 얼굴을 피하는 사람이 있으며, 마음 가운데 화를 품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그런 것도 다 무너뜨리고 서로 화해하고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산다면 우리가 할 일을 다 할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러 가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며,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안다면 그 의무에 더욱 충실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부르신다고 하여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 것입니다. 글로 남기는 유서나 말로 남기는 유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해야 합니다. 내일 죽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세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불행이나 비극이 없다

욥은 너무 심한 고통 속에서 “내 눈은 근심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에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와 같은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보이는 면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시간이 감에 따라 늙어 가고 병들고 후패합니다. 여기에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겉 사람이 후패할수록 속사람이 더 새로워집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질수록 영혼의 눈이 밝아집니다. 육신의 귀가 어두워질수록 신령한 귀는 분명해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은 영원불변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육신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기대가 있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한 여성은 종신 금고형을 받아 평생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속에서 예수를 믿고 거룩해져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지 못하게 하시었네. 나는 이 좁은 새장의 한 마리 새, 주님이 나를 가두셨네. 하여 나 할 일 없기에 종일 노래하노라. 찬송하노라. 찬송 외에 달리 할 것 없네. 찬송하라고 나 여기 가두셨으므로 나의 영은 주를 향해 종일 찬송하네. 십 배로 찬송 부르네. 백 배로 찬송 부르네. 찬송하며 눈을 떠 찬송하며 잠들고 찬송하며 숨지리라.'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누가 그를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신앙인에게는 불행이 없습니다. 신앙의 사람에게는 비극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은 예술입니다. 삶의 예술가이고 삶의 창조자입니다. 어디에서나 그는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절망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온 절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절망하게 한 분도 하나님이시며,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절망에 빠지게 하였던 분도 하나님이시며,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으므로 범죄한 유대 나라 백성들을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절망을 피하려 하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질 때 비로소 자신의 죄와 무능과 무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시는 것은 우리의 죄와 무능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하다보면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얻으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크고 작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옵니다.때로는 해와 달과 별들도 보이지 않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덮칠 때도 있습니다.건강을 잃어버리고 신음할 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해 재물을 잃고 고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그런 때에도 우리는 바울처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희망인가? 절망인가? 이 선택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항상 희망의 소리를 외치고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그리하면 반드시 자기 믿음대로 자기 입의 말대로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선 이 절망의 굴은 결코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통과해야 할 굴일 뿐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절망하고 철저하게 회개할 때 이 어두운 절망의 굴은 끝이 나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철저한 절망 끝에 참된 희망이 밝아 오는 것입니다. 철저한 부정을 통해서 참된 긍정의 세계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절망의 시기야말로 우리가 회개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 때야말로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돌이켜 반성하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옛 것들을 다 깨끗이 씻어 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방만하였던 삶을 돌이켜 절제된 생활로 바꾸어 가야 할 시기입니다. 이제 이 절망의 시기를 회개의 때로 바꾸므로 참된 희망의 아침을 맞이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의 밤을 기도의 밤으로 바꾸라

누구에게나 밤이 찾아오듯 누구에게나 새벽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새벽 맞이는 동일할 수 없습니다. 충분한 숙면을 취한 사람의 새벽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의 새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과 같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 없이 맞이하는 새벽과, 기도로 씨름한 새벽의 흔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예고 없이 절망의 밤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의 강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절망을 그대로 품고 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바꾸어 소망의 항구로 이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절망에 이르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절망을 만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의 절망이든 절망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싸인이고 기도의 무릎을 세우라는 싸인일 뿐입니다. 아침햇살이 비추이면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듯 우리의 무릎이 세워지면 절망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큰 절망은 기도하지 못함입니다. 절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절대위기만이 존재합니다. 절대위기란, 절망의 밤을 기도의 밤으로 바꾸지 못하는 '기도의 막힘 현상' 입니다. 기도의 '막힘'과 기도의 '안 됨 현상'은 무엇으로도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라 하심으로, 절망을 파견하심입니다. 기도의 안 됨과 막힘은, 기도로만 뚫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둘 다 할 수가 없는 듯 합니다. 기도하든지 아니면 절망하든지, 기도하든지 아니면 시험에 들어 살든지 말입니다. 기도 없이 살고, 기도가 안 되는 데도 위기감이나 가책이 없다면 그거야 말로, 큰 위기이며 중병인 것입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각증세를 모르는 병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치료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도하라는 신호로 종종 절망의 밤을 만나게 하십니다.

내가 겪는 억울함속에, 불공평속에, 회한속에, 상처속에, 문제속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걸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곳까지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곳까지 가야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실수 없으심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의 밤을 고민과 분노 그리고 후회와 자책의 속상함으로 지새우면 새벽은 또 다른 어둠의 시간을 연장 시킬 뿐입니다. 기도 없는 절망의 밤은, 새벽을 더디 오게 하지만, 통곡하는 기도의 밤은, 신속하게 새벽을 앞당겨 줍니다.

세상 사람은 충분한 쉼과 칼로리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의 엔돌핀과, 위로부터 베푸시는 새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밤중에도 아침을 사는 사람이 있고, 아침에도 밤중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기도의 부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과의 논쟁, 그리고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기진맥진하여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무덤이라고 고백합니다. 욥의 육체와 정신은 점점 곤고해지지만 욥의 절망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희망의 꽃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주께서 친히 내 보증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밖에 아무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절망 속에 피어난 한 송이 희망의 꽃입니다. 친구들도 그에게 소망이 될 수 없으며 세상의 지혜도 그에게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절망이라는 벼랑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절망의 벼랑에서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주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절망은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쩌다가 우물에 빠져서 올라오지 못하고 우물 벽에 붙어서 죽겠다고 야옹 야옹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고양이를 구해주려고 네모난 큰 막대기를 갖다대고 타고 올라오라고 아무리 해도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그 나무를 타지 않고 계속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막대로 고양이를 쳐서 물에 빠지게 한 다음 그 나무를 갖다대니까 얼른 나무 위를 기어 올라와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절망에 빠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할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개나 소나 말 같은 짐승은 물에 빠졌을 때 헤엄치는 법을 배운 일이 없어도 잘 헤엄쳐 나오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물에 빠지면 허우적거리다 빠져 죽고 맙니다. 그 원인은 온 몸을 물에다 맡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에다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으면 처음에는 가라앉지만 조금 있으면 뜹니다. 그 다음에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법을 배우면 헤엄치게 됩니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몸을 물에 맡기고 누워서 손과 발을 움직이면 얼마든지 오래 헤엄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온 몸을 물에 맡기면 뜨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내 인간의 힘을 빼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생마처럼 날뛰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지도 않고 우리의 하는 일에 개입하시지도 않습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했습니다. 여기서 "상한 심령"은 "깨어지고 바스러진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는 자를 찾아서 가까이 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가까이 오시지 않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자를 살리려 들어갈 때 조급히 손을 대면 함께 빠져 죽기 쉽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릴 힘도 없을 때 조심조심 머리칼을 붙잡고 끌고 나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한 방 때려서 기절하게 만든 다음에 끌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거나 병들어 죽게 되거나 어쩔 수 없어서 절망하는 것보다, 평안할 때, 사업이 잘 되고 건강할 때도 자신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고, 계속적으로 성공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지혜도, 건강도, 물질도,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대신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벼랑 끝에선 자의 축복

살다보면 살아있음의 무게가 천근만근일 때가 있습니다. 추워 덮은 이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내가 작아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겨우 겨우 붙잡은 동아 밧줄을 인하여 숨을 고르는 순간에 위를 보니 생쥐 한마리가 밧줄을 갉아 먹고 있을 때 우리는 밧줄이 끊어지기 전에 미리 잡은 손을 스스로 놓아 버립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매질할 때 보면, 아이들은 울며불며 속으로 말합니다. '엄마, 아빠, 미워!' '날 사랑하면 왜 이렇게 때리는 거야?' '내가 미워서 그러는 것일 거야' 그럴 때에도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매질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청년이 되면 부모의 매질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매질의 은혜를 알게 되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쉽게 매질의 이유와 벼랑 끝의 의미를 설명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여 장성하게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매질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신 신묘막측한 섭리를 알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 할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선 것이 무슨 축복입니까? 오히려 재앙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무슨 은혜입니까? 그것은, 항복의 은혜입니다. 항복의 은혜는 교회에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시온의 대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반드시 벼랑 끝에서만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자원하여 항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항복을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받아 내십니다.

사람은 죽을지언정 항복을 피하려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항복하지 않고 믿으려 합니다. 기도를 해도 항복을 피하여 기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항복을 받아 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항복한자를 마침내 높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항복한 자에게 기막힌 은혜를 예비하십니다.

수많은 승리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성정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빨리 항복의 은혜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 항복한 분들, 직장을 잃고 항복한 분들, 건강을 잃고 항복한 분들, 평생의 꿈을 잃고 항복한 분들, 사랑하는 분들을 잃고 항복한 분들,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항복한 분들, 그분들의 항복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포상이 준비되어 있겠지요.

사진작가들에 의하면 밤하늘도 파랗다고 합니다. 영의 눈으로 벼랑을 바라보면 파랗게 보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자세히 보면 별 하나는 보인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방석을 펴고, 믿음의 눈으로 자세히 벼랑을 살펴보십시오. 희망의 별, 가능성의 별 하나쯤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을 겁니다. 벼랑 끝에서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실제적으로 만져 주시고 신속히 회복케 하시기를 젖은 눈으로 강청합니다.

내 보증이 더 값진 이유

욥이 간청하는 보증, 즉 하나님이 그에게 더욱 소중한 이유는 죽음에 이르는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알게 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세상의 지혜자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욥을 조롱하고 공격했으며 정죄했습니다. 그들과의 대면 속에서 욥은 단 한 사람의 지혜자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덤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덤을 내 아비로, 구더기를 내 어미, 내 자매로 부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한 줄기의 빛, 하나님을 그의 유일한 보증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욥의 유일한 보증이 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고통의 세계에 있는 자들에게도 유일한 소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비극과 실망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봄과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날,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불공평을 깨뜨리고, 우리의 고통을 종식시키실 것입니다.

내가 보증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보증이 얼마나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값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당하는 자들의 위로자임을 알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물질이나 지위는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의지했던 가족과 친구도 언젠가는 제 곁을 떠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한하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없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에서 피어나는 소망의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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