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본문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성경본문] 왕하3:13-20
김철현 목사

한 때 아이들이 타고 노는 놀이기구 가운데<킥보드>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부딪히는 사고가 빈번하고 해서 TV뉴스에도 자주 오르락 거렸습니다만 저희 집 큰 아들 녀석이 아홉 살 때였습니다. 그<킥보드>를 사달라고 거의 매일 졸라댔습니다. 학교 갈 때“아빠, 킥보드”집에 오자마자“아빠, 킥보드”모든 관심이 이것에 집중되어 있는 겁니다. 심부름 값으로 100원이 생겨도“킥보드 사야지”하여간 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어느 날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신년아! 아빠는 아빠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킥보드만은 사줄 수가 없다.”그랬더니 이 녀석이 대뜸 한다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아빠! 그럼 안경 벗어 보세요. 제가 흙 넣어 드릴 게요”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제 아내와 얼굴만 쳐다보며 웃고 말았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원색적인 표현 그대로“아빠가 죽기 전에는 절대 안돼!”라고 했더라면 이 녀석의 대답이“아빠! 그럼 지금 잠깐 돌아가세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몹시 씁쓸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뭔가 한 가지에 집착하면 그것 밖에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가져야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비단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편집(偏執)을 버리지 못하여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올바르고 건전한 것에 편집(偏執)한다면 발전적이고 성숙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에 편집(偏執)한다면 마지막은 언제나 불행입니다.

[헨리 뉴웬]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마음의 문을 열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발작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간호사 두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후에 진료를 시작하려던 의사는 환자가 오른 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움을 받아서 손가락을 가까스로 하나 둘 펴다가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펴니까 딸그랑 하고 퍼렇게 녹이 슨 동전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환자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를 동전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동전을 잃어버리면 자기 존재가 전부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누가 와서 칼로 찌르고 이것을 빼앗아가지 않을까’,‘이걸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매일을 시달리면서 있는 힘을 다해 동전을 움켜쥐고 지금까지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무언가 집착에 빠지면 정신이 썩어져 가는 모습과 거기에 말려들어 결국에는 모든 것이 파괴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즘 인터넷이 확산 되면서<인터넷 채팅>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만납니다. 카메라를 통하여 서로를 확인하는 화상 채팅을 하더니 금방 친해지면서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사고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가정이 망가지고 인생을 망치는 예들을 쉬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사람이 어디에 집착을 하느냐, 좋은 말로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파수를 어디에다 고정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적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말을 나도 하고, 그 분이 침묵할 때 나도 침묵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삶의 주파수가 세상에 고정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간밤에 돼지꿈이라도 꿀라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꿈의 힘을 믿고 하루 종일 허황된 기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꿈을 꾸어도 신령한 꿈을 꾸어야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도 유치한 생각이 아니라,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하등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 가는 신령한 생각을 하고 살수는 없겠습니까?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입맛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앙으로 주파수를 돌려놔야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파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 고난입니다. 인생은 위기 속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태위태한 일들을 만나며 갑니다. 때로 닥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 살아가면서 건져주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전파를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주파수를 맞추어야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허영심, 명예욕, 미움, 다툼, 시기, 질투, 고집, 오만, 불손, 비방......이 모든 것들은 잡음들입니다. 깨끗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방해 전파들입니다. 이것들이 아직도 내 마음에 있고, 내 생활에 남아 있다면 얼른 주파수를 찾아 맞추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위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절망의 골짜기에 샘이 흐르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절망의 골짜기에 샘물이 흘러 문제가 해결 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모압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중에 에돔광야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가자 마실 물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실 물만 떨어진 게 아니라 골짜기에 까지 바짝 말라 물을 구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꼼짝 없이 생명이 위급한 이 상황에서[여호사밧]이[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개천에 물이 흘러넘치도록 채우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때론 인생을 살다보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쩔쩔 맬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마저 황폐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실패의 언덕에서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더 꼬이고 저렇게 해도 더 꼬이는 안타까운 문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때 우리들은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신앙으로가 아니면 풀 수가 없습니다.
자, 전쟁 중 광야 한 복판에서 물이 떨어 졌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왕[여호람]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절망은 곧 불평과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10절 말씀이 무슨 말이냐 하면“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작정하셨구나.”하고 한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다 왕[여호사밧]은 신앙적인 해결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우리의 이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끔 우리가 문제에 부딪혀보면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낙심과 절망과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이 순서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에게 의논하고 저기 가서 동정을 구해 보지만 거기에는 문제해결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생깁니다. 화가 나더라도 새벽에 기도하는 일은 계속해야죠. 힘이 없어도 하나님은 놓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 인간관계가 비틀어져서 신앙의 시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그 인간이 미워서 도저히 교회에 못나가겠다.”합니다. 이건 잘못 된 것입니다. 인간이 실망스러울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와야지 그게 진심 아닙니까? 그렇지 않는 나머지는 거짓입니다.“괴롭다, 슬프다, 배신감 느낀다.”이 모든 것은 내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감상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한 위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 하찮은 일들에 매여서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외면한다면 이만 저만 손해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이 위기 앞에 마침내 이스라엘, 유다, 에돔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신앙적인 해결 방법을 능동적으로 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엘리사]가 이제 그들에게 하는 말이 14절에 나오는데 풀어 말씀드리자면 이런 말이 됩니다.“천하에 불 신앙적이고 불평꾼이고, 원망 꾼인 이스라엘 왕 여호람, 당신은 내가 얼굴도 보기 싫소이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한번 도 찾지 않던 불신앙으로 살다가 이제 어려움이 닥치니까 겨우 원망이나 하려고 하나님을 찾다니 쳐다보기도 싫고 얼굴도 대하기 싫소이다.”하고 화를 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의 방법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진[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적을 이끌어 낸 것은[여호람]의 인간적인 지혜나 모사 때문이 아니라[여호사밧]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보세요,[여호사밧]의 이 믿음이[엘리사]의 경건한 신앙 모습까지 보게 합니다. 이제[엘리사]가 하나님께 아뢸 준비를 하는데 특이한 부탁을 합니다. 거문고 탈자를 불러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속에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도록 마음을 정화하고 신적감응을 위해 자신을 고양시키는 신앙적 준비입니다. 말하자면 이 거문고 줄은 엘리사의<영성의 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통의 줄이었습니다. <영성의 줄>,<믿음의 줄>이 느슨해지고 헝클어지면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들에게 문제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이 풀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부의 적인 모압군대의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적인 문제가 더 큰 법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문제의 최고는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잘 조율이 되었습니까? 기도의 줄이 풀리지 않았습니까? 찬송의 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재미를 느끼며 행복을 발견하며 사십니까? 신앙의 멋진 연주를 해내야할 여러분의 영성의 거문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영성의 문제, 신앙생활의 올바른 주파수가 맞추어 졌을 때 비로소 문제해결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오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문제해결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골짜기가 어떤 골짜기였습니까?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당연히 시냇물이 흐르고 샘이 솟아야 할 골짜기 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말라버린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 대신 돌멩이만 뒹구는 마른 골짜기였지 않습니까? 옛날에야 아무리 훌륭한 골짜기였을지라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지 못하는 말라빠진 골짜기라면 그 존재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내세울 만한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있다할지라도 그 영혼 속에 생명의 샘, 구원의 샘, 은혜의 샘이 흐르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이요, 메마른 골짜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빈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고하십니다. 17절에 보면 비올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다만 믿음으로 파라고 합니다. 보통 비가 오려면 바람이 불던가 하는 전조가 있기 마련인데 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포기해 버리지 말고 끝까지 개천을 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의 위기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은 믿음 있는 자위에 임합니다. 절망의 골짜기, 위기의 골짜기라지만 믿음으로 개천을 파는 자에게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한분께만 주파수를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