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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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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크도다
마태복음 15:2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어떠한 믿음을 칭찬하셨을까요?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을 보면 이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귀신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소리지르면서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여인은 간절한 요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는 그저 인종적인 명칭으로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했는데 헬라인이라고 한 것은 유대인 이외의 족속들을 그저 막연하게 부른 것입니다.
수로보니게라는 것은 그 여인이 살고 있는 지방을 가리킴인데 수리아 지방의 뵈니게 출생이란 뜻입니다.

당시 뵈니게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클레멘트 서신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쥬스타라는 여인이요,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버어니스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여인의 딸은 뵈니게였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여인의 딸이 귀신이 들려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것을 믿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구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아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에도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같은 말로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1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서 말합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아란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주석자는 “이 여인이 벌써 유대교로 개종했던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인 것을 모를 것인데 이 여인은 벌써 알고 예수님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보다는 그 당시 메시아에 대한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이런 인식이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예수님을 좇아오며 안타깝게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아니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와이스’ 같은 사람은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방인도 고쳐야 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셔서” 한 말씀도 대답치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카르’라는 분은 “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끈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의 추측이 다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침묵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욱 크게 하는데 결정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이 인간의 믿음을 향상시킬 때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저 유명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아실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를 신봉하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로서는 아들 어거스틴을 잘못된 생활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무려 그녀는 10여 년을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날로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맥이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안타까워서 자기 교구 암브로스 감독을 찾아가서 안타까운 사정을 호소하면서 흐느낍니다.
“신부님, 제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버리시는가 봅니다. 제가 아무리 그 아들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나 봅니다. 제가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10년을 하루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때 가만히 앉아서 눈물 흘리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는 모니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암브로스 감독은 말합니다.
“자매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결단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이 말씀에 힘을 얻은 모니카는 계속 아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침내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 빛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애타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내 욕심을 위해 잘못 구한 것이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히 침묵을 지키시고 계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계속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없으신 데 이 여인은 계속 부르짖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편에서는 이 여인의 소리가 너무나 시끄럽고 귀찮아서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저 여자가 아까부터 와서 계속 소리지르는데 시끄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마디 말씀하셔서 돌려 보내십시다.”

예수님의 신중한 태도에 비해서 제자들은 대조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귀찮게구니 빨리 돌려보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하고도 무관심한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오신 목적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유대인에게 국한이 되고 이방인을 완전히 도외시한 느낌이 들지만 요한복음 10장 16절의 말씀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어쨌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말씀 중에서 이스라엘을 대하는 예수님의 열렬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마는 그들이 종래 배척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 말씀한 대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은 이방인”의 구원이 선포되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경위를 변증하는데 오늘 주신 말씀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얼마나 매정한 말씀입니까?
침 한번 뱉고, 뺨 한번 때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낙심하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지 나야 유대인이 아니니까 저 분하고는 상관없지. 내가 공연히 시간만 낭비했어”

그런데 이 여인은 그와 반대였습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질렀는데 이제는 더 가까이 와서 절하면서 애원했습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무관심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에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요구되어 지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하나님의 성막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하나님께 소원하며 기도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입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열심히 기도했든지 제사장 엘리가 보니 꼭 술취한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이에 엘리 제사장이 말합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때 한나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나안 여인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녀는 냉대를 받으면서도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천대와 무시를 받으면서도 조금도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간청합니다.
“주님, 옳습니다. 저는 사실 개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 개도 주인의 상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그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이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참으로 겸손과 기지와 인내의 미덕이 조화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고,
시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오히려 개로서 족했고, 당연한 권리에서가 아니라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겸손하고 간절한 그리고 부스러기만 가지고도 넉넉하겠다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후회할 줄 모르는 인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전한 신앙에는 이런 미덕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경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마는 그 모든 장애는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이 깊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여인의 첫 부르짖음을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대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두 번째 부르짖음도 예수님께서는 냉정하게 개의 비유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세 번째 부르짖음을 격찬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하면서도, 열렬하면서도, 겸손하면서도, 끈질긴 믿음에 대하여 크게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 여자는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여인은 칭찬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여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딸은 무서운 귀신이 들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귀신을 내어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습니다.
믿음과 축복은 정비례 합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축복을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축복을 받고, 아무것도 안 믿으면 아무런 축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말하자면 상수도 파이프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원지에는 축복의 생수가 무진장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파이프를 연결했느냐 하는데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의 생수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주사 바늘만큼 가느다란 파이프를 연결했으면 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해서 축복의 생수가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저 졸졸 나오기 때문에 민족도, 감사도, 기쁨도, 찬송도, 승리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는 하면서도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한숨 속에서 삽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름드리 한 수도 파이프를 연결한 것과 같습니다.
이 아름드리 한 수도 파이프를 통해서 축복의 생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큰 믿음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감사와 감격, 찬송과 기쁨, 전진과 승리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 모든 성도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에 채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데 우리 믿음의 그릇이 작아서 이 큰 축복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큰 믿음의 그릇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큰 믿음을 소유함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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