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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대 32명의 설교 모음

본문

2000년 2학기 과정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설교실습일자 : 2000년 월 일 설 교 학(성종현교수)
설교원고 : http://www.church4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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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 6:60 - 69
교수평가
제 목 : 제자의 길

설 교 자 : 김성렬


서 론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던 초기에는 겨우 12명의 인원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더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서 12명은 70명으로 또 거기서 120명으로 나아가 500명, 3000명, 5000명으로 점점 불어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따르는 숫자가 더 불어간다는 일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많이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본문 속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들의 굶주림을 아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하나님께 축사하신 후 떼어 나누어 준 결과 5천명이 먹고도, 그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를 채울 정도로 큰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무리들에게 큰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기적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자는 여론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는 그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먹고 끝나는 보리떡이나 물고기 사건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떡 되시는 자신에 대하여 소개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수군거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는 것입니다(41-42절).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이들의 이러한 수군거림에 부닥쳐 끝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르치시기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51절). 그러자 마침내 유대인들 가운데는 다툼이 일어났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떠나 많이 물러가고 수천 명이 따르는 자리에서 이제 다시 열 두 명의 제자의 자리로 바뀌어진 다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 질문은 제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매우 심각한 도전이 되어 부닥쳐 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 론

1. 제자의 길은 구분이 분명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60-68절)

1) 본문 설명

그렇습니다. 제자의 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여론에 따라 움직일 때 거기에 같이 대세를 따라 걷는 것을 두고 말하지 않습니다.
몇백명, 몇천명 심지어 몇백만명이 움직여서 동조하고 옳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세상과는 구분이 분명한 하나님 세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있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절) 즉 이 태도는 대세를 따라 여론을 따라 다른 사람이 가니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시편 16: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라고 했을 때,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히브리 말로 ‘카도 쉬’ 곧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에 의해 세상에서 분리되고 성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망시키고자 작정하시고 그 실상을 알아보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성을 사유해 달라고 힘써 간구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18:23-25절에 보면,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이같이 하사 외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외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이 때 내세운 아브라함의 기도 제목은 소돔성으 사람 많음에 대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룩한 문화의 찬란함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친척 조카의 생명 보존만을 이유로 내세운 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성에 있는 의인을 위해서였습니다.
의인! 그것이 바로 ‘카도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자가 있는 곳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3) 적용

단지 이는 숫자에 관계 없이 구분이 분명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구분이 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애,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또한 제자의 길은 구분이 분명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제자의 길은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67-68절)

1) 본문 설명

“너희도 가려느냐”(67절)는 12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절)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의 길에는 분명한 목표가 주어져 있으니 그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고 고귀한 인품을 지녔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요,
아무리 땅위에서 남보기에는 미천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적을 이룩했을 때는 그 인생의 값어치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누가복음 16:19-31절에 나타나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십시오.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잃어버린 다는 것 사이에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걷기가 때로 힘든 이유는 아무런 목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목표가 주어져 있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목표를 이룩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요, 이 세상에 주어져 있는 일도 이 일을 하러 나섰다가 그 일은 깜빡 잊어버린 채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비웃지 않습니까? 하물며 신앙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목표를 정했으면서도 그것이 분명하지 못할 때 어찌 되겠습니까?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해 사사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그는 블레셋에 대한 공격보다는 오히려 블레셋 여자에게 홀딱 빠진 모습만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노릇입니까?(삿14:1)

3) 적용

우리도 때로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경우 그만 깜빡 이야기 하던 주제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만 있자, 내가 무슨 이야기 하려고 했던가?’ 하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두 번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목적을 흐리는 사람은 그것이 잘못 될 때 끝내 인생과 그 영혼에 실패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건대 성도로서의 삶과 생애에 ‘영생’이라는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의 길은 구분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면 돌아서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제자의 길은 한 번 시작했으면 돌아서지 않는 삶을 가리킵니다.(68-69절)

1) 본문 설명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하는 이 각오는 다른 사람이 다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할 수 없습니다 하는 각오입니다.
왔다갔다 우왕좌왕하는 사람은 이 일도 저 일도 성취할 수 없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도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과 더불어 큰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왕후 이세벨이 이를 교훈삼아 돌아설 생각을 않고 기어코 그를 잡아 죽이고자 했을 때입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그만 낙심을 하고 죽고자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사 끝까지 완수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왕상19:1-21).
그 결과 마침내 엘리야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훌륭하게 이룩해 내었습니다.
그는 시작하고서 중도에 그만두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3) 적용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 가운데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을 생각을 않고 남의일에 과도히 관심을 기울이다가 자기는 실패로 끝맺음하는 경우들을 자주 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불만, 어떤 지도자의 편견된 행동에 대한 오해, 내가 만난 사람의 말 때문에 오는 불평, 그것이 내 신앙의 가늠대가 되는 경우들이 너무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송중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하는 가사처럼 참으로 제자된 성도들은 한 번 시작했으면 뒤돌아 서지 않겠다는 절대적 믿음이 필요합니다.

결 론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주님의 제자 된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제자로서의 구분이 분명한 삶을 항상 살아 가도록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항상 목표가 무엇이고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셋째,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동아설 수 없는 삶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힘써 신앙의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칭찬받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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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 21:15-23
교수평가
제 목 :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설 교 자 : 김윤식


서론

우리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지 제자 훈련이 유행화 되었습니다. 마치 새로운 유행 물결을 타지 않으면 촌스러워 지는 듯 교회간에 경쟁하다시피 제자훈련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배출되면서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음을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교육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어쩌다 보니 라이센스 하나 정도 마련한 것이 아닌지요.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한마디로 고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마데테스는 ‘배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근 마데는 ‘노력으로 얻어진 생각’ ‘훈련’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는 제자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훈련 속에 고난, 수고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제자의 삶을 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 제자가 되는 길이 한 장의 자격증서로 대체되어 가는 현 실정을 통감해 보면서 이와 같이 난무하며 무감각해져 가는 신앙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한 신학생으로서 진정한 제자 되는 길을 심각하게 고민해 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제자로서 실패의 삶을 살았던 베드로를 주님은 다시 찾아 오셔서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며 주님의 참된 제자로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조명해 봄으로 저와 여러분이 참된 주님의 제자로 거듭 나야 하겠으며 또한 그 일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주님의 제자의 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론

1.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요21:15).

1) 본문 설명

불쬐는 현장에서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까지 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조반을 나누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까지 장사된 것을 확인한 제자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보면서 긴장하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부름 받기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숯불 앞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주를 사랑한다고 했던 고 백들이 거짓으로 나타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데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을 하지만 세 번째 질문 앞에서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주님을 위하며 살아왔던 날들이, 그 열정이 얼마나 힘이 없었고 무가치했던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 아픔 속에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는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실패를 치유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인간적인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심정으로 사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주님의 은혜를 모르면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의지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때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그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적용

지금 베드로는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고 낙심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을 목도하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허탈감과 낙심에 빠져서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베드로가 있는 그 자리에 주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단 한가지만을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사랑 고백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보다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가장 부끄러운 장소입니다. 가장 비참한 장소가 바로 여기 이 질문에 대답하는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주를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베드로의 진심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그 사랑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열심과 정성을 다해 보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마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될지 스스로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진정한 고백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물음을 오늘 우리에게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캅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총독은 폴리캅이 노령이기에 황제를 두고 맹세하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 폴리캅은 ‘내가 86년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 분은 한번도 나를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응답한 후 기쁘게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가장 사랑한 제자의 본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그 후의 그의 삶의 진로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맡긴 책임에 대한 그의 헌신을 통해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의무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통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풍토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정신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 속에 침투해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주님의 어린양을 먹여야 합니다(요 21:15).

1) 본문 설명

베드로는 이제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고백도 합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라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묻기만 하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조건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주님이 찾아와 주신 그 사랑이 우선이지 내 열심, 정성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내 정성을 바쳤기에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묻기만 하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의 세부 항목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기 20장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건져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양을 먹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만 고집하기에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았듯이 제자들도 동일한 고난을 받을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말씀만을 먹고삽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만을 고집하는 참된 주의 제자는 고난과 함께 그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인 ‘내 양을 먹이라’ 는 명령을 받은 후부터 이 명령을 잘 지켰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벧전 5:2)라는 교훈과 함께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는 명령을 할 정도로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사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명령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두가 목자이기 때문에 어린양들을 돌보며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 적용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말로 부탁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주님이 맡긴 사명은 베드로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확인될 때에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명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면 주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삼각산 꼭대기에 앉아서 신비한 능력을 구하면서 사명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혹 바다 위를 걷게 하신다면 온 세상을 간증하며 다니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초막집 셋을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가는 곳이면 옥에도 갈 것이며 죽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죽으러 가야겠다고 하실 때에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다 위를 걸어 본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주님은 베드로를 가장 불안한 마음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에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맡겨집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나도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 나는 모르지만 오직 주님만은 아시나이다. 그리고 주께서 응답하실지 안하실지 나는 모르지만 주님만이 아십니다. 나는 갈길 모르나 주님 인도하소서 라고 고백될 때에 주님안에서 맡겨진 충성된 삶을 감당하게 됩니다.

3.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요21:19)

1) 본문 설명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할 일을 명하신 다음 그의 고난받을 일을 그에게 명하십니다. 그에게 사도의 영광을 확인시키신 후 그는 이제 그에게 예정된 순교자의 영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미리 아셨던 것과 같이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고난을 미리 아셨으며 비록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반적으로 그들에게 예언 하셨습니다. 그의 양을 먹이도록 그에게 위탁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그가 그 일에 있어서 안일과 영광을 바라지 말고 오히려 고통과 핍박을 기대하며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그들을 떠나시면서도 비록 다른 방향에서 행하게 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 는 계속되는 의무는 그가 주신 계명과 자기들에게 보이신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때에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126:2).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빌2:17).구주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산 소망을 갖게 되었다’(밷전1:3,4).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자아에 대한 승리를 얻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욕구는 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도록 창조되었다.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한 인생에서의 참된 기쁨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주의 빈 무덤을 비추어 주는 영원의 빛을 봅니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가지고 우리를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통과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 입니다.

3) 적용

평상시 행복하다가도 옆사람과 비교하면 그때부터 불행해 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중소 기업에 들어 간 것을 감사하다가도 가까운 친척이 대기업에 취직되었다고 하면 그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를 못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 바라보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모습 앞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이 가슴에서 우러나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베푸신 그 사랑앞에 감사만이 나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장 큰 불행은 주님 바라보지 않고 주님의 첫사랑을 잊어버린 데 있습니다. 베드로도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옆 동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너는 나를 따르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동역자를 돕는 것은 각자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따라 갈 그 때 뿐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찾아온 그 사랑이, 감히 상상도 못할 그 사랑이, 베드로를 살렸고 오늘 우리들도 살렸습니다. 이 사랑의 감격을 아는 사람만이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말씀만이 영생의 말씀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만을 전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길이 험난하여 곁눈질 할 수 있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음성이 나의 마음을 울립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나와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지켜 주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의 정열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다시 너를 찾아 온 그 사랑으로 내 양을 먹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불러 주신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너의 열심이나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이 베드로에게 임함으로 베드로는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주님의 양을 친다는 사명감에 불타 주님의 그 사랑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엉뚱한 행동을 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을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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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10:1-2
교수평가
제 목 : 경건한 신앙인 고넬로

설 교 자 : 김재곤


서 론

한국교회가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성장이 둔화되어 침체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의 급격한 성장에 비하여 내린 비교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교회의 성장둔화와 침체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IMF 경제위기를 맞이하는 90년 후반은 한국교회의 또 다른 환란의 어려운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경제적인 한파로 인하여 각 기업이 도산에 도산을 거듭하여 한국 경제자체가 무너지는 아픔을 앓아야 했지만, 교회적으로는 사회적인 영향으로 성도들이 경영하는 기업이 도산을 당하거나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태출에 인한 실업률이 갈수록 증가하여 교회의 운영을 긴축재정으로 하여 불필요한 부교역자의 수를 각 교회는 줄어야 했었던, 교역자들도 어려운 시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실업률로 인한 삶의 회의와 방황이 날로 높아지면서 교회출석률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엎친데 곂친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풍전등화꼴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던져 셨는가? 라는 질문도 많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환란의 어려움을 통하여 교회는 정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는 것같이 보였던 성도들도 사업으로 인한 어려움이 더 이상 성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넘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들의 신앙이 하나님 자체를 잡은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잡은 것이기에 세상의 소망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자체만 잡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경건이라는 뜻은 “신앙이 돈독함”을 뜻하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유세베스”입니다. 경건한 신앙은 신앙이 돈독하기에 분명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환란의 풍파가 일어나도 세상이 천지개벽되어도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는 신앙.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소유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중에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고넬로입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또한 그 경건한 인물이 어떠한 열매를 맺고 살았는가에 대하여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경건한 신앙인 고넬로”제목으로 말씀을 드릴 때 다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과연 고넬로는 어떻게 신앙을 하였기에 성경에 경건하다고 즉 신앙이 돈독하다고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본 론

1. 온 집안을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든 자였다.(행10:2 상반절)

1) 본문설명

먼저 1절을 보니까 고넬료의 신분에 대하여 밝혀두고 있는데,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이 위치한 곳으로써 이 도시에서는 신약시대에 와서 대부분의 지중해 지역의 항구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족들, 헬라인, 유대인, 로마인들이 섞여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다른 종족들간에 충돌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기에 이를 위하여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달리야라 하는 군대”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달리야 군대외에도 아구사도군대도 있었다고 역사가 요셉푸스는 말합니다.
어쨌던 이러한 이방인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유대 사람들을 총괄하여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고넬로 백부장이 세워졌음을 그의 신분과 함께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인 고넬로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의 신앙에 대해서는 기록했는데 아주 열심있는 자로 “온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케”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그리스도 믿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마 유대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 회당에도 참석도 하는 하나님을 찾는 경건한 사람(Good-fearer)이었습니다.
고넬료. 그는 자신만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신앙을 갖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던 인물이었습니다.

2)성경적연결

딤전5:8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가족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특히 만일 자기 가족이나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자이며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엇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회복도 동일선에서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아니하면 사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치 못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가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옆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고넬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짐과 함께 사람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먼저 가족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자가의 성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참으로 어려움이 있을 줄 압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나 확실한 나머지 그 확실한 하나님을 온 집으로 더불어 섬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경건함이 거짓이 아니라 참된 진실되었음이 가족구원을 통하여 증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신실함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온 가족을 믿게 하여 그의 신앙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증거한 온전한 성도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증거를 가진 온전한 성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3)적 용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집안에서 자신이 먼저 복음을 받아 들린 자라면 우리가 처음 받은바 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형용할 것이 없어서 이웃에게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벅찬 기쁨과 감격과 환희를 누구에게 먼저 전하여야 합니까? 먼저 사랑하는 가족. 핏줄들입니다. 특별히 가족중에 처음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끊임없는 눈물과 기도로 가정의 구원을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저희 가족들중에는 저의 부친이 처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많은 환란과 연단의 통하여 사업의 실패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저의 부친이 교회에 나갈 당시에 아무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 처음 교회에 나가면서 그 받은 바 그 뜨거운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철저히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의 은혜를 온 가족들을 위해 그 열정을 뿜어내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열열한 열정과 뜨거움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열매로 맺어져 처음에는 본인이 그 다음은 큰 누님이 그 다음은 작은 누님이 마지막으로 모친께서 교회에 나가게 되어 지금은 온 가족이 구원이 이루지게 된 것입니다. 온 가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무려 20여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여전히 아직도 연약한 신앙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가정 처럼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혼자 믿는 다고 괴로워 하거나 근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구원을 향한 열심으로 인하여 낙심과 한숨과 아쉬움이 훗날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짐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믿고 확신하셔서 오늘도 열심히 씨를 뿌리되 뭇시로 주안에서 기도와 간구를 아뢰어서 여러분의 기도와 열심히 주께서 기억한 바되어 온 집안이 구원의 열매로 아름답게 꽃피는 그날이 속히 올 줄 믿습니다.

2. 많이 구제하는 자이다.(행10:2 중반절)

1) 본문설명

고넬료는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만드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은혜로 무엇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2절 중반절에 “많이 구제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고넬료가 왜 구체적으로 경건을 하다는 증거로 구제를 하였는가에 대하여 의문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도 있고, 인내도 있고, 여러 가지 경건의 증거가 될 수 있는 데 본문은 이런 것보다 구제쪽으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약간의 힌트가 주어지는 데 이 고넬료라는 이름은 B.C. 1세기에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유명한 장군 퍼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술라의 이름을 본딴 것으로 당시 남자의 흔한 이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그때 해방되었던 노예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술가 장군 가문의 후손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그 노예의 후손으로써 노예들이 가졌던 과거의 비애와 눈물과 회한을 기억하여 고통과 어려운 자들에게 힘이 되어야 되지 않는가 하는 자애심으로 구체적으로 선한 행동을 구제쪽으로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특히 구제는 누구나 조금씩은 하는 것이지만 사실 자신이 지난날 어려웠던 상황이나 여건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현실에서 기인하고 있어서 사람마다 조금씩 깊이와 높이, 수준이 다름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본 자 만이 그 빵의 의미와 가치를 알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넬료는 특별히 많은 구제를 통하여 당시의 어려운 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선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구제를 통하여 경건의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마6:2-4에 보면 구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잘 정리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즉 구제 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아버지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구제는 이 말씀과 연관하여 보면 어떴습니까?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의 구제가 주님의 말씀대로 엄밀한 중에 행한 구제로 하나님께 기억되는, 상달되었던 선한 구제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손길을 백성들에게 미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한 행동을 할 때에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하여 선한 행동을 먼저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는 원리입니다. 물론 그 원리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어떤 것, 예를 들어 어떤 성경적 원리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면 다른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합리화시키는 것보다는 그 본문에 가지고 있는 윈리를 먼저 우선적으로 충실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구제의 경우를 보더라도 먼저 사람에게 인정받기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구제가 우선이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제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분명히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명확하고 확실히 지시하여 기록되어 있음으로 더 이상 이 부분에 + 알파로 작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참된 구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적 용

이제 얼마되지 않아 연말연시가 다가올 것입니다. 거리에는 구세군들이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로 비롯하여 각종 자선단체들이 이웃의 따뜻한 손길을 베풀자는 캠페인을 벌릴 것입니다. 각 교회는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에 우리가 불우이웃을 위한 구제헌금을 바쳤습니다. 귀하게 써 주세요? 라고 방송국에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은 과연 교회가 방송이나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알려야 되는가? 곧 교회의 덕차원으로 말임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셔서 구제하시겠습니까?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상달된 구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 응답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구제의 원리와 방법과도 일치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구제 방법과 함께 그 예로써 고넬료를 구제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에게 상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전자를 선택하여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하시면 하나님께서 기억되고 갚으셔서 사람들에게 까지도 인정을 받을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고넬료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구제의 귀감으로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이 신학부 다닐 때 그 전도사님은 마산문창교회 안수 집사님이었습니다. 문창교회가 목요일마다 밥상공동체를 운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게 점심을 매 주일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경남에서는 문창교회가 처음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후 몇 달이 지난 후에 경남일보 즉 지방신문에 앞 표지에 보니 헤드라인 뉴스부분에 문창교회의 구제부분이 크게 사진으로 싣고 소개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메스콤에 알리지도 아니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들은지는 모르지만 기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간 것입니다. 그 동네에서만 자그마하게 시작한 그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는 그 교회를 들어 써셨서 경남의 많은 교회들이 구제를 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 여러분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먼저 상달되는 구제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 하나님의 역사로 통한 사람들에게도 인정과 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항상 기도하는 자이다.(행10:2-4)

1)본문 설명

자! 이러한 고넬료의 선한 행동이나 열매가 경건한 자신으로 인한 결실이라 우리가 생각하면 참으로 그 경건은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줄 압니다. 그러면 과연 고넬료는 어떻게 하여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2절을 보면 고넬료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하여 하나님께 기억되어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임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히브리어로는 “테필라”, 헬라어로는 “프로슈케”입니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생활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 신자들이 취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형태로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데, 그 예로 살전 5:17절에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고넬료는 그 요구 앞에 순종하여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를 함에 있어서 당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 보아서 유대인의 관습을 좇아 기도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의 “제9시쯤되어” 이런 것을 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데 그 시간은 저녁분향을 드리는 시간으로 유대인의 기도시간입니다.
자. 이렇게 고넬료는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정해두고 하나님과 교제를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구제와 경건에 더욱 힘쓸 수 있었고, 더 많은 구제도 하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그의 행한 모든 선한 일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응답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경건은 인간의 어떠한 선행적인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즉 기도의 응답을 통한 경건의 모습으로 영적인 사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이러한 기도에 의한 영적인 삶에서 열매가 맺힌 대표적인 모델은 아마 우리 예수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그가 직접 행함으로써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사복음서에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혼자서 가시고, 산에서 기도하고, 밤 새워 철야로 기도하셨고, 생의 마지막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도 기도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큰 일을 하시기 전에도 밤새워 기도를 했지만, 하루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반드시 기도로 시작하였던 것을 봅니다. 하루의 시작부터 기도로 시작한 예수님은 매일의 시간을 두고 기도를 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더불어 가는 곳마다 착한일과 메시야 사역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온전히 그 사역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윗도 시편 108편 2절에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드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시57편 8절에도 “내 영광이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매일의 삶을 기도로서 항상 아뢰었던 다윗 그도 역시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선지자 중에는 특히 다니엘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던 기도의 삶을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시험과 역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있음으로 그 나라 왕까지도 그를 인정하여 그를 높은 자리를 두어 포로된 나라에서 귀하게 높임을 받았던 인물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3) 적 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군사가 전쟁중에 총을 가지지 않고 전쟁에 나가서 전쟁에서 이기려는 어려석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영적인 군사인 우리들을 항상 바쁘게 만들어 기도를 쉬거나, 나태하거나, 적당하게 하여 무기력한 당나라 군대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의 전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자기가 하고 싶을 때 내가 어려울 때만 하도록 지시를 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오늘의 성도의 연약한 모습이고 현실입니다.
혹시 성도님들 가운데 자신의 영적 무기력함과 무능력을 탈피하여 능력있는 성도가 되고 싶은 사람이 계십니까? 혹시 내가 10년이 넘게 교회에 다녀도 영적인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내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적으로 뜨겁게 확실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서 그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날 때까지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하면 여러분의 영적인 무능력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영적인 열매가 없는 것에서 영적인 열매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생각속에 있는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고 느껴질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여 그 분의 지시함속에서 많은 구제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모든 시작은 기도로 시작하여 그분의 응답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항상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있기를 소원드립니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경건하십니까? 그러면 그 경건의 증거가 있습니까? 그 경건을 소유하고 있으면 반드시 소유한 것을 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으로 한나님을 경외케 하였고, 또한 많은 구제를 어려운 자들을 위하여 하였고, 이 모든 것을 위한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그의 경건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증거가 여러분의 증거로 남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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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막1:21-28
교수평가
제 목 :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설교

설 교 자 : 김종환


서 론

이 세대를 가르켜서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말합니다. 서점마다 쌓여있는 책들과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 그렇지만 그 어느 책들과 정보 속에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고 하는 자들의 가르침 속에서도 절대적인 권위와 인생의 참 안식과 기쁨을 찾기가 힘든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시대를 향하여 신적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될 것입니다.

본 론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교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함으로서 신적 권능을 입증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저명한 랍비들이나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타락한 인간들을 교훈 하려 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생명력 없는 가르침과는 완전히 구별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인생들을 가르치시고 귀신들을 쫒아 내셨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본문 설명

본문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본문 속에서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복음서에서 상당히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예수님의 초기 전도사역의 주요 거점지 였으며 그곳에는 예수님의 집과 마태와 베드로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한마디로 “살아있는 복음”의 핵심의 주역들이 다모여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2) 성경적 연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찌된 일인지 마11:23-24절에 가버나움에 대하여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11:23-24절을 찿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메카라고 불리우는 가버나움을 향하여 외치고 계시는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 이 땅에 동일하게 외쳐지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과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가버나움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됩니다.

3) 적 용

지금 이 세대가 가버나움과 같은 세대가 아니라고 우리는 장담할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같은 말씀이 정열적인 신실한 종들을 통하여 목이 터져라 증거되고 있지만 강철로 만든 심장을 가지고 전혀 반응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종으로 부름받은 신실한 목회자들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앞날을 가슴 아파하고 기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들의 심령속에 거치레함을 사정없이 찢어버리는 회심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 어쩌면 복음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 가버나움을 향하여 말씀하셨던 신실한 하나님의 질책이 이땅에 이루어 질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본문 설명

21절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6시경부터 토요일 오후6시경” 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마다 있었습니다. 회당의 주요 목적은 그곳에서 모세오경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풀어지는 교훈은 회당장에 의하여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사람이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21절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이 과거로부터 계속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변화되지 못한 가버나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오늘 우리 시대에 예고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2절 말씀 속에는 뭇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는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서기관들과 전혀 다른 진리의 선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당대의 학자들의 지식과 스승들의 교훈들을 인용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 속에는 심령의 갈급함과 뭇긴자들의 영혼에 대한 자유를 선포하는 생명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저와 여러분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 시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이론이나 잘 발달된 과학문명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아멘 하십시요.” 지금 이 시대는 단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줄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세대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린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깨어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은 필요로 합니다.
“세상과 교계의 잘못된 물결을 거슬러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열왕기상 19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서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 모두다 죽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우상에게 항복했으며 선지자는 나만 남았습니다. 라는 엘리야의 고백에 하나님께서 - 아니다 - 왕상19:18절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안고 신앙을 지킨 7천명을 숨겨두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 하십니까?

3) 적 용

오늘 그 하나님께서 “우리 학교”를 보시고 타락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믿음을 굳게 지킨 “신실한 종”들을 변화될 대한민국을 위해서
내가 “기독신학대학원”에 숨겨두었다는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학교를 향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숨을 건 신앙 속에는 아들을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의 역사를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눈물겨운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 죤 폭스가 쓴 순교사를 읽어보셨습니까? 순교사를 읽으면서 부족한자의 가식적인 하나님 사랑에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증거하다 교수형으로 사라져 가면서도 즐거워 하였습니다. 의심많던 도마는 인도의 오지 칼라미나에서 복음을 전하다 창에 맞아 죽어갔습니다. 시몬은 십자가에서 처형 되었으며 마가는 밧줄에 묶인채 불속에서 죽어가면서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돌로매는 피부를 벗기우고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안드레는 복음으로 인한 죽음의 위협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면 십자가의 영광을 전파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기쁨으로 죽음을 맡이 하였습니다. 마태는 창에 찔려죽었으며 빌립 집사님은 딸고함께 십자가에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어떻습니까? 복음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복음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 세대 화석같은 세대, 영적 무기력에 빠져있는 세대를 살고 있으며 교회의 첨탑은 하늘을 찌르듯이 올라가지만 영적인 권위는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져있는 아픈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와 영적인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린 세대를 향하여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의 권세에 입각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할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 이를 듣는 사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1) 본문 설명

23-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줄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 이다.
본문 말씀은 어두움의 권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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