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4)
본문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라-
마태복음 6:14-15, 마태복음 5:23-26
10.Nov.1999
Internet World Missionary University Cyber Pulpit
친애하는 선교사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선교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선교사역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겨울이 오기 전에' 네번째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6:14-15절의 말씀과 마태복음 5:23-26절의 말씀입니다. 이 두 곳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먼저 마 6:14-15절의 말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 다음 마태복음 5:23-26절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화해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아멘. 이 두 곳의 말씀을 중심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에 크게 용서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준다는 말을 사용할 때 '관용(寬容, tolerance)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관용'이란 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여 용서해 주는 '아량'이란 뜻입니다. 이 '아량(雅量)은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나타내는 '도량'(度量)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관용'(tolerance)은 '공차'(公差)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차'의 의미를 두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1)화폐의 법정 품위(法定品位)와 양목(量目)에 대한 실물의 품위나 양목의 차로서 법적으로(법률로)인정된 범위를 말합니다. (2)도량형(度量衡)의 법정기준에 대한 실물 도량형기의 오차로서 법률로 인정된 범위(한도)를 말합니다.(allowance)
다소 설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하면, '관용'의 의미를 가진 공차(公差)란 은화나 금화를 만들 때 예를 들어 그것을 100개를 만들었을 때 그 무게를 일정하게 똑같이 만들 수가 없고 근소한 '오차'가 생기는 법인데, 그 근소한 '오차'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관용(tolerance)이라 합니다. 그리고 '말'이나 '되'같은 도량형의 기구를 만들 때도 아무리 정밀하게 제작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오차가 생기기 마련인데 그 오차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법적으로 허용해 주는 한도를 '공차'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관용'이란 '잘못에 대한 참작'이라 하겠습니다. 이 잘못에 대한 참작이란 잘못에 대해서 너그러운 아량과 도량으로 크게 용서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독일어에 '꾸짖다' '나무라다'라는 뜻을 가진 'zeihen'(짜이언)이란 동사가 있습니다. 즉 이 '짜이언'이란 동사는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준다'는 의미이고, 잘못한 일에 대하여 '책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 앞에 'ver(페어)라는 비분리동사의 전철이 앞에 오면 'verzeihen'이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사면하다' '면죄다'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확실해 지는 것은 '용서'란 잘못에 대해서 책하고 응분의 벌을 주어야 할 것은 '그만둔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부족하고 잘못이 있고 오차가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허물투성입니다. 온전치 못합니다. 우리는 함량미달이며, 매사에 오차가 있고 부족하며 잘못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은 이같은 우리들의 부족과 잘못을 그리고 오차를 봐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에게 비록 허물이 있고 오차가 있고 실수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묵인하고 허용해 주신 것, 이것이 바로 '용서'이며 관용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로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지금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토록 우리가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큰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며, 형제에게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말한 '일곱번'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최고 정도를 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생각으로는 이만하면 아주 많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숫자는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몇번까지냐'는 정도의 제한 자체를 철폐한 것입니다. 정도의 제한 자체를 철폐한 것은 어떤 잘못이라도 누구라도 어떤 경우라도 완전히 끝까지 한없이 용서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서는 조건 없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데로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도무지 형제를 용서할 만한 아량이나 도량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현실을 한번 살펴봅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형제의 잘못에 대하서는 너무 인색하며, 형제들의 잘못과 실수 부족과 오차를 참작해 주지 않고, 계산하고 따지고 책하기에 서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자그마한 '티'는 보면서 그것을 수근거리고, 바난하면서도, 내 눈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그것을 개의치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한 대를 맞으면 한 대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쳐야 직성이 풀리고 맞아서 이빨하나가 빠지면 그 이상의 이빨을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한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복수해야만 하고 손해를 입으면 그 손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원수게는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범죄한 형제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自然人'으로서 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그 사랑이 나를 강권할 때 그 사랑으로 인하여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손목사님은 실제로 '사랑의 원자탄'으로서 삶을 살으신 분입니다.
『손목사님에게 동인(東仁)과 동신(東信)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사건에서 사범학교학생과 고교생이었던 그들은 아깝게 목숨을 읽었습니다. 공산당들에게 처형될 때 그들은 서로 감싸주고 대신 죽으려는 우애를 보였으나 결국 둘 다 안재선이라는 같은 또래 청년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이 지역은 국군들에 의해 평온을 찾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란 청년도 체포되었습니다. 두 아들을 한꺼번에 읽고 슬픔에 잠겼던 손목사는 기독자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려고 각계 요로를 통해 안재선의 용서를 탄원하였고 결국 이에 감화된 당국에 의해 안재선이 풀려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손목사님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은 원수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앉았던 그 밥상에 그들을 죽인 살인범 재선을 앉히고 조반을 먹을 때 내 입안에는 밥이 밥알이 아니라 모래알을 삼킨 듯 했다"라고 솔직한 인간적인 고뇌를 표한 바 있습니다. 안재선은 손재선이 되었고 그가 예수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그 후 신학을 공부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 놀라운 이야기!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으로서 자연인은 형제를 용서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직접 형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감히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함을 받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 받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했고 또한 형제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용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할 수 있고, 또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그리스도가 나와 형제 사이에 없는 한에 있어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의 형제를 용서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또한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소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형제를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비싼 값'을 지불하심으로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데 있어서 '조건'을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용서는 전혀 무조건적이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가 범죄한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납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야만 우리가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날마다 드리면서 '사죄의 기도'를 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같은 용서를 위한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똑바로 기도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용서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통하는 '업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는 '이미' 우리가 예수 안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용서의 반응이요 메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제자들은 명령을 받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즉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이미 용서했나이다"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르므로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이유는 용서가 있어야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차 용서하지 않고는 화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원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가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용납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없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일, 이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인간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겨울이 오기 전에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특별히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청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상태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여러분에게 잘못한 형제들이 있습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 형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선교 현장에서 원수시하며 서로 반목 질시하며 다투고 싸우며 불편하게 지내는 동료들이나 형제들이 있습니까?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화해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