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하나님
본문
황준식 목사 [성경본문] 삼상 20:12-17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13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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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자신의 생명과 같이 다윗을 사랑하는 요나단!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둘의 우정에 놀라운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16절 = 언약. 17절 = 맹세. 23절 = 언약을 말할 때 쓰는 표현. 42절 = 맹세.
곧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사이에는 언약 또는 맹세라는 놀라운 요소가 있다는 점입니다.
17절에서 맹세라는 이 단어는 “샤바”라는 히브리어로서 그 뜻은 목숨을 걸고 하는 “언약”이란 뜻입니다.
곧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믿고 사랑함으로 평생 변치 않을 목숨을 건 언약 또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이 맹세 또는 언약과는 결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언약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 세계에서는 이러한 언약적 사랑을 “의리”라고 하지요. 이 단어가 조직 폭력배에 쓰여서 아주 천한 단어가 되었지만 사실은 얼마나 귀한 단어인지 모릅니다.
남.녀 사이의 언약은 결혼이요 남.남 사이의 언약은 의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을 보시면, 남자간의 의리라는 것도, 언약과 맹세를 동반한 점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언약을 통하여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언약에 근거한 의리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17절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언약 내용을 보면 14-15에, 훗날에 네가 왕이 되더라도, 나를 죽이지 말며, 나와 및 우리 후손들에게 인자를 베풀라 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이 언약을 하는 요나단은 자신의 생명을 실제로 걸고 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요나단이 다윗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 사울이 알면, 요나단은 즉석에서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이 의리가 어떻게 지켜지는가?를 성경에서 보면, 우리는 신기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언약 얼마 후에, 요나단과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됩니다.
이 때, 요나단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이란 어린 아이였습니다.
요나단과 사울이 전쟁에서 죽게 되고 이스라엘이 패전하자,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요나단의 가정에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는 한 왕조가 전쟁에 졌다는 의미는, 곧 그 가문의 모든 사람이 칼로 몰살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아기를 키우던 유모가 아기를 업고 뛰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두 발이 부러지게 되면서 두발을 다 못쓰는 절룩발이가 되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요나단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이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 후, 몇 년 뒤에,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 제국의 왕이 되게 됩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마자 한 일은, 요나단이 살았는가, 또는 요나단의 자녀들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있는가를 알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다윗은 그 때부터 요나단의 아들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찾아내게 됩니다.
다윗 왕 앞으로 므비보셋이 오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며 덜덜 떨고 있습니다.
보통 왕정이 바뀌면 철저하게 기존 왕정의 직속 가족들은 반드시 죽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상천외의 선포가 있게 됩니다. 다윗이 모든 사람들과 나라 앞에서 명령합니다. “오늘부터 사울의 모든 개인 소유는 므비보셋의 소유이며 그리고 므비보셋은 나의 아들들과 함께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
이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선포는 므비보셋이 다윗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을 줄 알았던 므비보셋은 오히려 왕의 식탁에 앉게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찾) 삼하 9:7-8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보시나이까”
그 이후, 삼하9:13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는 계시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살게 되었고 자신은 가장 천대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이렇게 은혜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므비보셋의 입장에서 다윗이 이렇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는 이유를 제시하였습니까? 전혀 없지요. 그러나 므비보셋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는 현장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거저 얻는 것이지요. 완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다윗의 의리로: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1. 그래서 므비보셋을 자녀 삼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Not Because of 므비보셋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은 므비보셋!
이 이후에 다윗에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야 하는 비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다윗을 져 버립니다. 의리를 져 버립니다. 배은 망덕을 행합니다.
므비보셋의 사환이었던 시바라는 사람의 고발에 의하면,
므비보셋은 엉뚱한 착각을 하였습니다. “아들 압살롬과 아비 다윗이 분쟁하는 다윗의 왕가는 곧 멸망하고 다시 사울의 왕가가 설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사울의 왕조를 잇겠다.”
나중에 다윗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을 때,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질문합니다. “왜 나를 버렸느뇨?”
므비보셋의 대답하지요. 시바란 놈이 거짓말한 것입니다. 나는 발이 불편하여 다윗왕과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다윗 왕은 곧 시바와 므비보셋으로 대조 심문하여 므비보셋의 거짓을 들쳐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더 이상 묻지 않고 덮어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므비보셋을 제거할 수 있었는데도,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에 그는 므비보셋의 생명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요, 반역 죄를 덮어 둔 것입니다.
왜!!!
다윗의 의리로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임
2. 다윗의 의리로: 므비보셋을 용서하였습니다. 그의 죄를 덮어 주었습니다. Not Because of 므비보셋
마지막으로, )
이스라엘에 삼년동안 심한 기근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왜? 이런 고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브온 족속과 언약 (맹세를) 하길, 절대로 기브온 족속을 죽이지 않기로 했는데, 사울이 언약을 깨고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언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이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기브온 사람과의 언약을 깬 것을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기브온 사람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상할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때 기브온 사람의 회답이, 사울의 후손 중 일곱을 내 주시면, 우리 족속과의 언약을 깨고 우리를 멸절 시킨 죄에 대하여 당신께서 보상한 것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제안을 받아들인 다윗왕은,
찾) 삼하21: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다윗은 므비보셋을 심판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왜?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의리로 므비보셋을 살린 것입니다. not because of 므비보셋.
한 마디로 다윗의 인생은 언약에 신실한 그러한 의리로 똘똘 뭉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Concept) 이 있다면,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언약을 잘 지키는 것을 성경은 “신실하다, 미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 미쁘신 분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언약이라도 한 번 하시면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인하여 이 땅의 사람들과 많은 언약을 하셨습니다.
노아와의 언약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사, 다시는 전세계적 홍수로 인류를 멸망치 않으십니다.
인류의 그 지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물로 심판하심을 보류하심은 바로 노아와의 언약에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사,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의 별들처럼, 바다의 모래알 처럼 많게 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에 따라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 씨”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에 지금까지 신실하신 그 신실함 때문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죄가 많음에도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의 공로로 우리를 무한하게 사랑하심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토록 버리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영원에 언약에 우리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신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므비보셋 사건이 왜 그토록 자세히 성경에 나와있는가에 대하여 영적으로 고찰해 보면 바로 우리 믿는 자가 므비보셋과 같이 무조건적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다윗 –(언약) --- 요나단 하나님 --- (언약) --- 예수님
므비보셋 <===> 우리들
마치: 다윗 (언약 ) 요나단: 므비보셋:
왕자를 삼으시고: 자비/생명/구원… 왜? 언약/신의.
므비보셋은 불구자/배반자/죄로 멸망 받을 자.
하나님 (언약) 예수님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삼으시고)
자비/생명/구원 … 왜? 언약/신의
%% 자녀 삼으심: 왕의 테이블에 앉음.
%% 용서를 덮으심: 우리의 죄악대로 갚지 않으심.
%% 구원하심: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바로 그 분이 의리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신의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신앙의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가 “신의”인 것을 보게 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바로 의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완벽하게 의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 ß (신의) --> 예수님 -> (신의) 백성 : / 부패/불순종. …
-------------(무조건적 은혜) ------------------>
따라서 하나님을 닮는 삶, 예수님을 닮는 삶이란 신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세대는 의리가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1) 단둘이 신의를 가지고 비밀을 이야기했는데 자신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믿고 이야기한 그 사람이 신의를 져 버린 것입니다.
2) 상황이 변한다고 맺었던 약속들을 쉽게 취소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신의를 져 버리고 의리를 져 버리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제 어제 했던 약속을 밥 먹듯이 바꾸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다윗이 므비보셋의 배신을 보면서 상황을 핑계하였다면, 므비보셋은 가차없이 즉사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어리석음을 보시고 ‘아~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 나는 너와의 언약을 지킬 수 없다’고 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지옥의 자식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 졌다고 부모를 부모로 모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제 돈을 꿔가며 언약했던 약속을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며 돈을 갚지 않은 모습들….
결혼을 통하여 육체의 순결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던 여자가 어느날 어떤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서 바람을 피우는 모습등…
이러한 삶등은 신의를 져 버리는 부끄럽고 죄악된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상황이란 것 때문에 자신의 약속과 신의를 져 버리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권력을 잡기 위하여, 인기를 위하여, 부자가 되기 위하여, 의리를 쉽게 져 버리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의를 져 버리기에 이제는 정말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은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져 버림으로 간교한 사람이 되고 배은 망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악한 것인지,,, 의리를 져 버린 약삭 빠른 사람들이 떼돈을 벌고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이 되었고, 의리를 져 버린 사람들이 사업에 성공한 사례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신의를 져 버리며, 유명한 사람이 되고, 벼락 부자가 되고, 인기와 권력을 갖기 위하여 약삭 빠른 가벼운 인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종 의리와 신의를 져버리고 떠나는 자들은, 그들의 평생 인생 속에서 진정한 의리와 신의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신의를 져 버렸기에, 남들이 신의를 지킬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리의 세계는 아주 멋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리’ ‘신의’ ‘정절’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멋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약 10년 된 것 같은데, 한국 드라마 중에 모래 시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 본 적이 없지만) 교회 청년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그 깡패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멋있는 세계라서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이 깡패가 되기를 사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 자라나면 뭐가 되고 싶냐고 하면 깡패가 되고 싶다고 말한 어린이들도 많았습니다.
지금 이 의리라는 귀한 단어가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쓰이지 못하고 기껏해야 깡패의 세계에서나 쓰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사실 깡패 세계 속에서의 의리는 그 의리의 대상이 이미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왜곡된 의리입니다. 그들의 의리는 잘못된 동기를 위한 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보다 더 의리 있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한 교회공동체입니다.
가장 멋있는 신의의 사람들! 의리의 사람들!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로마 시대의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라도 형제들을 지켰습니다.
일제 신사 참배 시의 우리 믿음의 목사님들! 그들은 한결 같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던 주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를 읽어 보세요. 그 분의 의리는 너무나 깊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 성도들간의 서로를 지켜 주는 의리!
이와 같이 만일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이 다시 교회에 되살아난다면, 정의와 의리를 위해 살기 원하는 많은 이 세상의 청년들이 주께로 돌아 올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보다 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공동체는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배신하고 도망갔어도, 다시 찾아오셔서 안아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의리가 없었어도, 우리 주님은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사실, 주님의 의리가 아니었던들, 현재의 베드로 같은 자가 있을 수 없었으며, 지금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얻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그 분이 의리가 계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한번 정하시면 끝까지 지키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며,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의리를 증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뭐라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그 분은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듯, 이미 우리를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다하여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주를 향한 우리의 의리요,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신의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욕심 때문에 약속 깨뜨리지 말고, 인기 좀 얻으려 의리와 신의를 져 버리지 말며, 돈 몇 푼 때문에 신앙과 우정과 이웃과 교회를 버리는 사람들 되지 말고, 예수님처럼, 정말로 신실하고 의리 있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신다면,
우리도 마땅히 신의의 사람, 의리의 사람이 되어야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의리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약속을 지키는 신용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의리있고 신실한 주님의 백성 되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