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가는 자"
본문
창세기 32장 1-32절
석기현 목사
예로부터 강이란 것은 육상 통행로를 방해하는 난관이 되어왔습니다.
단단한 땅바닥으로 이어지던 길이 일단 강을 만나게 되면 전혀 발을 디딜 수 없는 표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나룻배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아예 다리를 만들어서 영구히 길을 이어놓기도 해왔던 것입니다.
'도하(渡河)' 즉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처럼 길가는 사람에게 현실적으로도 보통의 길과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하지만, 때로는 정신적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해주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을 통과하게 만드는 경우도 자주 벌어집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정복에 출정했던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하여 진군해오다가 루비콘 강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 강은 시저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지역과 그가 월권할 수 없는 로마 사이에 있는 마지막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그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이제 공식적으로 나라에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셈이 되는 것이었고, 만약 그 일이 실패하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가 걸려 있는 그 중차대한 기로에서 루비콘 강을 바라보던 시저는 저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말을 몰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저에게 있어서 그 루비콘 강 도하는 자기의 한 인생 전부를 가름하는 최대의 도박판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 강을 건너간 순간, 그는 다시는 되돌아올 길이 없이 그저 로마를 향하여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국면,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한 장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강을 건너간다는 것이 이처럼 정신적 및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성경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 중에 가장 첫 번째의 것이 바로 야곱의 얍복강 도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맨손으로 고향 땅을 떠났던 야곱은 이제 말하자면 금의환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아내와 여러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가축을 크게 두 떼나 거느리는 거부가 되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귀향길에서 야곱은 바로 얍복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저 행로가 좀 어렵게 되는 정도가 아닌,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얍복강 건너편에는 형 에서와 그가 거느리는 사백인의 사람들이 야곱을 마주 향하여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20년 전에 야곱에게 속임 당한 일에 대하여 여전히 분기탱천해 있을 것이며, 그 형이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면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야곱은 그 얍복 나루에서 문자 그대로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시저의 경우처럼 이제 그의 인생 전체의 성패를 걸어놓고서 다시는 물릴 수 없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거는 일이었습니다.
즉 일단 건너가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다시는 되돌아 올 길이 없는 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분수령이 되었던 얍복강을 어떻게 해서든지 건너가야만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또한 만약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면 이제는 밧단아람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발붙일 곳 없는 신세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주일은 한 해를 보내면서 새 한 해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역시 얍복강을 앞에 두고 있는 야곱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2006년을 향하여 되돌아 갈 수 없으며, 오직 우리가 건너가게 될 2007년의 한 해를 성공하고 복을 받느냐 아니면 또 허송하고 실패하느냐 하는 양자택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단의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 '얍복강'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겠습니까?
1.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경주하면서 이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본문 32장 13절부터 20절에 "13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세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향하여 가던 도중에 자기 종들을 앞서 보내어서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던 형 에서에게 자기의 귀향 사실을 미리 전해주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 종들은 야곱의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아직도 에서가 20년 전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틀림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줄로 생각되어 "심히 두렵고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차피 피할 길도 없고 닥쳐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자 야곱은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보면 그는 우선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떼는 피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앞 일이 어찌될지 알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야곱이 판단하기에는, 에서와 조우하게 되면 그의 물리적인 공격을 받게 될 위험이 가장 농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진 소유물을 일단 둘로 분산시킴으로써 만일 에서가 자기 가축 떼를 공격해오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처럼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을 뿐 아니라, 그 나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 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봉독했던 말씀대로, 자기 형 에서를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선물은 일단 양적으로도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는 방법에 있어서도 치밀한 의도와 계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여러 떼로 또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자들에게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가 너희들더러 '이게 뭐냐?'하고 물으면 '당신의 종 야곱이 형을 위하여 보내는 선물이고, 야곱은 뒤에 따라오고 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첫째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자 뿐 아니라 그 뒤 둘째, 셋째, 넷째에 이르기까지 각 떼를 거느리는 모든 종자들에게 꼭 같이 그렇게 말하도록 사전교육을 철저히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복잡한 방법으로 선물이 전달되도록 한 야곱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응어리진 감정을 한 순간에 삭히기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고 좋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한 번에 갖다 주면 에서의 마음이 돌아설 시간적 여유가 매우 짧은 것이고, 그처럼 짧은 순간에 그런 획기적인 감정의 변화가 에서에게 일어나기란 매우 확률이 낮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양의 선물이라 할지라도 여러 번 나누어서 보내면, 처음 선물 받을 때 일단 그 형 에서의 마음에 약간만 변화가 있어도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받게 될 때마다 차츰차츰 마음이 조금씩 더 풀려서 나중에서 아주 자기를 용서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야곱은 치밀하게 계산했던 것입니다.
즉 야곱은 같은 양의 투자를 이용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꾀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를 두고 믿음 없어서 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위해 대비하는 일과 또 그 최악을 막아 보기 위하여 현재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그 두 과정 중간에서 야곱이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었음을 본문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의 그와 같은 철두철미한 준비와 노력은 결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믿음에 철저하게 바탕을 두고 행해졌던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잃든지 모든 것을 얻든지 하는 양자택일을 앞에 둔 사람은 어찌하든지 그 승부에서 이기기 위하여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넣게 됩니다.
무슨 드라마 때문에 '올인'(all in)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귀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슨 '배팅의 올인'이 아니라 바로 '최선의 올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도우심을 믿는 성도는 결코 그 믿음을 핑계로 해서 자신은 '내 몰라라.'하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요 사실상 위선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소원하고 또 기도드린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원들을 위해서 과연 얼마나 자신의 최선을 다했습니까?
기도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아니하고 그저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식의 기도, 사실 미신숭배자들과 별 다름없는 기도를 드려놓고서는 아무 응답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피할 길 없어 보이는 최악을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예 미리 포기해버림으로써 무방비 상태로 그 최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다고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내 가정이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내 직장에서 승진 못했다고, 내 사업이 축복을 맛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지난 한 해 동안 그것들을 위하여 과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 실상은 나의 무기력함과 나태가 진짜 원인이 아니었는지를 솔직히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실패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지만 노력을 하지 않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일 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의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 둔' 진짜 불충의 죄인 것을 우리는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허락해주시는 새 한해만큼은 그런 시행착오와 핑계로 일관하는 한 해가 되지 않도록, 어떤 불리해 보이는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일단 끝까지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이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바로 야곱이 보여 준 저 유명한 '얍복강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본문 32장 21절로 32절의 말씀에 "21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살펴보았던 대로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형 에서 만나게 될 것이 두렵다는 것을 솔직하게 아뢰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의 소유물들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에게 약속해주셨던 언약을 따라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고 또 형 에서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선물들을 먼저 보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자기 아내와 여종과 아들들과 마지막 소유까지 다 얍복강을 건너가게 한 후 야곱은 자기만 혼자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나중에 30절에서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 또는 "천사"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로 화육강생 이전에 전현(前現)하신 성자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또한 그 "씨름"은 단순히 힘을 겨루는 투기로서의 씨름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그의 간절한 심정이 마침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2장 3, 4절에 보면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씨름은 여기서 증거하고 있듯이 "울며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씨름이었고, 그 결과 그 기도에 응답을 받게 된 것이 곧 그 씨름에서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 씨름의 과정과 결판이 나는 장면을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쳐서 "위골"되고 "절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끝까지 간절히 그를 놓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날 그만 붙잡고 좀 가게 해주어라."고 야곱에게 부탁을 해올 정도로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자기 기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같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에 "네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무슨 암호 같은 내용이지만 사실은 야곱의 소원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까 호세아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곱"이란 원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이 이제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아주 멋진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원래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즉 형이 받게 될 축복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이 세상 태어나는 첫 순간부터 이미 발휘하고 있던 것이 바로 '야곱'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처럼 형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축복 받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형 발꿈치 잡는 정도가 아니라 형의 시장기를 이용해서 그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이라는 턱도 없는 세일 가격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 이삭까지 속이면서 에서인 체하고 그 앞에 앉아서 형이 받을 축복을 몽땅 가로채는 일종의 사기행각까지 벌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실로 복 받기 위해서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어들었던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야곱이 그날 밤 얍복 강가의 기도를 통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릴 줄 아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축복해주시는 주권자가 되어주지 아니하시면, 나 혼자서는 아무리 용쓰고 기를 써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결코 이 기도의 씨름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줄 아는,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변모되어 갔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복 받아야겠다고 기를 쓰고 형의 발꿈치를 잡던 야곱,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자기의 인생을 성취시켜보겠다고 형과 아버지 사이에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던 야곱이, 이제는 그 같은 과거의 야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해주시기만을 울며 간구하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에게 '네가 이 씨름에서 이겼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은 곧 그 간절한 기도가 축복으로 응답받게 될 것을 확인해주신 것이며, 그제야 야곱은 마음 놓고 얍복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양처럼 온순하게 만들어놓으신 에서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 자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덥석 자녀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세뱃돈 주세요."하고 두 손을 모아 벌릴 때, 그 손에 돈을 쥐어주는 것이 할아버지에게는 보통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 자란 대학생 자녀라 할지라도 그냥 용돈을 주면서 자기가 알아서 사도록 할 때보다는, 함께 쇼핑을 나갔다가 "아빠, 저 외투가 하나 필요한데, 이게 마음에 들어요."라고 부탁해올 때 "그래라."하면서 당장 그것을 사주는 것이 훨씬 더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순서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자신의 최선을 준비하고 나면 그 다음은 곧 그 문제와 그 소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하며, 특히 그 기도를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히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혹 야곱의 행세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복 받고 싶다는 욕심만은 굴뚝같이 솟아 있지만 그것을 성취하려는 과정에서 오직 철없는 야곱의 전철만 반복하지는 않았습니까?
옆 사람의 '발꿈치를 붙잡고' 내가 앞에 나서려는 편법만 날마다 궁리하지는 않았습니까?
가까운 친구나 형제까지라도 속여서 일단 나부터 잘되고 보아야 하겠다는 야곱의 심보가 지난 한 해동안 내 사고 방식을 좌우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같은 '야곱'이 먼저 '이스라엘'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주셔야만 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하나님, 이것저것 해주십시오."라고 자기의 요구사항만 차례로 한번 나열하고서 끝내어서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지'에 불과하지 결코 밀고 당기는 '씨름'이라고 불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인생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면서, 혹 어떤 결정적인 사건에 성패를 걸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더욱 문자 그대로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이 연말의 강가에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그 응답이 새해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이 강을 건너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또 하나의 강이 놓였습니다.
우리는 이 강을 반드시 건너가야만 할 사람들입니다.
2006년으로 되돌아갈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건너가야 할 강이라면 그 강 건너편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축복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갈림길만 있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강을 건너가는 자세와 방법 역시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일단 각자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의 복을 받기 위해서 교역자는 말씀과 기도와 심방과 전도로 최선을 다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기업이 번창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 성도는 또한 각자의 모든 땀과 노력과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뛰어드는 새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선의 투자 없이는 최선의 결과란 것을 하나님께서 내려주실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최선의 노력과 함께 이제 하나님께서 그 성패를 인도해주실 것을, 아니 성공으로 축복해주실 것을 기도로 씨름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또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해들과 마찬가지로 2007년 한 해의 우리 각자의 인생과 교회를 향한 축복의 열쇠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노력과 간절한 씨름의 기도로써 이 이 2006년의 강가에서 2007년의 강 저편으로 건너감으로써, 그처럼 '얍복강을 건너가는 자'에게 이미 예비해놓으신 형통의 은총과 번성의 축복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