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하나님
본문
황준식 목사 [성경본문] 사 55:6-9
이 세상은 부조리와 불공평으로 가득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부터 이러한 부조리와 불공평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세상 부조리와 불공평은 가인이 선한 아벨을 죽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이후로 의로운 자는 이 땅에서 핍박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왔습니다.
손해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피를 흘리며 억울하게 죽은 자들도 이 땅의 역사 속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계시록 6장 9절-11절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제단 아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큰 소리로 불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언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함으로 우리의 이 억울한 피를 신원하여 주시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친히 대답하십니다.
“조금만 더 참으렴. 이러한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자의 수가 다 차게 되면 모든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 질것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도, 하나님 제단 아래 있는 의로운 피를 흘린 성도들과 똑 같은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언제 우리의 억울한 일을 신원하시렵니까?
왜 빨리 공의를 베풀지 않으십니까?
욥이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 왜 침묵하셨습니까?
로마의 콜롯세움 카타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자 밥이 되어 죽어갈 때, 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지금 텔레반에 의하여 잡혀 있는 22분의 인질은 주님의 자녀들 아닙니까?
하나님이시여, 왜 침묵하십니까? 왜 이러한 불의를 보시며 잠잠하십니까?
여러분! 시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여 침묵치 마시고 역사하소서. 왜 잠잠하시옵니까? ...
우리는 이 세상의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과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생각과 계획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사 55:8-9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피조물일 뿐이며 잠깐 살다가 없어지는 안개이며, 특히 죄를 지으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얕고 허물 많은 작은 생각으로 [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전 5:2)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0)
피조물이요 죄악된 인생들이 자신들의 욕심과 짧은 생각으로 이러쿵 저러쿵 감히 하나님께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55장은 이사야 53장의 십자가에서 대속하실 어린양 메시야를 예언한 후 주어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어린양 메시야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을 미리 보면서 아주 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은 신앙의 극치입니다.
사 45:15 말씀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그 분이 숨어계시며 왜 침묵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며 그의 길은 우리 보다 수억 배 높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군병들을 이끌고 마치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옵니다.
이때 베드로가 칼을 들어 자신들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 중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칩니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침묵하심을 보게 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를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악한 자들이 주를 조롱했습니다.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러나 그 지독히 악한 순간에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 조건을 “지금 당장” 만족시키면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불신앙과 악한 말에 한마디도 대답치 않고 침묵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력한 가운데 계십니다. 말씀이신 그 분께서 침묵하십니다.
죽은 자까지 살리시고 온갖 질병을 말씀으로 고치시면서 자신을 알리시고 계시하셨던 그 전능하신 분이 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침묵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숨기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십자가야 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지극히 높은 경륜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 신학을 부르짖었습니다. 중세 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를 말하였지만, 구속의 십자가의 고통과 그 십자가의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장 6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그러한 권능과 능력으로 찾아 오심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심스러워 보이는 그러한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신 침묵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했습니다.
이는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 까닭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이 세상에게는 하나님의 그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가장 분명하고 크게 나타난 십가가의 영광을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면:
<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 십자가의 무능함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과 최고의 영광!!!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것처럼 그 얼굴은 상하여 흉하였고, 그 모양은 비참하여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으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오심은 진정 영광 중에 영광이요 능력 중에 능력이시며 지혜 중에 지혜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그런 “감추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우리는 그 분의 지극히 높은 지혜와 영광 앞에, 하나님을 이렇다 저렇다 손쉽게 규정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천박한 우리 인생은 이것이, 저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쉽게 단정하는 만큼 우리는 쉽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일 뿐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일찍이 고대의 속사도와 교부들은
찬양보다 높은 신앙의 단계는 침묵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한 것입니다.
함부로 입을 벌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신학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원칙을 벗어 나면 그는 바른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 첫째는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다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시지만 그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유한 존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친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 시내산에서도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하니라.”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렇게 요청한 이유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도, 견딜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딤전6:16에서 바울이 선포합니다. <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이 원칙을 넘어서면 그는 하나님 보다 높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신학자의 둘째 원칙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곳에서는 사람들도 침묵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나는 복음이 어리석기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이기에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중심인 그리스도사건, 그의 성육신, 생애, 죽음, 부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 부분이 가장 명확하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수도 없는 증인들과 증거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명약관하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하여는 침묵할 필요 없이 베드로와 같이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주’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설명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성경은 많은 침묵을 합니다.
천지창조, 타락과 같은 구약의 말씀이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성경이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은 성경에서 침묵하는 그 이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둘째 원칙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그 내용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함께 침묵해야 합니다. 그 이상을 알려고 하는 것은 교만인 것이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자세의 두 원칙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지극히 높으신 지혜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신 분으로 인정하고 우리는 피조물이요 지혜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정신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침묵 중에서도 그 분은 당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고 계십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역사하지 않는가 답답하고 의심할 수 있으나, 그 분은 지금도 일점의 오류도 없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의 기대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구약시대와 같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죄인들을 지진으로 삼키시고, 저 신앙 없는 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잔뜩 생기고, 너무 얄미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벼락으로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시면서 지금 당장 확실히 보이는 공의와 정의를 나타내길 원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다루는 식으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이 자리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지니라” (잠 24:1, 19).
여러분! 이 땅에서 죄인의 형통과 악인의 안녕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외출 중이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 이후로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세상에서 불의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믿으며 언제나 의의 자리에, 정직과 거룩과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침묵 가운데서 성도들의 인내를 보시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때가 되면 반드시 엄중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가장 깊은 뿌리입니다.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을 조롱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심을 업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본문 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그 기간에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말씀하길,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사는대도, 그들을 당장 심판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는, 말씀대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침묵을 업신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백성 여러분!
이제 이 세상에서 당하는 부조리와 고난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갖길 소원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억울한 상황,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자신의 세계에 하나님을 제한시켜 즉각 즉각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나님이신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욕심과 기대에 맞춰서 하나님을 믿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는 투정부리는 그런 유아기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이제는 보다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 특히 억울한 일들 속에서,
어떤 때는 신앙으로 견디다 못해 낙심하고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한숨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의심이 생기는 경우에도,
이제 우리는 보다 의연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대로 사는 순전한 사람들은 바보 취급 받기가 쉽습니다. 생존 경쟁의 독하고 철저한 자기중심적 인생들 속에서 사는 것은 분명 한숨과 고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역사하지 않는 것 같고, 살아계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서 어떤 때는 함께 속이고 싶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독해지고 싶은 유혹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불안함 속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분은 잠깐 침묵할 뿐이지, 마침내 공의를 이루십니다.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지금도 그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여러분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불의에 빠지지 마시고 악에 물들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순결함과 정직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국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며, 성도의 인내에 대해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 때에는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는지, 왜 숨어 계셨는지. 아하~ 하며 무릎을 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성도 여러분들!
주님을 더욱 찾으시길 바랍니다.
침묵하시는 주님께 오해 않길 바랍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십자가를 바라 보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침묵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 침묵이 쉽겠습니까? 그 분에게 당신 악인을 멸절시킬 능력이 없었습니까?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인들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짧은 인생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을 판단하여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있으니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나님이 어디 있다는 거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어?”
여러분! 십자가는 이 세상 역사 중 가장 불공평하고 가장 억울한 부조리의 현장입니다.
모든 사람이 질문합니다.
“당신의 공의는 어디 있습니까? 왜 죄 없는 가엾은 예수가 죽어야 합니까?
왜 이 세상은 이다지도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요 최고의 능력이며 최고의 지혜였던 것이, 바로 십자가 후의 부활의 영광에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이요 최고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사건을 향하신 하나님의 침묵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면서 오늘도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면서 성도의 인내로 사시는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영광을 누리시는 복된 주의 백성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