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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수를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자기 분수를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 문: 민수기 16:1-7

1. 들어가는 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3년 여정 속에서,

그들은 빈번하게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죄를 범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개의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인 민수기 16장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번째의 반역 사건인

'고라의 반역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라라는 사람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관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에서

오로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만 맡겼기에,

고라도 하나님의 성막을 위하여 일을 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라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면서 늘 한 가지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 불만은 왜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될 수 없고,

매일 성막에서 시중드는 일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오로지 모세의 형인 아론의 직계들만 될 수 있었는데,

자신도 아론의 친사촌 동생이고, 조상을 따져보면, 결국 같은 조상인 레위의 후손들인데,

왜 자신들은 심부름만 해야 하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제사장은

아론의 아들들만이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일당을 만나게 됩니다.

'다단'이라는 자와, '아비람', 그리고 '온'이라 사람들도,

거기에다가 평소 지도자 모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250명도

고라와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왜 40여 년 간 모세만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모세의 장기 통치권에 대한 불만은,

평소 제사장이 되지 못해 불만에 가득했던 고라와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인 B. C 1440년경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날 모세와 아론을 만나서 평소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말하면서,

모세의 통치권과 아론의 제사장 권한에 대하여 정면도전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의 분수가 지나치다"는 말로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했습니다.

어째서 너희들만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며,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며 그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어이없는 도전과 쿠데타에 대하여,

이것을 판단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며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 도전에 대한 대답을 내일 아침에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 다음 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 세 사람 근처에서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2-33절을 보시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라와 다단,

그리고 아비람의 가족들과 그들의 집에서부터 떨어지자, 땅을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라진 그 땅속으로 세 사람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도 빨려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에녹이나 엘리야, 모세 등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올라갔다고 했는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고라와 다단,

그리고 아비람과 그 가족들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그 다음의 35절을 보시면, 그 세 사람의 뜻에 동조를 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250명은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불에 의하여 몽땅 타 죽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저희들은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단 한 가지의 교훈인 '분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3절에서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먼저 분수론을 꺼냈습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분에 넘치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모세도 고라 일당을 향해 분수론으로 맞받아 쳤습니다.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너희야말로 분에 넘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과연 누가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저희들은 이 분수론, 누가 과연 분에 넘치는 일을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몸 말

1) 이것이 작은 일이었습니까?(9 절)

저희들이 '분수론'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먼저 고라나 모세는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은 어떤 일을 했었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나 고라는 사촌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같은 친척이었고, 그들의 조상이 레위라는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모두 성막에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모두가 레위 지파의 후손임에도 하는 일이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고라와 같은 레위인 이었지만,

수 백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호령할 수 있는 명실공히, 유일무이한 지도자였고,

그의 형 아론은 성막에서 가장 높은 제사장인 반면에,

오늘 문제의 핵심인물인 고라는 같은 친척이고,

같은 핏줄임에도 그가 하는 일은 성막에서의 허드렛일, 잔심부름,

그리고 성막을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는 일 등이었습니다.

누구는 대접받는 일을 하는데,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은 매일 땀흘리며

빛도 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점차로 고라의 마음속에 쌓이게 되었고,

마침내 쌓인 그간의 감정이 폭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배경을 들으면 고라가 불만을 가질 만 했다고 이해가 됩니다.

왜 같은 사람인데, 더구나 핏줄도 가까운데, 누구는 매일 대접받는 일만 하고,

왜 나는 대접하는 일만 해야 하는가?

이런 불만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마 저라도 이런 불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도 대접받는 자리에서 한 번 일해 보자!" 왜 이런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왜 고라도 호령하며 군림하는 자리에 서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고라의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9절을 보시면, 이런 고라의 마음,

아니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모세의 말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세상 사람과 구별하신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고,

더구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막,

곧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시는 일을 어찌 작은 일이라고 불평을 하느냐?"며

호통치는 모세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맡은 일이 작은 일임에는 분명하겠지만,

자신들이 작은 일을 맡았다고 불평하기 전에,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보면,

절대로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는 모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신 일도 감사한데,

거기에 보너스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는 더 없는 영광인데,

그 일이 보잘 것 없는 일이라고, 작은 일이라고 불평을 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대항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라의 처지를 보십시오.

아니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처지를 보십시오.

아니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 같은, 우리같이 죄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 주실 수 있습니까?

게다가 주일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셨지요,

찬송하도록 허락하셨지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고, 안내하고, 또 성경을 읽고, 성가대로,

교사로, 집사와 권사, 장로와 목사로 봉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게 은혜가 아니면,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2) 작은 일도 아름답습니다

저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작은 일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Small is beautiful."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작은 아이의 손바닥조차도 아름답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기도하는 작은 손 조차도 아름답고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교회는 작은 성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세 유럽에서도 대형교회를 지향했기 때문에 작은 것은 보잘 것 없고,

효용가치가 없다는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초기 물질 문명의 사회에서도 대형화의 추세가 세계를 지배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축소 지향형을 추구하는 minimization의 바람이 불어서

작은 생산품들도 많아졌지만, 초기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온통 8기통의 탱크 같은 승용차를 생산했고,

자유의 여신상 같은 엄청난 동상을 건축했으며,

누가 더 높고, 크고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내는가에 온통 관심을 가졌습니다.

몇 년 전에 리버 사이드로 이사를 가신 강재신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따금 전화가 오기도 하고, 제가 전화를 하기도 하는데,

강 집사님은 "목사님의 새벽 기도회 말씀을 못 들어서 늘 아쉽기만 합니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저희와 함께 신앙생활할 때, 새벽 기도회의 말씀으로 하루를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었는데,

새벽 기도의 말씀을 못 들어서 늘 손해 나는 것 같은 기분이랍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목회 할 맛이 납니다.

행복합니다.

사실 가까이 있는 교회에 새벽 기도회를 나가시고, 또 얼마나 말씀이 많습니까?

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말씀을 주시는 목사님이 많으심에도,

작은 교회의 목회자인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실 때,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제겐 행운이에요"

라고 말씀해 주신 성도님이 계십니다.

며칠 전 한인타운 근처에 새로 마켓을 시작하신 황명성 성도님을 심방 했는데,

제게 늘 감사하다 시면서, "목사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한결같다"고 칭찬해 주시더군요.

그 말씀이 진실이라 믿으면서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는구나"는 신뢰감이

저를 무척이나 행복하고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우리 교회가 대형 교회도 아니고, 제가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목사는 못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저를 인정해주고,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의 태도가 변하고,

말과 행동이 성숙하게 변할 때는 무척이나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설령 그게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벤츄라 감리교회하고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수정교회하고는

웃돈을 준다고 해도 안 바꾸겠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작은 일도 아름답고 귀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라 일당은 자신들이 맡은 일이 너무 작은 것이라고,

그래서 모세처럼, 아론처럼 큰 일을 해 보겠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도전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그들이 맡은 일조차도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일'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거든"이라는

모세의 말씀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배 드리게 하고,

예배의 참여자로, 봉사자로 삼으신 것이 어떻게 작은 일이겠습니까?

저는 매달 예배 위원을 광고가 실리는 주보 3면에 기재하곤 하는데,

정해진 예배 위원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시는 분이나 성경봉독 하시는 분들의 이름이 분명히 주보에 인쇄되어 있음에도

예배 위원들이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단 예배자 뿐 아닙니다.

안내자나 성가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성도님들이 앉고 계신 바로 그 자리를 채워 주시는 일조차도 예배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혹시 내가 맡은 일이 너무 작은 일이라고 소흘히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나 한 사람 빠진다고라고 대수 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더 큰 일, 더 큰 역할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3. 맺 는 말

한국 사람들에게 근세기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년을 중퇴한 것이 전부인 그가 미국에서 이력서를 쓸 때,

자신이 제일 잘 하는 특기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노를 젖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청소하는 일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유학 왔던 1988년, 저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하셨던 일을 물려받았습니다.

"와 대단하네요"라고 생각하시지요.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저도 청소를 해서 학비를 보탠 적이 있었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청소의 천재라고 합니다.

당시 리버 사이드에서 살았던 안창호 선생이

어느 미국인의 주택을 시간 당 1달러 받고 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집 청소니 대충해도 될텐데, 집주인이 베란다에서 청소하는 안창호 선생을 보니까,

얼마나 성실하고 깨끗하게 하는지, 마치 자기 집을 청소하듯이 하더랍니다.

일이 끝난 후 "도대체 당신은 왜 그렇게 자기 집처럼 깨끗하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청소는 깨끗하게 만드는 일인데,

돈은 얼마를 받든 계약이 집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돈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서 청소했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는 시간당 50센트를 더 쳐서 모두 12를 주었다고 합니다

. 돈을 많이 받아서가 아닙니다.

작은 일이지만, 인정을 받도록 일을 한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작은 일조차도 소흘하게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10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성도님들 중에 제가 친교실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그릇을 나르고,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는 "목사님은 가만히 대접을 받으셔야지,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 분들의 사랑의 말씀에 대해 저는 누가복음 22:25-27의 말씀으로 대답을 드립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 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

예수님조차도 밥상 앞에 앉아 대접을 받는 사람이 아닌, 시중드는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삶의 모형으로 삼고 배우고 따라 살려고 하는 목사가

어떻게 밥상 앞에 앉아서 대접만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어디 이게 목사만의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작은 일조차도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가를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작은 일 조차도 귀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하여

"네 분수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내 위원으로, 성가대원으로, 예배 중 기도자로, 성경 봉독자로 지정 된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기쁨인데, 그 일을 빼먹습니까?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데, 그 직책을 소흘하게 생각하십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새벽기도회를 지키고, 수요 예배를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교인들간의 친교 모임과 행사에 참여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데,

그 일을 소흘히 하고 있습니까?

결국은 우리가 우리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제를 파악 못한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분수를 모른 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만족을 못하고,

감당도 못할 큰 일, 이름만 내 세울 일만을 쳐다보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주어진 현재의 내 일조차도 귀하게 여기셔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하여 맡겨지는 그 어떤 일조차도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시고,

참여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시고,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한 신앙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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