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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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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



2000년 12월 24일

본 문: 사도행전 14:19-28



1.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l-l2장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인근의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l3-28장은 바울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복음화와,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들의 복음화의 두 개의 기둥으로 기록된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땅 끝까지, 그리고 모든 민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세계 선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행기간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완전히 복음의 사람으로 변신하고,

이적이 일어나며,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는 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사도 바울을 반대하여 그를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협박하며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걸었습니다.

확실한 체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처음부터 순교할 각오를 하며 선교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루스드라라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했고,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바울이 루스드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바울의 대적자들이

100마일이나 떨어진 안디옥에서, 50마일이나 떨어진 이고니온이라는 곳에서 몰려들어

그 지역 사람들을 부추기고 유혹해서 마침내 바울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종교적이나, 도덕적으로 커다란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데,

사방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이 바울을 세워놓고 돌팔매질을 한 것입니다.

수 없이 날아드는 돌을 맞고 바울이 쓰러졌습니다.

얼굴이고 몸이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기절을 했고, 그래도 계속 날아드는 돌을 기절한 상태에서 맞았습니다.

한참 돌팔매질을 하던 유대인들이 쓰러진 바울을 보니, 죽은 것 같았습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 죽은 줄 알고, 그의 시체를 성밖으로 내 던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돌팔매를 맞았음에도, 그래서 그에게 돌을 던진 유대인들조차도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집어 던졌는데,

그런 바울이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는지,

아니면 거의 죽음 상태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길로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한 후 안디옥으로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모아 놓고 오늘 22절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제자들아,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2. 몸 말

(1) '이 믿음'은 환난을 겪어야 하는 믿음입니다.(22절)

바울 사도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이 믿음 안에 거하라'고 했는데, 이 믿음은 바로 환난을 겪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환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까지도 제시했습니다.

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난을 겪어야 할까요? 환난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론부터 내린다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인이 되기 위해서 환난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홍역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인 것처럼 말입니다.

홍역 없이 죽으면 무덤에서라도 홍역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환난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겪는 것이 어려움입니다.

고난이며 역경이며, 때로는 핍박이기도 하고, 심할 경우에는 순교까지 각오해야 할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심판이 인간 자신의 죄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환난은 죄에 의한 결과가 아닌,

성도이기 때문에 사탄에 의하여 당하게 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유하고 유혹하고 의심하게 하고,

갖가지 고통을 주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연결된 은혜의 줄에서 떼어내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그리스도인들이 겪게될 환난에 대하여 예고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9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환난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때로는 육체적이거나 마음의 고통으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욥이라는 사람이 당한 환난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열 명의 자녀와 좋은 가정이 한 순간에 사라졌고, 질병으로 시달려 기와로 몸을 긁어야 하는 재앙을 당해야 했고,

그 많던 재산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한 육체와 마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는 스데반이라는 집사님이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순교를 당해야 했던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 사도행전 12장에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가 헤롯왕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전히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당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환난은 반드시 육체적 혹은 마음의 고통만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교묘하게 나의 가장 약한 약점을 이용하여 찾아오기도 합니다.

명예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명예를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물질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풍성한 물질을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는 학업을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또 환난은 때로 "영혼이 정말 있을까?"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을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만이 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일까?" 하는 의심으로다가 오기도 합니다.

환난은 이렇듯 유혹과 의심으로 성장하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흔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명예'라는 유혹의 환난으로, 어떤 가정에게는 '가정의 불화'라는 환난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의 번창함'과 '물질의 풍요로움'이라는 '유혹의 환난'으로,

어떤 지식인에게는 '의심'이라는 환난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 교회에 '이인수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인수 장로님이 쓴 간증수기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라는 책에서 그 분은 자신이 당한 환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인수 장로님은 육사 10기로 임관하여 소위에서부터 대령까지 진급을 하는 동안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인 장도영 중장의 비서실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직책인 만큼 생활이 무척이나 바빠졌습니다. 항상 '바빠, 바빠'가 그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교인이라는 이름은 걸었지만, 점점 더 교회에 나갈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잠을 자다가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반 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을 비상하던 새 한 마리가 포수의 총에 맞아 날개가 꺾여 땅에 곤두박질 치고 사냥개에게 불려 가는 꼴이 된 것입니다.

그가 갇혀 있는 감옥은 앉아서 고개를 들 수도 없이 천장이 낮고 누우면 다리를 뻗을 수가 없는 작은 사과궤짝 같은 감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지난날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기에 이르렀고,

회개 중에 자기의 마음을 비수처럼 찌르는 것을 발견했는데,

항상 바쁘다고 하면서 '바쁘지 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이와 같이 한가하게 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도 회개를 하고, 날마다 조용한 감옥 속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로 사형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50번 읽고 난 후 교도소로 통보가 왔는데 그것은 감형통보였습니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눌 때에 무기가 15년으로 감형이 되고,

이 장로님이 100번 성경을 읽고 났을 즈음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석방통지서를 받아 쥘 수 있었습니다.

바쁘고 풍족하며, 높은 지위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지만,

때로 하나님은 저희를 환난 가운데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독방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2) 이 믿음은 환난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난을 안디옥 교인들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믿음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믿음은 바로 환난을 당해야 하는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난을 극복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환난'이라는 훈련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육신이 아픔을 감당하도록 하시지만,

그 환난의 근본 목적은 고통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극복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더 견고해지고 다져지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환난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 환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20:1에서 시인은 "내가 환난 날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l7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라, 잠깐동안이며, 능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번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실패하고, 5번째 도전하여 합격한

사전오기의 한 법조인에 관한 기사가 오래 전에 신문에 난적이 있었습니다.

그 법조인은 네 번째 떨어졌을 때 그 참담한 심정은 말로 형언 할 수가 없었답니다.

때려치울까, 상처받은 자존심을 어떻게 달랠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의 절망. 좌절, 실의에 빠져 자신을 가누기가 어렵더랍니다.

그런데 5번째 도전에 성공하던 날, 과거 4번의 실패는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합격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감격과 밝은 미래만 보이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으로 받는 환난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환난을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렇습니다.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견뎌야 하는 많은 시험, 유혹,

때로는 육체적 심적 고통조차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기 위한 입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가 한 국제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인터뷰를 했을 때

"어떤 생각으로 42.195 Km를 뛰느냐고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황 선수는 대답하기를 "오로지 금메달만 생각하고 뜁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 선수들은 사철 구분 없이 소나기 같은 인내와 고통의 땀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인내하며, 고통하며 훈련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목에 찬란한 영광의 메달을 거는 것만을 생각하기에,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견뎌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창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성자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내 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맹수가 그 경기장에 들어갔고, 성자 이그나티우스는 그들에게 물리고 뜯기 우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성자 이그나티우스가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일곱 개의 편지 중 하나에서

그는 자신이 앞으로 겪을 환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불로 지지고 쇠뭉치로 때려 보시오. 사납고 힘센 맹수를 보내 보시오. 내 뼈를 자르고 비틀고 으깨어 보시오.

내 사지를 꺾고 내 몸을 부수어 보시오. 악마같이 잔인한 고문으로 공격해 보시오.

오히려 그것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이르게 할 것이오."

성자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이 당할 환난과 고통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더 빠르게 이르게 할

구원의 고속 주행선이라고 고백했고, 그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기에 에베소서 3:l3에서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초대교회 때나, 혹은 중세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고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쿠바나 북한, 중국과 중동지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고통, 죽음에 이르는 시련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앙 가운데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이라는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환난이라고 생각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3. 맺 는 말

연예인, 운동선수 등, 인기에 승부를 걸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인기라는 겁니다. 환호성입니다. 자기를 향하여 팬들이 소리지르고,

손뼉 칠 때 그 분들은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인기를 누리고 살수가 없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인기가 뒤쳐지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밖에 머물러 있게 되면,

두 번째의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은 '환각의 힘'입니다.

약물의 힘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쉽게 마약에 빠지게 됩니다.

원래 인기라는 것이 물거품과 같아서 어렵게 들어 왔다가도 너무나 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때에 그 외로움과 불안, 초조, 긴장을 이기기 위하여,

그리고 잃었던 과거의 명성과 인기를 다시 유지하기 위하여 마약에 손을 댑니다.

그래서 많은 유명 인기인들은 신경성 불면증, 위궤양, 소화불량 등에 걸려 있으며, 불안한 마음을 마약으로 달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사는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기를 먹고살지도 않고, 마약을 통한 안개 같은 힘으로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힘'으로 삽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이익이나 차별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신 가요?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남들만큼 돈을 못 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혹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할 말을 하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시간과 헌신, 물질을 신앙생활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탄이 우리를 위하여 파 놓은 '환난'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 육체와 마음에 직접적인 고통과 아픔을 주지 않는다고 환난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교묘한 유혹으로, 의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넘어뜨리려고 다가오는 유혹과 의심조차도 우리에게는 환난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환난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정면으로 그 환난과 부딪히십시오.

나를 유혹하고 의심하게 하고,

그래서 비 신앙적인 결단과 실천을 통해서 환난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탄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유혹이나 의심이 있을 때,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이익과 육체적 어려움, 마음의 고통이 있으실 때,

환난을 통한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힘, 오늘 바울이 '이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라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하심으로, 이 땅에서도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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