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과 악인은 이렇게 다릅니다"
본문
2000년 12월 31일, 송년예배 설교
본 문: 시편 37:9-22
1. 들어가는 말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가장 혹독한 고난의 시험을 치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욥'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렸던 욥이 사랑스런 가족과, 가진 모든 재산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혹독한 질병으로 시달리고, 게다가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마저 욥을 배신하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고 있을 때에, 욥은 24장에서 "왜 하나님은 남의 양떼와 가축을 끌고 가고,
빈궁한 사람을 길로 몰아내며, 임금을 착취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과부와 고아를 버려 두며, 병자들을 버려 두고 학대하는 악한 사람들을 왜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잘 살도록 내버려두시는가 하고 항변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세계 제 2 차 대전 때에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명령 한 마디로 굴뚝의 연기와 재로 사라질 때에,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감옥의 벽에 이렇게 썼습니다.
"Are You Sleeping God?" "Are You dead God?" "하나님 주무십니까? 아니면 죽은 분이십니까?"
이렇게 하소연했던 유대인들은 왜 히틀러가 한 민족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무서운 살인 계획을 아시면 서도
침묵을 지키는지를 항변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입니다.
"목사님, 왜 저렇게 악한 사람이 잘 살게 하나님이 내 버려 두시나요?"
"왜 나쁜 사람은 저렇게 잘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요?"
욥이 물었던 질문이나,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이 감옥에 남긴 글이나,
아니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잘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하는 물음에 대하여,
저희들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대답을 듣게 됩니다.
오늘 저희들은 비록 9-22절까지의 말씀만 읽었지만, 37장 전체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37편은 의인과 악인의 인생을 비교해 놓은 말씀입니다.
악인은 일이 잘 풀리는데, 의인은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받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해 주시는가?
먼저 1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잘됨에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저희들을 향하여
처음부터 분명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악한 자들이 잘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산다고 해서 시샘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쓴 다윗 왕은, 악한 자들의 형통함과,
불의한 자들의 잘됨을 부러워도, 속상해도 하지 말고, 시샘하지도 말라고 했을까요?
오늘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악인과 의인의 인생은 어떻게 다르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의 형통함과 잘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 해답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2. 몸 말
(1) 의인과 악인의 인생에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16-21, 26)
저희들은 오늘 말씀 시편 37편 전체를 통해서 첫 번째로 의인과 악인의 인생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악인들을 부러워하거나 시샘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 첫 번째 이유로 16-21절을 통하여 의인과 악인의 인생에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16절에는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다"고 되어 있지요.
'의인의 하찮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재산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의인은 비록 적은 소유를 가졌더라도,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행복'이 있지만, 악인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절대로 만족을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속에 항상 '부족', '불평'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마음속에 어떻게 행복과 기쁨이 찾아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소유를 가지고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악인보다는, 적을지라도
그 안에서 작은 행복과 감사를 발견하는 의인의 삶이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많은 재물을 가지고 불평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으신 가요?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1절을 보시면 또 다른 의인과 악인의 사회 생활에 대한 비교가 나오는데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도다"고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전혀 염두에 두질 않습니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남의 돈은 잘 빌리는데, 갚는 데에는 인색하지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돈을 긁어모으기도 하고,
춘향전에 나오는 변 사또처럼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악한 사람들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의외로 가진 사람보다는
배고픔의 설음을 경험했던 어려운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비유를 누가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는데,
강도를 만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도 아닌,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의 등쳐먹으며 잘 살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재물을 쌓아놓고 살지는 못하지만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며 사시겠습니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재물이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25-26절을 보시겠습니까?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이 두 절의 말씀은 의인의 선행과 자선은 결국 그 자신을 복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조차도 복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에 반해서 선행을 베풀기는커녕,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쥐어짜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악한 자들의 후손들은 어떻겠습니까?
28절 끝에는 악한 자들의 후손에 대하여"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2) 악인과 의인과의 관계에 대하여(14-15, 32-33)
두 번째로 오늘의 말씀은 악한 자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의인에 대한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의인들끼리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거든요.
그들 중에는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고, 더 심한 경우에는 나를 궁지에 몰아 넣고,
파멸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사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올해 초에,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평생 교직에서 있다가 퇴직금을 한꺼번에 다 받고 정년퇴직 하셨습니다.
사회 실정을 잘 모르기에 심사 숙고해서 남은 여생 편안하게 지내려고 섣부르게 사업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한 사기단의 감쪽같은 사기 극에 말려서, 퇴직금 전액뿐 아니라, 살고 있던 집의 문서까지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명예롭게 퇴직한 교장 선생님 부부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무숙자로 전락되어 결국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입니다.
12-13절을 보시겠습니까?
"악인이 의인을 모해하며, 그를 보고 이를 갈지라도, 주님은 오히려 악인을 비웃으실 것이니,
악인의 끝 날이 다가옴을 이미 아시기 때문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가 의인을 해치려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 악한 자의 종말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 악한 마음을 비웃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한다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악인이 나를 모해한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의 패망과 심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경고하셨습니다.
14-1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려 드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이 말씀은 악한 사람들이 칼을 뽑아 들고, 또 활을 당겨서 의인들을 죽이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 칼로 자기의 가슴에 구멍만 내게 되고, 그 활은 부러지고 말 것이란 말입니다.
의인을 해치려는 악한 자들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시도되어 큰칼을 높이 드는 데까지는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심장을 찌르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결국 이 땅의 역사는 땅의 사람들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계략과 모략, 사기와 권모술수가 성공하든 듯 싶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하여 그들의 계획은
오히려 그들 자신을 얽어매는 동아줄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악인과 의인과의 관계를 다른 또 다른 말씀이 32-33절에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 하시리로다."
악한 사람이 의인을 해치려고 기회를 엿보지만,
하나님께서 의인의 생명을 절대로 악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절대로 하나님은 의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시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악인에게는 어떤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악인에게는 가차없이 '유죄판결'을 내리시되, 형량도 '1년, 10년의 징역'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옥에서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악인과 의인의 마지막에 대하여(9-10, 20-22, 35-36)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오늘 말씀에서 악인과 의인의 마지막에 대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악인에 대하여 9절에서는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뿌리 채 뽑힐 것이란 말씀입니다.
20절에도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35절을 보시겠습니까?
그들이 비록 지금은 큰 세력으로 그 무성한 잎을 뽐내는 듯 하지만, 한 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 도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에 반하여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10절과 22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땅을, 곧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37절에서도 "화평한 자의 마지막은 평안"이라고 말씀하셨고,
마지막 39-40절을 보시면,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중간은 비슷하거나, 때로 악인이 잘 살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의인과 악인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마지막 결론부분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처럼, 악인이 득세하고, 권력을 누리며, 천하를 얻은 것 같이 날뛰지만,
그것이 삼일 천하, 하루아침에 알에서 부화했다가 저녁에 죽고 마는 하루살이의 인생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여기 인생의 마지막 결론에서 나타납니다.
악인의 삶은 그 흔적조차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에 반해서 의인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그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연기처럼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지만, 의인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땅으로 얻는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그렇게 많이 가졌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었던, 아니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만을 소유했던 의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까지를 소유로 얻게 되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고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십니다.
3. 맺 는 말
오늘은 12월 31일. 이 해의 마지막 날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주일이며,
더구나 20세기의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지난 일년 동안, 아니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때론 우리 인생과 인류의 역사가 뒤죽박죽이며,
모순 덩어리인 것처럼 생각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일을 하고, 저렇게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버젓이 대낮에 얼굴 들고 다니며,
유명인 행세하고, 뻔뻔스럽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일할 기분도, 살맛도 안 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기분이 드실 때마다 오늘의 말씀인 시편 37편을 꺼내어 1절과 2절만이라도 읽어보십시오.
"악한 자들로 인하여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로 인하여 시샘하지 말라/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라"고
오늘 말씀은 악한 자들의 말로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아직 우리들의 인생은 이런 결론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판단을 유보하셔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손해 보며,
신앙인들이 바보처럼 산다"고 판단하는 것을 미루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인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신앙적 양심을 지켜 가며
정직하게 잘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나와 같이 출발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더 좋은 집에 산다고 걱정하시거나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보다 빨리 자란다고 자랑할는지 모르지만 오늘 2절의 말씀은
그들의 소유와 영화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의 칼도 300년이 지나면서 기독교의 십자가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18세기 프랑스와 유럽을 피로 물들였고 절대로 패배를 몰랐던
나폴레온의 군사 독재도 민중의 혁명 앞에서 백기를 흔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 소련의 공산혁명도, 결국은 스스로 자멸하여 붉은 기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가장 탄압하는 북한의 공산 정부도 지금은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인 것 같지만, 보십시오.
얼마나 갈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말씀 36절처럼, 이제 언젠가는 그 무성한 잎과 나무 등걸들이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도토리 나무 밑의 돼지는 게걸스럽게 도토리를 주워 먹기는 하지만,
결코 그 도토리가 위에 있는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다는 사실은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먹는데 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나무를 쳐다보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미련한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악한 사람은 떨어진 재물을 주워 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도토리가 떨어지는 나무 등걸과 가지를 바라 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을 바라볼 시간도, 틈도, 여유도 없습니다. 악한 자가 득세한다고 마음 상해하지는 않으십니까?
부정직한 자가 잘 산다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면 살수록, 더욱 살기가 어렵다고 실망하지는 않으십니까?
지금까지의 결과가 인생 전체의 결론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은 분명한 한 가지의 결론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에게 남겨진 심판의 시간은 이제 목전에 다가왔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인들을 위한 시간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악인들이 소유했던 그 무성한 푸른 잎과 가지들은 연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희들이 소유할 땅은 저 하늘나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으시면서, 다가오는 새해 2001년에는 더디고 느리지만,
정직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결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