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의 다섯 가지 측면
본문
The Five Aspects of God's Love
어린이들의 심리를 치료하는 어떤 정신과 의사가 자기 집에 새로운 차도--즉, 대문에서 현관까지 차가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시간 최선을 다해 수고한 나머지 드디어 콘크리트를 편편하게 처서 완벽한 수준의 드라이브웨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 때 갑자기 이 집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새로 만들어 놓은 시멘트를 밟아서 그만 깊은 발자국을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아이들을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가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할 아동 정신과 의사예요. 그런 당신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 부인의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아이들을 추상적으로 사랑하지 구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마태 22: 34―40)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감리교회의 아버지 요한 웨슬리 선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실행에 옮겨야 할 가장 중요한 덕이 '경건'(piety)과 '자비'(mercy)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우리의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 즉 수직적인 차원에서의 덕을 말하고, 자비는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수평적인 차원의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하다 보면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이나 실천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것이 되기가 쉽습니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혹은 말로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 우리 삶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사랑하고 있음을 보이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체험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고 멀리 계시는 분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깊이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늘 피부로 느끼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는 스바냐 3: 17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구약 성서의 12소선지서 중에 하나인 스바냐서는 겨우 3장으로 되어 있는 아주 짧은 책입니다. 이 책은 요시야 왕(640―609 B.C.)이 재위하던 시대, 즉 니느웨가 함락되고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침략한 시기에 쓰여진 책입니다. '스바냐'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다"(Go has preserved)라는 뜻을 가지는데 주로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몰렉 신, 그리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우상숭배한 것(스바냐 1: 2―6)에 대하여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바냐 1:1―3: 8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가증한 죄악 속에 빠져 있는 유다와 다른 모든 이방 열국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준엄하게 심판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이 끝난 후 3: 9―20까지 스바냐는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은 물론 다른 이방 열국들까지 새롭게 회복시키시고 넘치는 축복을 허락해주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같은 종교적 죄악과 열왕들의 실정을 먼저 철저히 응징하신 후 이제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 나가실 것이라는 희망을 스바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바냐 3: 17은 이와 같이 희망과 회복,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가를 한 눈에 알게 해 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스바냐 3: 17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섯 가지 사랑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가 1791년 3월 1일 88세를 일기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침대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펜과 잉크를 달라고 해서 무엇인가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력이 다 떨어져 더 이상 글씨를 쓸 수가 없게 되자 옆에 있던 여자 한 사람이 웨슬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자기가 받아 쓸 터이니 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이 위대한 전도자가 무슨 말을 최후로 남기고 세상을 뜰까 몹시 궁금해했습니다. 웨슬리는 "Nothing, but that God is with us."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이 말을 하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 후 모두 13명의 가까운 친지들과 감리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슬리는 드디어 진짜 최후의 말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The best of all, God is with us!,"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마치고 한 세기의 가장 빛나는 위인 중에 한 사람이었던 웨슬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매 순간마다 자주 느끼고 체험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고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과 위기에 빠질 때, 특히 죄악과 죽음 속에 빠질 때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전능자이십니다. David Wilkerson은 자기의 책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즉 "십자가와 칼"에서 어느 날 밤 New York 시내 깊이 살벌한 곳에서 설교할 때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악명높은 깡패 두목 Nicky Cruz가 여러 주 동안 설교하고 있던 Wilkerson 목사님을 괴롭히다가 드디어 그 날 밤 작심을 하고 설교하는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이 깡패 두목은 시퍼런 칼날을 목사님에게 들이대고 "나는 당신이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 정말 듣기 싫다. 만일 예수니 뭐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칼로 너를 난도질을 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무서운 협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Wilkerson 목사님은 이 불한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랑스러운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지금 당장 나를 죽이세요. 나를 이 칼로 가루가 되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물론이고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 때 이 깡패 두목 Nicky Cruz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마음이 무너지고 마침내 변화되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아무리 무지막지한 깡패라고 할지라도 구원하시고 변화시켜서 새 사람이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의 모습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라고 스바냐서는 말합니다. 자녀들이 무엇인가 부모님 마음에 흡족한 일을 하게 될 때 부모들은 때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뻐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가끔 이런저런 경시대회에 나가서 큰상을 받아 온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든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 뜻에 합한 일만 하면 이렇게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을 보니까 먼저 우리 연합감리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는 "He will renew you in his love," 즉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혹은 "되찾으신다"고 되어 있고 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잠잠케 하신다" 혹은 "우리를 달래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달래 주신다"는 표현을 제일 좋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아플 때 우리가 두려운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아픈 상처를 달래 주시고 우리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중에 하나인 Alexander Maclaren이 나이 16살이 되었을 때 Glasgow에서 첫 번째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Maclaren은 아직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일하게 된 직장은 자기 집으로부터 무려 6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기 집과 직장이 있는 Glasgow 사이에는 유령이 자주 출몰하고 끔찍한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는 깊은 골짜기 즉 협곡(deep ravine)이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이 길을 걸어가기가 보통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이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6마일이나 되는 긴 거리를, 특히 무시무시한 협곡을 함께 지나 직장이 있는 Glasgow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헤어지면서 아버지는 "Alec, come home as fast as you can when you get off Saturday night." "토요일에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 올 때 할 수 있으면 빨리 돌아오도록 해야 한단다."하고 아들에게 신신부탁을 하자 아들은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협곡을 생각하고서는 "Dad, I will be awfully tired Saturday night. I will come home early Sunday morning." "아빠, 토요일 밤에 저는 너무 피곤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 집에 돌아갈께요."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말합니다. "Alec, 그러면 안된단다. 너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산 적이 한번도 없단다. 사실 앞으로 너와 떨어져 있게 될 5일이 나에게는 마치 1년이나 된 것처럼 보일거야. 꼭 토요일 밤에 집에 돌아오도록 해야 한단다." 아버지의 채근에 못 이겨 아들은 마지못해 토요일 밤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간 내내 아들은 일하면서 그 무섭고 시커먼 협곡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며 걱정을 했습니다. 드디어 토요일 밤이 찾아 왔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집에 돌아간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 아들은 대충 자기 짐을 싸서 협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때 집에 돌아간 일을 회고하기를 "나는 용기를 내기 위하여 휘파람도 불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저 시커먼 협곡을 내려다보니 도저히 집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 갑자기 협곡 안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어떤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겁이 난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가만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기억에 익숙한 소리여서 멈추어 섰다. 이 때 나는 칠흑같은 어둠으로부터 이 땅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의 머리와 어깨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나의 아버지가 나를 염려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먼 집으로부터 이 곳까지 걸어오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Alec, I wanted to see you so badly that I came to meet you.' 'Alec, 너를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너의 마중을 나오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 날 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 무서운 골짜기를 빠져 나와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걷는 동안 나는 그 어떤 무서움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염려하여 무서운 협곡에까지 함께 동행하는 아버지, 바로 이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홀로 걷는 인생길은 때로 이 Maclaren 목사님이 소년 시절에 걸었던 협곡처럼 무섭고 떨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꼭 잡고 계시는 한 시편 23편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결코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노래하며 기뻐하시는 분,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아름다운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콧노래를 부르시며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을 깊이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남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사막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손을 땅 아래로 펴서 돌멩이를 주어 너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어라. 그러면 이튿날 아침에 너는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 슬프기도 할 것이다." 이 남자는 시키는 대로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열심히 돌멩이를 주머니 속에 주워 담았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을 때 자기 주머니 속에 넣은 자갈들을 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다이아몬드 보석이었습니다. 밤에 들었던 예언 그대로 그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조금이라고 다이아몬드를 얻었기 때문에 기뻐했지만 그 돌멩이가 다이아몬드인 것만 알았어도 좀 더 많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서 또한 슬펐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천국에 가면 이 남자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셔서 넘치는 축복을 채워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몰라서 깨닫지 못해서 체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 될까요.
12세기 불란서의 신학자 Bernard of Clairvaux는 기독교 영성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Love of self for self's sake,"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이며, 두 번째 단계는 "Love of God for self's sake,"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세 번째 단계는 "Love of God for God's sake," 즉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네 번째 단계는 "Love of self for God's sake," 즉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와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 스바냐 3: 17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대로 체험하셔서 하나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다보니까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까지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