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거짓말하는 자입니까?"
본문
1.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대답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는 '사랑'이란 말보다 더 함축적인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개념인 '사랑'을 집중적으로 언급한, 이른바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성경이 신약에 두 곳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곳은 저희가 '사랑'이라는 노래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는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자랑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노래하는 이 고린도 전서 13장 말고도,
또 사랑을 언급한 성경이 있는데, 바로 오늘의 말씀은 요한일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3에 등장하는 사랑 장은 한 장에 집중적으로 사랑에 대한 본질을 언급했다면,
요한일서 1장에서 4장까지에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방법과 사랑의 실천에 대한 내용이 넓고
포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린도 전서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2. 몸 말
1) God is Love(요일 4:8, 16)
오늘 저희들이 함께 읽은 본문도 고린도 전서 13장의 첫 번째 사랑 장에 이은 두 번째 사랑 장에
속하는 말씀으로,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이 두 가지를 저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의 두 곳에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God is Love"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강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알 수 있는가?
예술가들의 삶은 그들의 예술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림에 관심을 갖고 계속 감상을 하게 되면,
화가들의 독특한 예술의 세계를 구별할 수 있는 식별력을 갖게 됩니다.
처음 보는 것이라도, 이것이 샤갈의 그림인지, 피카소나 고호 같은 낭만파의 그림인지,
이중섭 화가의 그림인지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인지를 구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림뿐이 아닙니다. 음악을 들으면 잘 듣지 못했던 음악가의 음악이라도 그것이 바하의 것인지,
모차르트, 베토벤, 혹은 드뷔시의 음악인지를 거의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림 속에서, 혹은 음악 속에서 그 그림을 그린 화가와 음악을 작곡한 음악가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 그림들과 음악 속에 예술가들의 혼이 담겨져 있으며, 그들 예술가들의 독특한 예술 창작에 대한
성품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원리를 세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나'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이 세상과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이렇게 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수 있는가?
어릴 때부터 이제껏 지었던 내 죄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수 없이 벌을 받아 벌써 장사되고,
뼈가 흙이 되었어야 함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제껏 건강으로 지키셨을 뿐 아니라,
좋은 곳에서 좋은 성도들, 이웃들과 함께 살게 해 주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이런 고백은 비단 저만의 고백이 아닐 것입니다. 내 죄로 말한다면 참형을 몇 번 당해도 부족할 텐데,
그래도 하나님 이제까지 나를 살리시고 오래 참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 인생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의 개인의 역사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위기와 어려움, 곤란과 좌절 속에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줄 몰랐지만,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해 보신 분은 함께 고개를 숙이며 '아멘'으로 화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역사, 인간의 역사와 '나'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그 모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 역사들의 한 페이지,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성품이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나뭇가지의 새, 들의 백합화, 숲 속의 사슴,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즐거운 듯한 인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고 삼라만상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계속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멜로디 밑에서 마치 잔잔한 저음과 같이 희생되어 주신 분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삼라만상에서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로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 저 깊은 곳, 고통과 아픔의 골짜기에서
메아리쳐 나오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의 반역, 배신, 교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생명들을, 그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까지를 희생하셨던 그 엄청난 사랑 앞에 그 어떤 인간도 고개를 들 수 없으며,
무릎을 굽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
오늘의 본문 2절은 그렇게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고통과 아픔 가운데에서도 피조물들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상에서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이라고 소개합니다.
저희가 예배하는 그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 본질'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 거짓말하는 자입니까?(1:4, 4:20)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도 요한의 대 전제 뒤에 이어, 요한은 오늘 말씀 4절을 통하여
"저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는 두 번째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일서 4:20에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썼는데,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의 형제는 피를 나눈 혈육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받은 모든 신앙 공동체 속의 믿음의 형제 자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간들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형제'입니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영락없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가깝게는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고백도, 완전한 사랑도, 그리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미워하고 증오하며, 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가짜 고백이요,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사랑이 남녀간의 애정이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질고 숭고한 사랑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하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랑의 거짓말쟁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고 못살겠다고 쫓아 다녔기에 결혼을 했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내를 자기 분노의 대상자,
분풀이의 상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대상으로 삼는 남편들이 즐비합니다.
그렇게 남편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평생 의지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남편만을 존경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던 여인이, 남편에 대한 사랑도 존경도 잃어 버린 채,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가버리는 일이 이제는 신문에서조차 눈길을 끌지 못하는
기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아직까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인간간의 사랑이 이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일 것입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한국에서의 남북 이산 가족 상봉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을 모두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조차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인륜을 져 버린 부모와 자식간의 끔찍한 사랑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년(1999년) 6월에는 70세의 마리 노우라는 여인이 필라델피아 법원에서 여덟 명의 자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결혼 직후인 1949년부터 1968년까지의 거의 20년 동안 그 여인은
여덟 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자녀들 모두가 뚜렷한 병명도 없이 어린 나이에 죽어 나갔습니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사인을 '유아 돌연사 증후군'로 처리를 했지만, 결국 검찰의 끈질긴 수사로
그 여덟 명의 자녀들은 모두 생모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자백을 받게 되었습니다.
브라이언 스튜어트라는 31살의 아버지는 한 살된 아들의 양육비를 안 주기 위하여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가져온 HIV(에이즈) 감염 혈액을 주사해서 에이즈에 걸리게 한 혐의로 체포된 일도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30대의 한 남자는 60대의 어머니를 살해했고,
새크라멘토에서는 UC 버클리의 풋볼스타였던 매리엣 포드라는 사람은 임신한 아내와 세 살된 아들을
구타해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미국판 막가파'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디 미국만의 일이겠습니까?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현대에만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류간의 첫 범죄가 바로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살인죄'였습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반인륜적인 가족간의 범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형제와 형제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반목한다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거짓말쟁이의 '거짓 신앙'이라고
오늘 말씀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통해서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더러운 핏줄, 잡스러운 가문 출신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며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지방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여리고로 여행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으슥해서 사람들이 쉽게 다니지 않던 길이었는데, 일이 급하기에 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그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이 급해서 그냥 갈 까도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듣고 그냥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신음소리를 따라 갔더니,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상처에 바르고 지혈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있던 나귀에 그 죽어 가는 사람을 태워 가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모른 채하고 지나갔던 그 사람을 이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공부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제?
瑛葯?레위 사람도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죽어 가는 이웃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두가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우리들의 이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셔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주어서까지 살리시려는 그 하나님의 사랑처럼,
여기의 사마리아 사람도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하였고, 행동을 하였기에, 그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쟌 어빙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금년 초에 개봉이 되어, 아카데미상까지 수상을 했던
'사과 나무 집의 규칙(The Cider House Rules)'라는 영화를 금년 봄에 보았습니다.
미국이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르고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럽고 공황에 시달렸던 1920-1940년 당시,
미국 북동부의 메인주 세인트 클라우드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고아원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 고아원의 원장이며 의사인 윌버 랄치는 어려운 여인들을 위하여 임신 중절 수술을 해주기도 했고,
미혼모들의 출산을 도왔고, 아기가 출산되면 받아서 키워 다른 집으로 양자로 보내는 일 등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바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미혼모로부터 받은 아기 중에는 호머 웰스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호머가 자라서 아이가 되었을 때, 그도 여느 아이처럼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호머가 너무 울지 않아서 입양부모는 그 아이를 다시 고아원으로 데리고 왔어야 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호머가 또 다른 집으로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호머를 입양했던 부모는 어! 린 호머를 학대했고, 호머는 두려움에 매일 울며 지냈습니다.
결국 그 입양 부모들은 호머가 너무 운다는 이유로 그를 고아원에 다시 데려 왔습니다.
랄치 박사는 이 아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수양아들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의술과 철학, 문학 등, 정규 학교 교육 이상의 지식을 전수합니다.
어느 날, 청년이 된 호머는 자신을 키워 주고 그 고아원을 물려주려는 양아버지 랄치 박사와의 견해 차이로,
자신이 한 번도 구경을 하지 못한 세상 속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고아원을 떠나 자신을 인도한 캔디라는 여자의 가족 사과 농장에서 흑인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약 2년 동안, 호머는 사랑, 배신, 우정, 살인, 근친 상간, 전쟁의 비극 등을 경험하다가 끝내는
자신이 뛰쳐나갔던 고아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아원에서 멀리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이들은 힘없이 자신들을 향하여 오고 있는 호머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고아원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호머의 품속에 뛰어 듭니다.
수 십 명의 고아들과 깊은 포옹을 하면서, 비로소 호머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자기가 태어났고, 자랐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그 아이들, 그 생명들이야말로,
자신이 사랑해 줘야 할 대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겼던 양아버지 랄치의 깊은 사랑을 뒤늦게 야 알게 된 호머가,
양아버지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는 그 곳에서 다시
'인간을 ? 泳浩求?일'을 하게 된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있는 내 가정, 내 교회, 내 이웃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내가 사랑해 줘야 할 대상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 내 부모님과 자녀, 함께 기도하며 예배 드리는 성도들이야말로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자입니다
. 그들이 내게 있음에도 사랑하기를 포기한다면,
나는 진실의 탈을 뒤집어 쓴,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3. 맺 는 말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Christian과 Non Christian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라는 내적인 구별로도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가? 아닌가? 하는 외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그 물음에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너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신다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형제, 성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시고 보여 주심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김종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