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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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어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큰 목사님으로 통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그 분에게 그 밑에 후계자라고 할 만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내용을 알고 보면 그 목사님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오해로 인해 두 분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두 분은 안 좋은 관계로 발전해서 쳐다보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에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배신하고 돌아선 제자들을 세 번째 찾아오셔서 아침을 먹이시고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사명을 주시기 앞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어 보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인간세상에서는 있기 힘든 일들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원어를 보면 사랑하느냐..주님은 아가파오를 쓰고 있고 베드로는 예 필레오입니다.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 아가파오하느냐? 예,저는 주께서 아시는 바처럼 필레오합니다.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 필레이스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이번에는 필레이스하느냐 하시자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주께서 내가 필로하는 줄 아십니다.
아가파오는 아가페스의 원형으로 신적인 고귀한 숭고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필레오는 인간의 우정, 열정, 애착을 뜻합니다. 주님은 신의 사랑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인간의 사랑을 말했습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비교급으로 물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일대 일의 관계에서 너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네가 인간적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최상급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우리에게도 최상급의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시고 신뢰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간에도 의부증, 의처증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주님은 신뢰하고 따라오기를 순종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라 가겠다고 고백한 말과 주님을 부인한 사실을 다시 끄집어내어 생각하게하고 이제 주님을 새롭게 사랑하는 출발선에 서게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이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 호칭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겠는가?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에 나를 사랑한다던 그 마음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 있고 무조건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파오의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을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헌신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셨다고 볼수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에게 더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 계산을 참 잘합니다. 주님 앞에서 손익 계산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손익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믿어 주십니다. 주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이라고 소속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양들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양무리를 베드로에게 부탁하십니다.
과거의 실수를 들추지도 않으시고 안그러겠다는 확답도 안 받으시고 맡기십니다. 바로 끝까지 택하신 자들을 신뢰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하시되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시고 신뢰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물음에는 그 사랑으로 이 양무리를 먹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은 이 귀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은 은혜도 주시고 능력도, 지혜도 지식도 주십니다.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옛 말에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을 향해서라도 절을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있고 주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일입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은 양입니다. 나에게 맡기신 양은 어디에 있나요. 눈을 들어 추수할 곡식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을 할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교인 수 늘이기 위한 것은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한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일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먹이라 하시고 또한 치라 하셨습니다. 치라는 것은 돌봄입니다. 홀로 서기까지 가르치고 훈련도 시키며 주의 백성 만들라고 하십니다. 한번 교회에 데리고 나온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돌보아 주어서 믿음 안에 서도록 이끌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다시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을 우리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성도들을 우리 교회 나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양 도둑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다가 세상에 빠져 신앙이 희미해져 가는 성도라면 그를 잘 주께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이는 양 도적질이 아니고 주께로 잘 인도하는 인도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의 침체기라고 합니다. 전에는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성수를 잘하면 십일조를 잘하면 복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생겨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본 교회를 떠나서는 다른 교회를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십일조는 본교회로 보냅니다.
본 교회에서는 십일조가 가니까 신앙생활 잘 하는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받고 싶어 헌금은 하는데 예배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신앙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이름뿐인 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는 비어가고 성도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하는데 축소되는 불행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라는 말은 양을 소생시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시23편에 보면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므로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 생명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바라는 일입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일이 예수님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바로 영혼을 살리는 전도입니다. 결론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사역에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 선교사가 아니라 돕는 자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서 주님의 기쁨이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